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없는 사진말

10. 사진을 왜 잘 찍으려 하는가



  사진을 잘 찍어야 하는가? 아니다. 사진은 잘 찍어야 할 까닭이 없다. ‘사진을 찍으면’ 될 뿐, 사진을 ‘잘’ 찍을 까닭이 없다.


  시험을 잘 보아야 하는가? 아니다. 시험은 잘 보아야 할 까닭이 없다. 시험을 보면 될 뿐, 시험을 ‘잘’ 보아야 할 까닭이 없다.


  공부는 잘 해야 하는가? 아니다. 공부는 잘 해야 할 까닭이 없다. 공부를 하면 될 뿐, 공부를 ‘잘’ 해야 할 까닭이 없다.


  시골지기는 흙을 골라서 씨앗을 심는다. 그저 흙을 고르고, 그저 씨앗을 심는다. 좋은 흙을 고르지 않고 좋은 씨앗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흙이건 사랑으로 보듬는 논밭이요, 어떤 씨앗이건 사랑으로 돌보는 숨결이다. 이리하여, 낫질을 잘 해야 한다든지, 밥을 잘 해야 한다든지, 아이를 잘 키워야 하지 않는다. 그저 낫질을 하고 밥을 하며 아이를 키운다.


  사랑을 ‘잘’ 해야 할까? 아니다. 사랑을 ‘하면’ 된다. 꿈을 ‘잘’ 꾸어야 할까? 아니다. 꿈을 꾸면 된다. 놀이를 ‘잘’ 해야 하는가? 아니다. 놀이를 ‘하면’ 된다.


  윤광준 님은 2002년에 《잘 찍은 사진 한 장》이라는 책을 선보였다. 사진을 처음 찍으려 하는 사람한테 길동무가 되기를 바란다면서 이 책을 선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잘 찍은 사진’이라든지 ‘좋은 사진’이라는 틀에 얽매인 이야기가 가득하다. 왜 사진을 잘 찍어야 하고, 왜 좋은 사진을 찍어야 할까? 뭣 때문에 사진을 잘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야 하고, 뭣 때문에 좋은 사진을 만들어야 한다는 굴레에 얽매여야 하는가? 사진은 그저 찍으면 된다. 그리고, 사진을 그저 읽으면 된다.


  우등생이 되어야 하지 않는다. 모범생이 되어야 할 까닭도 없다. 공부를 하면 된다. 삶을 밝히는 공부를 즐겁게 하면서 재미난 삶을 지으면 된다. 뛰어나거나 훌륭하거나 놀라운 사진을 잘 찍을 까닭이 없다. 스스로 즐겁게 삶을 지으면서 따사로이 사랑을 가꾸어 웃음꽃 피어나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으면 된다. 그뿐이다. 4348.10.10.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비평/사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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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없는 사진말

9. 언제 어디에서나 ‘내 사진’



  내가 찍는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나 ‘내 사진’이다. 내 사진은 ‘네 사진’을 흉내내거나 시늉할 수 없다. 내 사진은 늘 내 사진으로 있을 뿐, 다른 사진이 되지 않는다. 가끔 몇몇 이름난 다른 작가 사진을 흉내내 볼 수 있으리라. 이를테면, ‘내 사진 틀’을 마련하고 싶어서 이렇게도 찍어 보고 저렇게도 찍어 볼 만하겠지. 그런데, 다른 사람이 빚은 ‘다른 사람 틀’에 맞추어 찍는 사진은 언제나 ‘내 사진다운 결’이 하나도 없는 줄 아주 쉽고 빠르게 알아채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 사진 틀을 세우려고 이렇게도 찍거나 저렇게도 찍어 본들, 정작 나한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줄 곧 알아낼 수 있다.


  무슨 소리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찍으면 될 뿐이다. 여기에서는 이렇게 찍어야 하지 않는다. 저기에서는 저렇게 찍어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찍을 이야기를 스스로 찍을 뿐이다. 그래서 ‘잘 찍은 사진’이나 ‘잘 찍도록 이끌 만한 도움말(팁)’은 하나도 없다.


  오늘날 사회에 떠도는 수많은 사진 가운데 ‘아무개 사진’이라고 이를 만한 사진은 매우 드물다. 거의 모든 사진이 ‘나다움’을 담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 멋지거나 그럴싸해 보이는 틀(껍데기, 형식)에 매달린 채 다른 사람 흉내나 시늉을 내니까, 이런 사진에는 ‘사진’이라는 이름조차 아깝다. 아니, 쓸 수 없지. 다른 사람을 흉내내어 찍는다면, 이는 그저 ‘흉내’이다. 시늉으로 찍는다면 ‘시늉’이다. 이러면서 ‘베끼기’와 ‘훔치기’가 나온다. 왜 베끼거나 훔칠까? 왜 다른 사람 사진을 베끼거나 훔칠까? ‘내 이야기’를 담을 ‘내 사진’을 찍어서 ‘내 삶’을 ‘내 사랑’으로 가꾸어 ‘내 기쁨’을 한껏 누리려고 하는 ‘내 노래’가 없으니 베끼거나 훔친다.


  ‘사진이 잘 나오는 곳(포인트, 지점)’은 없다. ‘사진이 잘 나올 만한 때(시간)’는 없다. 찍고 싶을 때에 찍어라. 그러면 된다. 찍고 싶은 모습을 찍어라. 그러면 넉넉하다. 언제 어디에서나 내 눈으로 보고 내 마음으로 찍어 내 사랑으로 읽는다. 4348.10.9.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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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진을 가르는 형식



  모든 사진에서 ‘틀’은 껍데기이다. 이른바 ‘형식’은 그야말로 껍데기이다. 왜 그러한가 하면, 틀이든 형식이든 프레임이든 모두 껍데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겉모습’이다. 겉모습은 알맹이가 아닌 겉모습이요, 겉모습은 언제나 바깥을 감싸는 옷하고 같다.


  사람을 볼 적에 무엇을 보려는가? 옷을 보려는가, 사람을 보려는가? 다만, ‘옷을 입은 사람’을 볼 수도 있을 테지만, 우리는 ‘사람을 본다’고 할 적에는 ‘걸친 옷에 따라 바뀌는 사람’이 아니라 ‘옷을 걸치든 안 걸치든, 또 어떤 옷을 걸치든, 옷을 아랑곳하지 않고 늘 마음으로 마주하는 사람’을 본다고 말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마주해야지, 옷으로 마주할 수 없다. 사람은 사람으로 만나야지, 돈이나 이름값이나 힘(권력) 따위로 만날 수 없다. 사람은 사람으로 사귀어야지, 껍데기로 사귈 수 없다.


  사진은 어떻게 찍는가? 사진은 삶이랑 사람이랑 사랑을 이야기로 버무려서 찍는다. 사진은 껍데기를 그럴듯하게 보여주려고 하는 틀이나 형식이나 프레임이 아니다. 사진은 오로지 ‘알맹이’가 될 모습이자 몸짓이자 넋이자 숨결인 ‘삶·사랑·사람’을 이야기로 찍는다.


  껍데기에 매달리면 언제나 껍데기만 빚는다. 알맹이를 바라보면 언제나 알맹이를 보살핀다. 껍데기를 멋지게 꾸미려 하면 언제나 껍데기를 멋지게 꾸민다. 알맹이를 살가이 어루만져서 가꾸려 하면 언제나 알맹이를 살가이 어루만지면서 곱고 정갈하게 선보일 수 있다.


  껍데기가 멋지거나 그럴듯하게 보이는 사진을 찍거나 읽는면 무엇이 될까? 나 스스로 껍데기에 얽매일 테지. 껍데기 사진은 언제나 껍데기 사진일 뿐이기에 삶도 사랑도 사람도 이야기도 드러나지 않는다. 껍데기에 얽매이는 사진은 반짝이듯 한때 눈길을 모을 수도 있으나 사람들 가슴속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작가도 비평가도 껍데기에 사로잡히면 구름에 붕 뜬 헛발질에서 맴돈다. 4348.10.9.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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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큐사진과 이야기



  다큐작가를 꿈꾸는 젊은이가 있다면 꼭 한 마디를 들려줄 수 있다. 무엇이든 스스로 사랑하는 길을 걸어가면서 스스로 기쁘게 꿈을 꾸는 노래를 부르라고.


  사람들한테 알려야 하는 이야기를 다큐작품으로 만들려 하지 말고,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이야기를 다큐작품으로 그리려 하지 말고, 사회에 충격을 주는 이야기를 찾으려 하지 말고, 가난하거나 따돌림받는 사람들을 만나려 하지 말고, 그저 스스로 사랑하는 이야기를 사진으로든 영상으로든 찍으라고.


  가난한 이웃을 찾아다니면서 찍어야 다큐작품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가난한 사람하고 한마을 사람으로 살면 된다. 함께 살면서 사진도 함께 찍으면 된다. 나그네나 구경꾼이나 손님이 되어 찾아가서 찍는 사진이나 영상은 언제나 ‘나그네 눈길’이나 ‘구경꾼 눈길’이나 ‘손님 눈길’이 될밖에 없다. 나그네하고 구경꾼하고 손님은 무엇을 할까? 더 멋있어 보이거나 충격스러운 모습을 찾으려고 한다.


  대단하다 싶은 기록을 해야 다큐작품이 되지 않는다. 내 곁에 있는 이야기를 그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다큐멘터리라고 한다. 내가 사는 마을이나 터전에서 함께 짓는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다큐멘터리가 된다.


  역사를 바꾼다거나 사회를 바꾼다는 생각으로는 다큐작품을 이루지 못한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역사나 사회를 바꾸어야 할 까닭이 없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즐겁게 짓고 아름답게 가꾸며 사랑스레 돌볼 줄 알면 된다. 내가 바로 이곳에서 나부터 기쁘게 노래하는 삶을 누리면 된다. 이리하여 ‘내 이야기’가 고스란히 다큐멘터리가 되고, ‘내 노래’가 낱낱이 다큐멘터리가 되며, ‘내 꿈’이 알알이 다큐멘터리가 되면 넉넉하다.


  먼 데를 찾지 말고, 나를 보면 된다. 먼 곳으로 갈 생각은 접고, 바로 내가 두 다리를 딛고 사는 마을을 돌아보면 된다. 구태여 고향을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그저 오늘 내가 사는 곳 이야기를 그리고 찍고 살피면 된다. 내 삶터를 바로 오늘 이곳에서 제대로 바라보며 슬기롭게 마주한다면 무엇이든 다큐멘터리가 된다. 4348.10.5.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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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10-05 08:36   좋아요 0 | URL
보통 동아리내에서 주변을 찍자. 자신의 기록을 하자고 이야기하지만 여자들이어서 그런지 중론은 시기별로 꽃이 피는곳 같은 소위 포인트를 가게 됩니다 ㅎㅎ
내 이야기를 찍는것이 생각보다 쉬운일이 아닌듯 합니다~ 그런장소를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집단에 속해있다보면~ ㅎㅎ
안 갈수도 없고.. 간 데 또 가야하고...

숲노래 2015-10-05 09:16   좋아요 0 | URL
`포인트`를 가더라도 그곳에서
내가 담고 싶은 이야기를 찾을 수 있으면 돼요.

이를테면 고홍곤 같은 분은
꽃 사진을 찍으려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도 언제나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꽃 사진마다 담는답니다.

http://blog.aladin.co.kr/hbooks/7763844

그러니까, `내가 찍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언제 어디에서나 생각할 수 있으면
언제나 ˝내 사진은 내 사진˝이 될 수 있어요 ^^
 

사진 없는 사진말

6. ‘사진을 만들’면 재미없는 까닭



  어떤 사진을 배우든, 또 어떤 사진을 찍든, 스스로 즐겁게 찍는 사진이라면 이 사진은 언제나 작품도 되고 예술도 되고 멋있기도 하다. 이와 달리, 작품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진은 작품이 될 테지만, 작품을 만드는 일은 얼마나 즐거울까? 예술로 빚으려고 하는 사진은 예술이 될 테지만, 예술을 빚는 일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멋있게 꾸미려고 하는 사진은 멋있게 보일 테지만, 멋있게 꾸미려고 하는 사진은 얼마나 기쁠까?


  꾸미느냐 안 꾸미느냐는 대수롭지 않고, 예쁘게 보이도록 하느냐 아니냐도 대수롭지 않다. 사진은 언제나 ‘찍는’다. 사진은 ‘만들’지 않는다. 사진은 사진기에 있는 단추를 눌러서 찰칵 소리가 나도록 하면서 ‘찍는’다. 사진은 어떤 모습을 억지로 쥐어짜내거나 비틀어서 이루지 않는다. 아무리 남다르거나 그럴듯하거나 볼 만하도록 만들어 본들, 만드는 사진은 늘 ‘만들기’가 될 뿐이다. 찍지 못하는 사진은 사진이 되지 못한다.


  더 맛있게 하고 싶어서 조미료를 써서 맛을 내면 조미료 맛이 난다. 조미료 맛은 더 나은 맛도 아니고, 더 나쁜 맛도 아니다. 그저 조미료 맛이다. 사진찍기를 하지 않고 ‘사진 만들기’를 하려고 하면, 사진은 얼마든지 만들 테지만, 만들어 놓은 사진에서는 이야기를 길어올리지 못한다. 이야기가 흐르는 삶이나 사랑이나 사람을 사진으로 찍기에, 비로소 이야기가 새롭게 태어난다. 이야기가 흐르지 않는 어떤 틀로 세워 놓은 모습을 만들어서 찍는다면, 이러한 ‘만들기 작품이나 예술’에는 ‘작가 주의주장’만 잔뜩 깃든다. 이리하여 ‘작가 주의주장’만 잔뜩 깃드는 ‘만들기 작품이나 예술’을 놓고 여러 비평가가 서양 이론이나 철학을 끌어들여서 누구도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항 비평이나 해설을 붙인다.


  사진은 바로 오늘 여기에 있는 이야기이지만, 만들기 작품이나 예술은 ‘먼 나라 작품이나 예술’이 되고 만다. 바로 오늘 여기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읽어서 찍을’ 때에 비로소 ‘사진’이다. 4348.9.28.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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