오늘 읽기 2019.2.9.


《문조님과 나 6》

 이마 아치코 글·그림/이은주 옮김, 시공사, 2005.2.28.



“읽는 우리말 사전” 네걸음을 거의 끝냈다. 글종이로 4000쪽 가까이 된다. 끝을 앞두고 며칠 동안 더 힘을 쏟느라 부시시하게 아침을 맞이했지만 밥은 다 지어서 차렸고, 가볍게 숨을 돌릴 무렵 전화를 받는다. 책숲집을 보러 온 분이 문 앞에서 전화를 하셨네. 큰덩이를 마치면 밥생각이란 없기 마련. 이틀쯤 안 씻고 빗질도 안 한 몸으로 책숲집으로 나간다. 광주에서 오신 손님하고 몇 마디 말을 섞고 집으로 돌아와서 가만히 누워서 쉬다가 ‘어렵다’라는 낱말을 놓고 동시를 하나 썼다. 저녁에는 《문조님과 나 6》을 읽는다. 우리 집 아이들이 몹시 좋아하는 만화 가운데 하나이다. 집에서는 만화책으로 새를 만나고, 마당으로 나서면 뭇새가 지저귀는 우리 보금자리에서 갖은 노랫소리를 누린다. 이 만화를 읽는 아이들이 가끔 묻는다. “우리 집에서 새 기르고 싶어.” “얘, 마당만 나가도 온갖 새가 찾아오는 우리 집인데, 우리는 진작 새를 기르는 집이 아닐까?” “음…….” “새를 좁은 우리에 가두는 일을 ‘기른다’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해. 너희를 좁은 곳에 가두어 먹이만 주면, 너희는 그렇게 살고 싶니?” “아니.” “다 같단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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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9.2.8.


《은빛 숟가락 15》

 오자와 마리 글·그림/노미영 옮김, 삼양출판사, 2019.1.17.



2018년 3월에 일본 도쿄에 갔을 적에 아마 도쿄에 머무는 마지막 밤이었을 텐데, 늦게까지 문을 여는 책집이 있어, 드넓은 터에 빼곡히 꽂은 만화책을 반가이 바라보며 책시렁을 휘휘 둘러보다가 내가 바라는 그린이 책은 하나도 안 보여서 짧은 일본말로 여쭈었다. “이곳에 ‘오자와 마리’ 님 만화책이 있을까요?” 하고. 안타깝게도 그토록 드넓은 만화책집에 오자와 마리 님 책은 하나도 없더라! 한국말로 나온 책이라 하더라도 그곳에서 사고 싶었는데. 아직 한국판은 매우 더디게 옮기지만, 드디어 열다섯걸음이 나온 《은빛 숟가락》을 읽으면서 이 만화가 얼마나 고운가를 새삼스레 느낀다. 줄거리라든지 꽃맺음은 훤히 보인다. 그렇지만 모름지기 모든 만화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줄거리나 꽃맺음’ 때문에 들여다보지 않는다. ‘훤히 보이는 줄거리나 꽃맺음’이든 말든, 이 이야깃감을 어떻게 풀어내고 다루어서 어떻게 사랑으로 길어올리는가 하는 손길을 만나려고 들여다본다. 이 대목에서 보자면 테즈카 오사무 님은 그저 하느님이요, 타카하시 루미코 님은 하느님 곁에 앉은 새로운 님인데, 오자와 마리 님은 이들 곁에 곱다라니 봉오리를 올린 함박꽃 같다. ‘그린이’라는 사람은 사랑을 그리는 일벗이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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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9.2.7.


《북한 여행 회화》

김준연 글·채유담 그림, 온다프레스, 2019.1.3.



우체국을 들르고 저자마실을 하려고 읍내를 다녀오니 ㅇ이라는 곳에서 전화가 온다. 이들은 내 사진을 나 몰래 썼고, 저작권표시조차 안 했다. 그러나 좋은 뜻에서 그 사진을 썼다는 말만 편다. 거꾸로 생각하자. 아무나 좋은 뜻에서 ㅇ매체 사진이나 글을 몰래 가져다써도 될까? 좋은 뜻이라면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값을 하나도 안 치를 뿐 아니라 저작권이란 없어도 되는 셈일까? 지난달에 수원 ‘마그앤그래’에서 장만한 《북한 여행 회화》를 읽는다. 책이름은 “여행 회화”이지만, 북녘말을 북녘이란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북녘 살림을 고스란히 담아서 쓰는 말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이웃 고장 살림말 배우기’라 할 만하다. 꼭 나들이를 갈 적만이 아니라, 여느 때에도 이웃살림을 헤아리는 눈길이라면 전라말도 경상말도 강원말도 경기말도 다 사랑스럽다. 뭉뚱그리는 한국말이 아닌 ‘고장 숨결에 묻어나는 말’이다. 그나저나, 훔친 쪽이 훔친 줄 못 느끼거나 안 느낀다면, 그들하고는 ‘같은 한국말’을 쓰는 삶이 아니란 뜻일 테지. 마음을 안 읽고 삶과 살림을 못 읽는다면, 무늬로는 한글이어도 먼먼 별나라 사람인 셈이다. ‘소시지’를 ‘고기떡’으로 옮긴 눈썰미가 참 알뜰하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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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9.2.6.


《내가 걸으면 꼬리에 닿는다》

 우노 타마고

 오경화 올김

 대원씨아이

 2018.6.30.



2월은 겨울인가, 아니면 봄을 앞둔 포근한 철인가? 포근하디포근한 고흥에서는 1월이 저물 무렵부터 곧 봄이로구나 하고 느낀다. 며칠 앞서부터 깡동바지나 깡동치마를 입는다. 찬물로 몸을 씻어도 그냥 시원하구나 싶어, 웃통을 벗은 채 마당에 서서 해바라기를 하기도 한다. 시골살이에서 좋은 대목 하나라면, 마당에서 웃통을 벗고 평상에 누워 해바라기를 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더구나 2월 첫머리에. 두 달쯤 걸쳐 천천히 읽는 《내가 걸으면 꼬리에 닿는다》를 드디어 덮는다. 나한테는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무척 야금야금 읽었다. 뭇짐승하고 마음으로 사귄 그린이가 어릴 적부터 뭇짐승하고 사귄 이야기란 참으로 상냥하다. 그래. 이렇게 하면 누구나 새나 고양이나 개나 나무하고도 말을 섞을 수 있다. 말을 섞는다고 할 적에는 ‘마음’을 섞는다는 뜻이다. 의사소통 아닌 마음을 나누기에 말을 나눈다. 얼마나 재미날까? 바람하고 말을 섞고, 이슬하고 말을 섞으며, 별하고 말을 섞으면.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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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9.2.5.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재연 글·그림, 소동, 2019.1.26.



그림이란 얼마나 놀라운지 우리 마음을 포근하게 달래고 눈부시게 빛내는 이음돌이 되곤 한다. 연필로 그리든 크레파스로 그리든 매한가지이다. 손가락으로 하늘에 대고 그리든, 나뭇가지로 흙바닥을 긁든 똑같다. 그림이란 마음꽃일는지 모른다. 글이란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 생각을 활짝 틔우면서 반짝반짝 별빛이 되곤 한다. 글판을 두들기든 종이에 끄적이든 마찬가지이다. 두 눈으로 가슴에 그리든,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살살 적든 언제나 같다.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를 이부자리에 모로 누워서 읽는다. 아침 일을 하고서, 빨래를 마치고서, 밥을 지어 아이들한테 차려 주고서, 등허리를 홀로 토닥토닥하면서 천천히 넘긴다. 할머니가 빚은 그림은 예술가란 분이 빚은 그림하고 사뭇 다르다. 남한테 보여주려는 그림이 아닌, 스스로 즐겁게 살아낸 하루를 담은 그림이다. 붓솜씨를 뽐내려는 그림이 아닌, 스스로 사랑하는 살붙이랑 동무랑 이웃을 기쁘게 담은 그림이다. 모름지기 모든 그림이 처음에는 이렇게 태어나지 않았을까? 학교에서 교사가 가르치는 그림이 아니라, 저마다 살림을 지으면서 사랑하는 삶을 고스란히 담은 이야기가 활짝활짝 피어난 그림이었겠지.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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