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문학의 자리 - 경계의 문학, 소통의 문학, 청소년문학을 말하다!
박상률 지음 / 나라말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푸른책과 함께 살기 113



열여섯 살에 읽을 책

― 청소년문학의 자리

 박상률 글

 나라말 펴냄, 2011.8.20.



  스물여섯 살이라면 어른이라고 합니다. 서른여섯 살도 마흔여섯 살도 어른이라고 합니다. 쉰여섯 살이나 예순여섯 살도 똑같이 어른이라고 할 테지요. 일흔여섯 살이나 여든여섯 살을 두고도 어른이라고 해요. 여섯 살은 어린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열여섯 살은?


  옛날을 생각하면 열여섯 살은 어른입니다. 다 큰 나이인 만큼 어른입니다. 스스로 제 몫을 할 만큼 일할 수 있는 나이인 터라 열여섯 살은 어른입니다.


  오늘날을 생각하면 열여섯 살은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나이에 있는 사람을 두고 ‘청소년’이라는 한자말을 따로 지어서 가리킵니다. 한국말로는 ‘푸름이’로 가리키기도 합니다.


  열여섯 살쯤 되면 낫질을 제법 잘 할 수 있습니다. 지게질도 썩 잘 할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을 수 있습니다. 밥을 지을 수 있고, 아픈 이를 돌본다든지 아기를 어를 수 있습니다. 열여섯 살쯤 된다면 혼자 먼 나들이를 다녀올 수 있습니다. 혼자 집을 볼 수 있으며, 모내기며 가을걷이며 소꼴베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 1990년대에는 동화가 돈이 되었다. 그랬기에 아동문학과 그다지 관련 없는 출판사들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화책을 냈다 … 대부분의 작가들이 청소년에 댜한 이해가 되어 있지 않으면서 서둘러 작품을 쏟아내기 때문에 요즘 청소년소설은 청소년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것이 문제다 … 청소년은 왜 오늘이 아닌 미래에만 주역이고 내일에만 주인이 될까? 오늘에도 주역이고 주인이면 안 될까 ..  (13, 14, 31쪽)



  밤이 되면 시골은 어둡고 조용합니다. 어두운 시골은 별빛을 환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조용한 시골에서는 멧골에서 울려퍼지는 새소리를 가만히 들을 수 있습니다.


  시골은 여름밤이 그리 무덥지 않습니다. 흙이 있고 풀이 있으며 나무가 있는 시골은 여름밤이 시원합니다. 흙과 풀과 나무가 없다면, 시골도 도시와 똑같이 무덥거나 후덥지근합니다. 마당을 시멘트로 바른 시골은 도시와 비슷하게 덥습니다.


  요즈음은 봄이 봄 같지 않다 말합니다. 왜냐하면 겨울이 끝나서 봄인가 싶더니 여름이라고들 해요. 도시에는 흙도 풀도 나무도 모두 밀려나야 하니까, 저녁이 되어도 봄볕이 식을 수 없고, 싱그러운 바람이 불 수 없어요.


  이런 도시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배울까요.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하더라도 시골을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루 빨리 도시로 갈 생각인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배울까요. 초등학교를 마친 뒤 시골 중·고등학교에서도 입시공부만 하거나 입시학원을 다닌다면, 이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배울까요.



.. 요즘 나오는 청소년소설들은 한결같이 감동보다는 재미를 추구한다. 그럼 소설을 읽는 이유는 재미를 맛보자는 것일까? 그건 그렇지 않다. 재미는 그저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맛이 나는 것이고, 감동은 어떤 느낌이 있어 마침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 게임을 하거나 오락물을 보면서 감동까지 받고자 하는 이는 없다. 그런데 청소년소설이 자꾸만 그런 것들의 꽁무니를 따라가지 못해 안달이다 … 제대로 된 문학은 어린이용이든 청소년용이든 어른용이든 재미가 우선이 아니고 감동이 우선이다. 그러면 감동은 어디서 오는가 ..  (21∼23쪽)



  한국에서 2000년대 열여섯 살은 어떤 나이일까 헤아려 봅니다. 한국에서 열여섯 살은 어른이 아니지만 어린이도 아닐 뿐더러, ‘학생’으로 여깁니다. 열여섯 살이기에 모두 학교를 다녀야 하지 않으나, 이 나이에는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여깁니다. 열일곱 살이나 열여덟 살도 학생으로 여겨요. 이뿐 아니라 스무 살이나 스물다섯 살조차 학생으로 여깁니다. 아니, 요새는 서른 살까지 학생이기 일쑤요, 마흔 살짜리 학생까지 있습니다.


  열여섯 살이지만 밥을 못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스물여섯 살이지만 국을 못 끓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서른여섯 살이지만 아이와 어떻게 놀며 아기를 어떻게 재우는가를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학교를 마치고 책을 꽤 읽었다지만 삶을 모르는 마흔여섯 살이 많습니다. 회사에서 직책이 높고 돈을 제법 모았으며 아파트 한두 채를 거느린다지만 삶을 깨우치지 못하는 쉰여섯 살이 많습니다.


  예순여섯 살 어른은 얼마나 어른다운 한국 사회인지 궁금합니다. 일흔여섯 살 어른은 얼마나 슬기로운 어른다운 한국 문화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모두 나이값을 잊거나 잃으면서 사람다운 빛을 함께 잊거나 잃지는 않는지 궁금합니다.



.. 작금의 청소년소설 가운데 많은 작품이 아주 극단적인 청소년상을 보여주고 있는 건 바로 어른의 시선만으로 청소년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 많은 청소년소설들이 인위적인 성장을, 나아가 강요된 성장을 그리고 있다 … 이론적인 정의를 평생 공부해 봐야 시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시에 대한 그럴싸한 생각만 가지를 쳐 가며 나올 것이다. 시는 문학 이론서  몇 권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시는 시인의 가슴속에서 나온다. 세상을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끙끙 앓으며 살아가는 시인의 가슴속에서 시는 나오는 것이다 ..  (33, 35, 86쪽)



  박상률 님이 쓴 《청소년문학의 자리》(나라말,2011)를 읽습니다. 청소년문학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밝히려는 글을 모은 책입니다. 오늘날 청소년문학이 참말 청소년문학다운가를 묻고 따지는 글을 모은 책입니다.


  청소년문학이란 무엇일까요. 어린이문학 다음은 청소년문학이고, 청소년문학 다음은 어른문학인가요? 누가 청소년문학을 쓰고 누가 청소년문학을 읽어야 할까요?


  어린이문학은 어린이만 읽는 문학이 아닙니다. 청소년문학도 청소년만 읽을 문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요즈음 태어나는 청소년문학을 ‘청소년부터 모든 어른이 읽도록’ 쓰거나 엮거나 빚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태어나는 청소년문학이 ‘청소년부터 모든 어른한테 삶을 밝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학생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책도 많이 읽는가? 그렇다. 무지막지하게 많이 읽는다. 그런데 그들이 읽는 책은 인간의 삶과 존재를 이해하는 책이 아니다. 오로지 시험문제로 나옴직한 것들이 버무려진 책이다 … 아이들이 시험에 필요한 책만 책으로 알게 된 게 그들 탓인가? 아니다. 그들 뒤에는 그들보다도 훨씬 더 책을 읽지 않는 어른들이 버티고 있다 ..  (154, 155쪽)



   열여섯 살에 읽는 책은 교과서여야 하지 않습니다. 열여섯 살에 시집이나 연애소설이나 무협지를 읽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땅 열여섯 살은 어떤 책을 읽을 때에 아름다울까요. 이 나라 열여섯 살은 어떤 책을 읽을 때에 사랑스러울까요.


  스스로 밥 한 그릇 짓지 못하는 열여섯 살이 시험성적만 잘 나오면 될까요? 스스로 바느질이나 빨래를 할 줄 모르는 열여섯 살이 책을 많이 읽고 독후감을 많이 쓰기만 하면 될까요?


  청소년을 맡아서 가르치는 교사는 중·고등학교에서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치는지 궁금합니다. 청소년을 돌보며 아낄 어버이는 푸름이와 함께 어떤 삶을 빛내면서 하루하루 아름답게 살림을 가꾸는지 궁금합니다. 굳이 청소년문학이라는 갈래를 나눌 까닭이 없이 아름다운 문학을 빚고, 아름다운 책을 엮으며, 아름다운 삶을 일굴 우리 어른이라고 느낍니다. 따로 청소년책을 선보여서 읽히기보다는 사랑스러운 글을 쓰고, 사랑스러운 그림을 그리며, 사랑스러운 노래를 함께 부를 우리 어른이라고 느낍니다.


  열여섯 살에도 여섯 살에도 스물여섯 살에도, 또 서른여섯 살과 예순여섯 살에도 우리가 읽을 책은 늘 하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4347.4.2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골 마을 아이들 창비아동문고 119
임길택 지음 / 창비 / 199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이책 읽는 삶 49

 


시골에 흐르는 빛
― 산골 마을 아이들
 임길택 글
 이혜주 그림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0.6.25.



  시골 면소재지에도 편의점이 있습니다. 시골 읍내에도 빵집이 있습니다. 시골에는 백화점이나 대형할인마트는 없습니다. 시골에는 극장도 없습니다. 읍내에는 작은 책방이 있기도 하지만, 시골 면소재지에는 책방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편의점이 있습니다. 도시에는 빵집이 있습니다. 편의점과 빵집이 있을 뿐 아니라 무척 많이 있습니다. 백화점과 대형할인마트도 많고, 곳곳에 크고작은 가게가 줄줄이 늘어섭니다. 작은 책방은 많이 사라졌으나, 도시에서는 책방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골에는 숲이 있습니다. 도시에는 숲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시골을 보면 숲이 차츰 자취를 감춥니다. 도시사람이 놀러오는 관광지로 개발한다면서 숲을 밉니다. 도시사람이 찾아오는 골프장을 지으려고 숲을 밉니다. 도시사람이 마시는 물을 얻으려고 댐을 짓습니다.


  도시에는 숲이 없으나, 요즈음 들어 도시 한복판에 숲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도시에 찻길과 아파트와 건물만 있으면 도무지 숨을 쉴 수 없는 줄 알기에, 차근차근 숲을 마련하려고 꽃을 심고 나무를 심습니다. 풀이 자라도록 하고, 자동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자리를 늘립니다.


.. 산자락 끝 따라 집들이 둥그렇게 늘어서 있는 이곳에서 윤재석 아저씨는 칠대째를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들의 숨결이 듬뿍 어린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아저씨는 더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 아저씨는 밤이 무섭지 않다고 않다고 하였습니다. 산도 나무도 하늘도 모두 아저씨를 지켜 주기 위해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위 밑에 누워 나뭇가지들 사이로 바라보는 하늘만큼 아름다운 것도 드물다 하였습니다. 그 많은 별들을 누가 만들었는지, 그 넓은 하늘은 어디에 닿아 있는 것인지, 그런 생각에 끝없이 빠져들다 보면 신기하게도 만나는 사람들끼리 다투지 말고 또 욕심 부리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  (11, 20∼21쪽)


  맑은 바람을 마시는 사람은 맑은 바람을 마시는 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합니다. 시골에서 태어나서 시골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녁이 늘 맑은 바람을 마시는 줄 못 알아채기도 합니다. 시골을 벗어나 읍내라든지 다른 도시를 찾아가면 비로소 바람맛을 알아챕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마을을 벗어날 때부터 바람맛이 제 몸에 얼마나 싱그럽게 감도는가 하고 깨닫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맑은 바람보다 매캐한 바람을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은 맑은 바람보다 매캐한 바람을 그리거나 반깁니다. 지나치다 싶도록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서울 같은 데에서 돈벌이와 일자리를 찾기를 바라곤 합니다. 맑은 바람보다 돈이 먼저요, 맑은 하늘보다 일자리가 먼저가 됩니다.


  시원한 물을 마시는 사람은 시원한 물을 늘 누리는 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합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만 지내는 사람이라면, 이녁이 언제나 시원한 물을 들이켜는 줄 못 느끼기도 합니다. 시골을 벗어나 면소재지라든지 다른 도시로 마실하면 시나브로 물맛을 알아봅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물맛이 제 몸을 얼마나 따사롭게 보듬는가 하고 깨닫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원한 물보다 수도물을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은 시원한 물보다 수도물을 그리거나 반깁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복닥복닥 얼키고설키는 서울 같은 곳에서 꿈을 찾거나 사랑을 노래하겠다고 하지요. 시골에서 시골물 마시면서 꿈을 찾거나 사랑을 노래하려는 이를 만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 농약을 칠 때 나가떨어진 벌들을 보고서 아저씨는 이런 생각을 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 옛날처럼 농약을 안 치던 시절로 돌아가야만 사람 구실을 하며 살겠구나.’ … 5월에 들어서면서 꽃의 가짓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어쩌다 모양이 신기하고 예쁜 꽃을 보면 아이들이 이름을 물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모른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해야 하는 선생님은 낯뜨거울 때가 많았습니다 … 날마다 보아 오던 학교 안 나무들도 모르는 것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우등생이라는 말을 집안 식구들이나 선생님에게 수도 없이 들어왔건만, 지금에 이르러 생각하니 대학을 다닐 때까지 무얼 배웠나 싶었습니다 ..  (24, 43, 44쪽)


  햇볕이 내리쬡니다. 햇볕은 시골사람과 도시사람 모두 따스하게 보듬습니다. 햇볕은 흙지기뿐 아니라 공무원과 공장 일꾼 모두 포근하게 감쌉니다. 햇볕은 학교에도 군대에도 감옥에도 따뜻한 숨결을 베풉니다. 부잣집에만 드리우는 햇볕은 없습니다. 골목집에만 찾아가는 햇볕은 없습니다. 햇볕은 지구별을 골고루 품습니다. 햇볕은 지구별 목숨을 모두 품에 안습니다.


  햇볕은 아파트 높다란 시멘트벽에도 내려앉습니다. 햇볕은 아스팔트 찻길에도 내려앉습니다. 다만, 아파트나 찻길에 내려앉는 햇볕은 새 목숨을 북돋우지 못해요. 아파트에서도 찻길에서도 풀은 돋지 못합니다. 도시에서는 나무를 길가에 심어도 자꾸 가지와 줄기를 뭉텅뭉텅 자르며 괴롭힙니다. 도시에서 자라는 나무는 날마다 고단합니다.


  햇볕은 흙땅에 내려앉고 싶습니다. 햇볕은 풀잎에 내려앉고 싶습니다. 햇볕은 우듬지뿐 아니라 맨 밑에 있는 나뭇가지에 내려앉고 싶습니다.


  햇볕은 딱정벌레 등딱지에 내려앉고 싶습니다. 햇볕은 제비 꽁지에 내려앉고 싶습니다. 햇볕은 개구리 등짝에 내려앉고 싶습니다. 햇볕은 딸기꽃과 앵두꽃에 내려앉고 싶습니다.


.. 물방울이 뚝뚝 듣는 노란 개나리꽃이 햇살 아래에서보다 더 고왔고, 형준이네 집에서는 형준이네 식구들이 이웃 분들과 못자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 언젠가 나는 여러분의 언니들에게, “왜 너희들은 선생님들 이야기라면 십리 길도 기꺼이 다녀오면서 아버지 어머니가 말씀하시면 부엌에서 물 떠오는 것도 투덜대느냐?”고 야단친 적이 있었습니다 … 우리 아버지 얼굴이 땅빛을 닮기까지엔 하루 이틀의 바람이나 햇빛으론 어림도 없다는 생각이 들고, 그 마디 굵고 굳은살 박힌 거친 손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  (29, 34, 35쪽)


  햇볕이 닿는 곳이 바스라집니다. 시멘트담이 삭습니다. 햇볕이 닿는 곳이 보드랍습니다. 돌담이 동글동글 몽글몽글 부드럽게 거듭납니다. 시멘트로 세운 담은 오래지 않아 무너집니다. 돌담은 백 해와 오백 해를 흘러도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햇볕을 받는 높다란 건물은 백 해조차 안 되어 허물어야 합니다. 햇볕을 듬뿍 받아먹는 나무는 천 해와 이천 해를 거뜬히 살아갑니다.


  우리들은 어떤 곳에서 어떤 목숨이 되어 하루를 누리는가요. 우리는 스스로 아름다운 숨결이 되는가요, 아니면 스스로 1회용품이나 소모품이 되는가요.


  해를 바라보고 해를 사랑하며 해한테 웃음 빙그레 흘릴 수 있을 때에 삶이 빛납니다. 해를 마주하고 해에 살갗이 그을리며 해와 어깨동무하면서 일하는 하루일 적에 삶이 눈부십니다.


  쌀밥을 먹는 사람은 해를 먹습니다. 나락 한 톨은 봄부터 가을까지 햇볕을 먹고 자라요. 감자를 먹고 고구마를 먹으며 오이를 먹는 사람은 해를 먹습니다. 감자도 고구마도 오이도 햇볕을 머금으면서 알이 굵습니다.


  수박도 딸기도 모두 해입니다. 살구도 매실도 모두 해입니다. 풀을 먹든 고기를 먹든 우리는 누구나 해를 먹습니다. 해를 먹고 바람을 마시며 빗물을 들이키는 삶이에요. 해를 맞아들이고 바람을 받아들이며 빗물을 고이 품는 삶입니다.


.. 개울 양쪽 산엔 온갖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나무들은 혼자서만 넓은 땅을 차지하려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들이 서 있는 곳 말고는 풀씨 하나에까지 터를 내주어 함께 살고자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서로 가지를 주고받으며 하늘을 함께 채우고, 키 큰 나무들은 가지를 높이 달아 아래 하늘을 키 작은 나무들에게 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숲속엔 늘 평화가 깃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수줍게 빵을 먹는 명자를 보며, 겉으론 안 그런 척하면서도 명자 같은 아이들보다는 공부도 잘하고 옷도 깨끗이 입고 다니는 아이들을 더 예뻐해 주었던 것을 뉘우쳤습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똑같이 선생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는 것을 오늘 명자가 행동으로 가르쳐 준 셈이었습니다 ..  (51, 79쪽)


  임길택 님 동화책 《산골 마을 아이들》(창작과비평사,1990)을 여러 차례 읽고 되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멧골자락 조그마한 학교에서 자그마한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고 뒹굴고 노래하고 춤추고 꿈꾸던 작은 어른 한 사람 삶을 가만히 그립니다. 수수하고 투박한 교사 한 사람은 어떻게 동화를 쓸 수 있었을까요. 시골내기는 하나같이 시골을 미워하며 도시를 떠나던 때에, 어떻게 시골을 노래하고 멧골을 이야기하는 동화를 쓸 수 있었을까요.


.. 아버지는 순미의 청에 못 이겨 고구마를 받더니 이렇게 말했다. “순미도 이젠 이름 쓰는 걸 배워야 내년에 학교엘 가지.” “학교 가면 선생님이 매 때린다는데 가기 싫어요.” … 아버지가 순미 손을 잡고 ‘김순미’를 한 번 써 주자, 연우가 저도 하겠다고 떼를 써서 아버지는 다시 공책과 연필을 꺼내 연우에게도 똑같이 해 주었다 … 차가 닿자 보따리 가득가득 선물 꾸러미를 채워 든 언니 오빠 들이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끝이 없을 듯 내려오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할머니가 기다리는 수정이네 식구는 없었다. 할머니는 차가 떠나가고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진 뒤에야 가장 늦게 자리를 떴다. 선희가 언니와 보따리를 같이 들고 오다 뒤돌아보니, 할머니와는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선희야, 공부 잘하나?” “그저 그래.” “형부가 니 공부 잘하면 중학을 서울로 보내 준다는데.” “싫어!”  ..  (95, 96, 148∼149쪽)


  서울로 떠난 사람은 시골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니, 죽어서 재가 되면 시골로 돌아오곤 합니다. 시골에서 태어났어도 시골을 떠나면, 시골내기 아닌 도시내기가 됩니다. 주민등록을 옮기고 새 호적을 만듭니다. 시골에서 쓰던 말씨를 버리고 도시내기 말씨가 됩니다. 시골에서 흙 만지던 삶은 잊고 도시에서 흙하고 동떨어진 채 살아갑니다. 밥과 국과 나물과 열매와 남새가 모두 시골흙에서 자라는 줄 까맣게 잊는 도시내기가 되는 시골내기입니다. 해와 바람과 비가 흙과 풀을 보듬으면서 우리들이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며 집에서 쉴 수 있는 줄 잊는 시골내기입니다. 도시내기한테 시골살이를 알려주지 못하고 가르치지 않는 시골내기입니다.


  오늘날 ‘시골내기’나 ‘촌놈’이라는 낱말은 손가락질받는 이름입니다. 오늘날 ‘바지저고리’나 ‘핫바지’라는 낱말은 바보스럽다고 여기는 이름입니다. 시골사람이 시골사람 스스로 깎아내립니다. 시골사람이 시골사람 스스로 살리거나 북돋우거나 아끼지 못합니다. 도시사람도 시골사람을 아끼지 않고, 도시사람 가운데 시골사람으로 살겠다고 나서는 이도 매우 드뭅니다. 이런 흐름이 아주 드세고 짙은데, 스스로 멧골마을에 남아 멧골학교 교사가 되어 멧골마을 아이들이랑 어깨동무하면서 일하고 놀려 하던 임길택이라는 작은 어른 한 사람은 어떤 마음빛이었을까요.


.. “모심는 손이 무릎에서 놀면 무릎이 썩어 시집도 못 간다.” 지은이 아버지가 정아를 보고 농담을 하였다. 정아는 그러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 이번엔 네 포기도 못 심고 “아이고 허리야.” 하는 소리를 그만 입 밖에 내고 말았다. 밤마다 어머니가 허리를 밟아 달라는 까닭을 이제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190쪽)


  시골에 흐르는 빛을 먹습니다. 밥 한 그릇에 시골빛이 그득합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먹는 밥이라 하더라도, 이 밥그릇에는 시골내음이 고소합니다. 참말 시골내음과 시골맛이 없이는 어디에서라도 밥을 먹지 못해요. 청와대라서 시골내음 없는 밥차림이 될까요? 시골내음 없는 밥차림이라면 햄버거와 피자와 과자와 청량음료만 놓아야겠지요. 대통령께서, 국회의원께서, 법관께서, 의사께서, 교수께서, 전문가께서, 학자께서, 기자께서 시골내음 없는 밥을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먹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궁금해요. 시장께서, 군수께서, 핵발전소 연구자께서, 군대 간부께서, 전쟁무기 과학자께서, 평론가께서, 시인께서 시골빛 없는 밥을 날마다 두어 끼니 먹으라 하면 얼마나 맛나게 잘 드실는지 궁금해요.


  시골에 살든 도시에 살든, 우리는 모두 시골밥을 먹습니다. 과자 한 봉지조차 시골에서 감자를 캐거나 양파를 캐니 만들 수 있습니다. 피자이든 빵이든 시골에서 밀을 거두고 보리를 거두니 구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골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시골에서 내처 살아가든 도시로 나와 살아가든, 모든 사람은 시골을 먹습니다. 햇볕과 바람과 빗물이 흙을 적실 때에 사람들이 삶을 가꾸고 문화를 이루며 문명을 닦습니다. 햇볕과 바람과 빗물이 드리울 흙이 없으면,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햇볕과 바람과 빗물이 싱그러이 드리우면서 흙을 보살피고 풀과 나무가 우거져 숲이 빛나면, 바야흐로 사람은 우람한 나무처럼 오래오래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4347.4.1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어린이책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신 창비아동문고 210
이경자 지음, 오오니시 미소노 그림, 박숙경 옮김 / 창비 / 200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푸른책과 함께 살기 112

 


꽃내음 나누는 어깨동무
― 꽃신
 이경자 글
 오오니시 미소노 그림
 박숙경 옮김
 창비 펴냄, 2004.2.20.

 


  아이들과 살면서 아이들 얼굴을 읽습니다. 아이들과 살기 앞서는 아이들 얼굴을 제대로 못 읽었습니다. 아이들이 졸린지 배고픈지 심심한지 아픈지 즐거운지 하는 얼굴빛을 읽자면, 스스로 아이가 되든지 스스로 어버이 되어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졸린 아이는 억지로 재우지 못합니다. 아무리 졸리다 하더라도 잠자리에 억지로 누이면 다시 일어나려 합니다. 졸린 아이는 포근한 품으로 따사롭게 안아야 합니다. 또는 까르르 웃고 떠들도록 더 놀린 다음 살짝 쉬자는 느낌으로 품에 안으면 어느새 곯아떨어집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라면 곁에 함께 누워서 노래를 부릅니다. 밤잠을 미루려는 아이라면 옆에 나란히 누워서 노래를 부릅니다. 때로는 두 시간까지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으레 삼십 분이나 한 시간쯤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날마다 잠자리에서 삼십 분이나 한 시간씩 노래를 부르자면 목이 쉰다거나 힘들다거나 여길는지 모르나, 하루에 삼십 분이나 한 시간씩 부르는 노래는 대수롭지 않아요. 잠자리뿐 아니라 낮에도 언제나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니까요.


  아이 둘을 왼쪽과 오른쪽에 누이고 두 손으로 아이들 이마를 어루만집니다. 입으로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는 아이들 마음으로 살며시 스며들겠지요. 이 노래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버이인 내 가슴으로 찬찬히 젖어들겠지요. 아이들이 즐겁게 잠들도록 돕는 노래이면서, 어버이인 내 삶을 북돋우는 노래입니다.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노래를 골라서 부릅니다. 가장 즐거우면서 밝은 노래를 가려서 부릅니다.


.. 고모네 집은 차로 30분. 위험하니까 자전거로는 절대 가지 말라는 말을 늘 듣지만 지금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눈에 익은 버스 정류장을 차례차례 지나며 계속 페달을 밟았다. 뒤따라가던 버스는 이제 모습도 그림자도 안 보인다 … “어머니가 늘 편지를 써 놓고 가시나 봐?” “아니, 좀 늦어질 때만 그래. 엄마가 늦게 오시면 내가 쌀을 씻어야 해.” 모리노는 그렇게 말하면서 쌀 세 컵을 능숙하게 담더니 박박 씻었다 ..  (53, 66쪽)


  아이가 새로 태어나기에 집안이 이어집니다. 아이가 새로 자라기에 마을이 있습니다. 아이가 새로 크기에 나라가 있습니다. 아이 없는 집안이나 마을이나 나라는 없습니다. 아이는 집안에서나 마을에서나 나라에서나 보배입니다. 아이가 있기에 집안에서도 마을에서도 나라에서도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아이를 아끼지 않는다면 집안도 마을도 나라도 없습니다. 아이를 아낄 때에 비로소 살뜰한 집살림이요 알찬 마을살림이요 빛나는 나라살림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아이 이야기가 제대로 불거지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삶은 ‘육아’나 ‘보육’이나 ‘교육’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아이가 물려받을 삶과 사랑을 헤아릴 노릇입니다. 아이가 누릴 즐거움과 웃음과 꿈을 살필 노릇입니다. 나라에서 돈을 들여 유치원 삯이나 어린이집 삯을 대줄 일이 아니에요. 어버이가 스스로 아이를 맡아 돌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노릇입니다. 집집마다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즐겁게 자라면서 기쁘게 사랑받도록 보금자리를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신문을 펼치면, 아이를 사랑하도록 돕는 기사가 없습니다. 아이한테 어떤 지식을 더 빨리 가르쳐서 더 빨리 입시기계로 만드느냐 하는 기사만 있습니다. 방송을 켜면, 아이를 사랑하도록 이끄는 풀그림이 없습니다. 아이한테 어떤 정보를 더 많이 집어넣어 더 많은 자격증이나 졸업장을 거머쥐도록 하느냐 하는 풀그림만 있습니다.


  입시기계나 시험기계가 되어야 하는 아이들이기에, 학교에서 따돌림이나 괴롭힘이 불거집니다. 중·고등학교뿐 아니라 초등학교에서도 입시와 시험에 목이 졸리는 아이들인 터라, 꿈과 사랑으로 동무를 아끼는 길을 찾지 못해요.


.. “미스즈, 이것 봐 봐. 네가 주운 거하고 똑같지? 이것이 많이 작기는 하지만, 모양이나 무늬가 닮았잖니?” 시즈는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손가방에서 고이 꺼낸 물건은 정말 미스즈가 주운 난쟁이 배의 작은 모형이었다. 두 짝이 분홍 색실로 이어져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건 꽃신이라고 하는 거야.” … “이렇게 조그만 것이 바다를 건너왔네.” “응, 정말 바다를 건넜어.” ..  (62, 64쪽)


  학교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대학입시에 나오는 시험문제를 가르치면 되는 학교일까요? 교과서는 무엇을 담아야 할까요. 보편타당한 지식을 담아서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살아갈 길을 담으면 교과서일까요?


  아이들은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어른들은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학교는 사랑을 나누는 터전이어야 합니다. 대학교는 사랑을 가꾸고 북돋우는 길을 깊고 넓게 여는 몫을 맡아야 합니다. 교과서는 사랑으로 집을 짓고 밥을 지으며 옷을 짓는 빛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사는 사랑으로 집을 짓고 밥을 지으며 옷을 짓는 즐거움을 웃음으로 노래할 수 있는 어른이어야 합니다.


..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지배와 억압에 저항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쓰러진 17세의 소녀, 유관순. “…… 나는 내 나라를 되찾고 싶을 뿐. 그것이 죄가 됩니까!” 격렬한 외침이었다. 다 읽고 났을 때, 미스즈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수많은 민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는 소녀의 늠름한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미스즈는 그 책에 쓰인 이야기를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 “시즈, 우리끼리라도 지금부터 포스터를 그리지 않을래? 어른들은 자기 멋대로 말하지만, 우리 같은 아이들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잖니. 아, 예 그렇습니까 하면서 꼬리를 내린다면 너무 억울해.” ..  (77, 100쪽)


  이경자 님이 쓴 청소년문학 《꽃신》(창비,2004)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일본사람과 한국사람(조선사람) 이야기가 흐릅니다. 일본에서 태어났으니 일본사람이라 할 테고,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한국사람이라 할 테지요. 그렇지만, 일본사람이 일본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한국사람이 한국에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일본에서 났으나 일본사람이 아니요, 한국에서 났어도 한국사람이 아닙니다.


  일본과 한국이라는 울타리는 무엇일까요. 한국과 베트남이라는 울타리는, 또 베트남과 프랑스라는 울타리는 무엇일까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무엇이고, 책에 적히는 역사는 어떤 이야기일까요.


  어른들은 스스로 어떤 삶을 일구면서 역사를 빚는가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어떤 삶을 물려주면서 어떤 역사를 들려주려 하는가요.


.. 조선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이 그토록 숨겨야만 하는 일일까. “엄마, 엄마는 자신이 순수한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이 싫어요?” 엄마는 깜짝 놀란 눈으로 미스즈를 보았다. “아버지도 그게 싫어요?” 미스즈가 다그치듯 묻자 아버지는 당황해서 천장을 올려다본 채로 꼼짝도 않는다. “너희들은 …… 어떠냐?” ..  (139쪽)


  꽃내음을 나눌 수 있는 어깨동무가 즐겁습니다. 꽃내음은 바다를 가로지릅니다. 꽃내음은 비무장지대를 훌훌 넘나듭니다. 꽃내음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나누지 않습니다. 꽃내음은 부잣집과 가난한 집 사이를 스스럼없이 오갑니다.


  꽃씨는 한국에도 일본에도 똑같이 뿌리를 내립니다. 꽃빛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똑같이 빛납니다. 한국땅에 드리운 ‘서양민들레’를 안 좋아하는 이가 있는데, 거꾸로 한국민들레가 서양으로 날아가면 그곳 사람은 ‘한국민들레’를 안 좋아해도 되는 셈이겠지요.


  배추가 언제부터 한국 푸성귀였나요. 감자와 고구마와 고추를 한국사람이 언제부터 먹었나요. 양파라는 이름을 잘 들여다봐요. ‘洋파’입니다. 소금에 절인 푸성귀를 한국사람이 먼 옛날부터 먹었다지만, 배추가 한국에 들어온 지 고작 즈믄 해쯤 되었을까요? 배추보다 갓이 먼저 한국에 들어왔을 텐데, 김치라는 먹을거리를 얼마나 한겨레 먹을거리로 삼을 만한지 아리송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울타리를 따질 일이 없습니다. 어디에서 먼저 태어났는지 가릴 까닭이 없습니다. 함께 노래하면 되고, 함께 웃으면 됩니다. 서로 돕고 아끼면 돼요. 같이 춤추며 이야기잔치 벌이면 돼요.


  우리는 누구나 지구사람인걸요. 우리는 누구나 푸른 바람을 마시는 목숨인걸요. 우리는 누구나 별빛이고 꽃빛인걸요.


  꽃은 꽃씨한테 교과서나 역사를 물려주지 않아요. 오직 하나 사랑을 물려주어요. 나무는 나무씨한테 책이나 재산을 물려주지 않아요. 오직 하나 사랑을 물려줍니다. 사람이 사람한테 물려줄 한 가지라면 마땅히 사랑입니다. 어른이 아이한테 가르칠 한 가지라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사랑이 있기에, 이곳에는 전쟁도 미움도 다툼도 따돌림도 없습니다. 사랑이 자라는 곳에 사랑이 있으니, 이곳에는 계급도 신분도 종교도 국경도 없습니다.


  꽃신 하나가 바다를 건넜어요. 꽃신 하나가 아이들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아요. 꽃신 하나가 아이와 어른 사이에 깃들 사랑을 이야기해요. 4347.3.2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에게 품이란 무엇일까? - 공동체에 대한 고민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 6
윤구병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푸른책과 함께 살기 111

 


어버이 품은 따스합니다
― 나에게 품이란 무엇일까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
 철수와영희 펴냄, 2014.2.25.

 


  아이를 품에 안고 걷습니다. 한참 걷다 보면 팔과 등허리와 다리가 저립니다. 아이는 걷다가 다리가 아플 적에 안아 달라 합니다. 다리 아프다는 아이를 마냥 걸릴 수 없으니, 짊어진 짐이 많아도 아이를 살포시 안습니다.


  잘 걷던 아이가 다리가 아프다 할 적에는 참말 다리가 아프기 때문입니다. 짐을 잔뜩 짊어졌기에 어른도 힘들다 할 만하지만, 짐 하나 짊어지지 않은 아이가 다리 아프다 할 적에는 영차 하고 안습니다. 어른이 아이를 안고 걸을 노릇이지, 아이가 어른을 안고 걷지 못해요. 어른이 아이를 안고 짐을 짊어지지, 아이더러 짐을 짊어지라고 내밀 수 없어요.


  아이를 안고 걸으면 한겨울에도 땀이 흐릅니다. 아이를 안고 걸으면 한여름에는 땀투성이가 됩니다. 한겨울에 아이를 안고 걸을 적에는 찬바람을 덜 쐬도록 겉옷으로 감쌉니다. 한여름에 아이를 안고 걸을 적에는 가뜩이나 어깨에까지 가방을 멨어도 다른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아이가 덜 덥도록 합니다.


.. 교육의 궁극 목표는 오순도순 사이좋게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것입니다. 경쟁력을 길러 주는 것이 교육의 궁극 목표가 아니에요 ..  (20쪽/윤구병)


  집에서도 아이는 으레 팔을 벌립니다. 아이들은 팔을 벌리며 말합니다. “안아 줘.” 때로는 “안아 주세요.” 이런 말을 듣지 않더라도 으레 아이들을 안습니다. 품에 안고 볼을 부빕니다.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를 쓸어넘깁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손길을 바랍니다. 아이들은 따사롭고 포근한 어버이 손길을 기다립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내미는 손길을 반깁니다. 아이들은 즐거우며 사랑스레 감기는 어버이 손길을 누립니다.


  어버이는 누구나 아이였습니다. 어버이도 어릴 적에는 이녁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어버이로 되어 새로운 사랑을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먼먼 옛날부터 수천 해 수만 해 수억 해를 거치는 동안, 사랑이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사람도 짐승도 벌레도 풀과 나무도 늘 사랑을 물려주면서 물려받습니다.


.. 엄마가 나를 ‘품’에 안아 주면, 비로소 나는 엄마젖을 빨면서 엄마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 품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렇게 엄마가 안아 주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  (48쪽/이현주)


  우람한 나무를 가만히 안습니다. 나무를 안으면 나뭇줄기를 타고 흐르는 콩닥콩닥 싱그러운 숨결을 느낍니다. 조그마한 나무를 한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습니다. 나무를 쓰다듬으면 나뭇잎마다 피어나는 짙푸른 숨소리를 느낍니다.


  작은 풀벌레를 손등에 올려놓습니다. 풀벌레가 볼볼 기면서 두근두근 설레는 발걸음을 보여줍니다. 풀거미가 어깨에 내려앉습니다. 내 어깨를 나무나 돌쯤으로 알았을까요. 풀거미가 살살 기어다니며 간지럽습니다. 한참 지켜보다가 호 불어 풀밭으로 내려가도록 합니다.


  숲은 나무를 안습니다. 들은 풀을 안습니다. 바다는 물고기를 안습니다. 지구별은 사람을 안습니다. 나무는 새를 안습니다. 풀은 벌레를 안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을 안을까요. 우리 사람은 무엇을 안으면서, 어떤 삶을 가꿀까요.


..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대학 졸업까지 25년 가까이를 성장기로 보고 공부만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중산층 이상 가정에서는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예요 ..  (100쪽/이남희)


  《나에게 품이란 무엇일까》(철수와영희,2014)를 읽습니다.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에서 태어난 열매인 책입니다. ‘공동체’가 무엇인가를 푸름이한테 들려주려는 어른들이 ‘품’이라는 낱말을 선보이면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책방 〈길담서원〉은 책방입니다. 책방에서 인문학교실을 마련해서 푸름이한테 삶을 이야기합니다. 책방에서 얼마든지 인문학교실을 열 만합니다. 그러면, 책방 〈길담서원〉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우리 학교에서는 얼마나 들려줄까 궁금합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들려줄 이야기를 정작 학교에서는 안 들려주면서 책방에서만 들려주지 않나 궁금합니다. 초·중·고등학교 모두 따스한 품이 못 되면서, 책방에서 따스한 품을 푸름이하고 나누려는 넋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은 왜 학교에 다녀야 할까요.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무엇을 배울까요. 아이들은 왜 지식을 쌓아야 할까요.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어떤 삶을 지켜보나요. 아이들은 왜 졸업장이 있어야 할까요.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사랑이나 꿈을 키울 수 있는가요.


.. 피히테가 말했던 핵심 명제가 있어요. 학교에 집어넣어서 교육을 시키면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따르지 않고 국가의 말을 따르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가 충성했던 존재는 부모나 동네 어른들 혹은 ‘우리 마을’이라고 하는 공동체, 더 넓히면 ‘우리 부족’ 정도였어요. 그런데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부터 이제는 국가라고 하는 막연한 어떤 실체에 충성을 다하게 되는 거예요 … 학교에서 사고력과 창의성을 내세우지만, 사실 제일 좋아하는 것은 낮은 사고력과 높은 애국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아이들을 그냥 학교에 집어넣어 십 몇 년 간 공부시켜 놓으면, 나올 때는 낮은 사고력과 높은 애국심을 가진, 절대로 지배자에 맞서서 단결하지 않는 이기적인 존재로 빚어집니다 ..  (114, 118쪽/이계삼)


  어버이 품은 따스합니다. 사랑으로 돌보는 어버이 품은 따스합니다. 어버이 사랑은 포근합니다. 맑은 눈빛으로 부드럽게 바라보는 어버이 사랑은 포근합니다.


  교사는 교사이면서 어른이요 어버이입니다. 교사는 직업인으로서 교사로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직업으로 교사인 틀을 넘어, 어른으로 사랑스레 아이와 마주할 숨결입니다. 학교 울타리에서 교과서 지식을 알려주는 울타리를 넘어, 어버이로 포근하게 품에 안는 꿈을 노래할 빛입니다.


  살아갈 길을 스스로 먼저 밝히는 어른입니다. 사랑할 길을 스스로 먼저 누리는 어른입니다. 꿈꾸는 길을 스스로 먼저 가꾸는 어른입니다. 어른은 스스로 삶을 밝히고 누리며 가꾸는 동안 아이를 낳아요. 어른은 아이한테 삶 밝히기와 사랑 누리기와 꿈 가꾸기를 물려줍니다.


.. 사람이 없어서 일 못 한다고 그러죠? 아니에요. 좋으면 자기가 하면 되는데, 남 시키려니까 안 되는 거예요 ..  (181쪽/유창복)


  우리는 누구나 어른이면서 ‘학부모’입니다. 배우는 어버이요 가르치는 어버이입니다. 언제나 새롭게 배우는 어버이이면서, 늘 새롭게 가르치는 어버이입니다. 어버이는 어버이 스스로 즐기는 삶을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어버이는 어버이 스스로 못 하거나 안 하는 삶을 아이한테 물려줄 수 없습니다. 즐겁게 노래하는 삶을 물려줍니다. 기쁘게 꿈꾸는 삶을 가르칩니다. 아름답게 돌보는 사랑을 알려줍니다.


  품은 따스할 때에 품입니다. 품은 착하고 참다우면서 아름다울 때에 품입니다. 품은 맑으면서 밝게 빛날 때에 품입니다.


  아이를 즐겁게 안아요. 아이를 신나게 안아요. 아이를 착하게 안아요. 우리 모두 한결같이 어깨동무하는 하루를 살아요. 밤이 깊어 낮새는 모두 잠들고, 밤새가 일어나 고즈넉하게 노래합니다. 4347.3.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대와 통하는 탈핵 이야기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2
최열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69

 


‘탈핵’은 삶을 찾는 첫걸음
― 10대와 통하는 탈핵 이야기
 최열, 김익중, 이원영, 한홍구, 우석균, 강양구, 소복이
 철수와영희 펴냄, 2014.3.11.

 


  봄비가 내립니다. 오늘은 우체국에 찾아가서 편지를 한 통 부치려 했는데 아침부터 일찍 봄비가 내립니다. 봄비가 내리는 들과 숲은 촉촉하게 젖습니다. 비구름이 뿌옇게 낍니다. 비가 마을을 적시는 동안 경운기 지나가는 소리도 짐차 달리는 소리도 없습니다. 마을은 아주 조용합니다. 두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 군내버스도 빗소리에 묻힙니다.


  빗물로 젖는 나무를 바라봅니다. 뒤꼍 매화나무는 폭신한 꽃망울이 터질 듯 말 듯합니다. 며칠 사이에 확 터지겠구나 싶은데, 오늘 비가 하루 내내 내리면서 미처 터지지 못한 채 빗물에 떨어지는 아이도 있을는지 모릅니다. 겨우내 봄을 기다리며 한껏 부풀던 꽃망울이 빗물에 그만 떨어지만 안쓰럽습니다. 그러나 나무 둘레에 떨어진 애틋한 꽃망울은 다시 흙이 되고 나무로 스며들어 새로운 겨울을 날 테고 새로운 봄을 기다리겠지요.


.. 이미 우리는 전 지구적인 소비를 하고 있어요 … 인간의 수명은 길어야 100년밖에 안 됩니다. 핵발전소의 수명은 40년 안팎이에요. 핵폐기물은 10만 년을 계속 갑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볼 때 3000세대의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예요 … 대부분이 핵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일방적인 홍보의 결과이지요. 우리는 오랫동안 핵이 공해가 없고, 안전하고, 경계적이라고 배워 왔어요 ..  (17, 29, 31쪽/최열)


  처마를 타고 빗물이 흐릅니다. 빗물이 흐르면서 새로운 물줄기가 열립니다. 사람한테는 조그마한 웅덩이가 도랑쯤이 될 테지만, 개미나 거미처럼 작은 벌레한테는 커다란 냇물입니다.


  빗물은 지붕을 적시고 찻길을 적십니다. 빗물은 바다에도 멧자락에도 골고루 드리웁니다. 모든 풀과 나무는 이 빗물을 먹고 자랍니다. 모든 짐승은 풀과 나무가 자라는 숲과 들에서 목숨을 잇습니다. 모든 사람은 풀과 나무와 짐승과 벌레가 골고루 어우러진 지구별에서 얼크러져 살아갑니다.


  어릴 적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놀았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빗놀이를 합니다. 눈이 오는 날에는 눈놀이를 하지요. 빗물을 혀로 날름날름 받아먹기도 하고, 얼굴로 빗방울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빗물이 여느 빗물이 아닌 산성비라고 했어요. 예전에는 경제개발이라는 목소리만 외치더니 어느 때부터 냇물과 샘물과 빗물이 모두 더러워져서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 화학약품을 써서 수도물을 마셔야 한다고 했어요.


  빗물을 맞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처음으로 퍼질 무렵, 한국에서 퍽 멀리 떨어진 어느 나라에서 핵발전소가 터집니다. 핵발전소가 터진 이야기를 어릴 적에 못 들었습니다. 어릴 적에 학교에서는 언제나 ‘핵은 깨끗한 에너지’라고 가르쳤어요. 석유와 석탄은 앞으로 말라서 없어질 테니, 우라늄을 써서 핵발전소를 지어 깨끗한 전기를 써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 일본은 사고 후 2개만 남기고 모든 핵발전소의 가동을 중지해습니다 … 우리 나라에도 수명을 연장한 핵발전소가 있습니다. 고리 1호기, 월성 1호기입니다. 모두 지은 지 30년이 넘은 시설들이에요. 바로 옆 일본에서 사고가 났는데도 폐쇄는커녕 안전성을 의심받는 상황에서 재운전을 강행합니다. 특정 학맥과 기관 출신들로 이뤄진 핵발전소 마피아들이 그 배경에 있어요. 막대한 이권이 얽힌 핵발전소를 얌전히 폐쇄할 리가 없는 거죠 … 방사능 물질이 탄소보다 더 환경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얘깁니다 ..  (60, 62, 71쪽/김익중)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핵 = 깨끗함’이라고 배웠지만, 언제나 궁금했습니다. 핵에너지가 깨끗하다지만, 일본에 1945년에 떨어진 폭탄은 핵폭탄이지 않아? 한쪽에서는 깨끗한 에너지라지만 한쪽에서는 무시무시한 무기로 쓰잖아?


  어른들은 이 궁금함을 풀어 주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늘 외곬로 지식을 외우고 시험문제를 풀도록 했습니다. 또한, 핵에너지를 얻는 핵발전소 공사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제대로 밝히지 않았어요. 핵발전소를 지으며 전기를 얻으면 핵쓰레기가 나오는데, 핵쓰레기는 수십만 해 동안 꽁꽁 가두어서 새어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했어요. 그렇지만, 핵발전소를 만들 즈음 핵쓰레기를 수십만 해 동안 빈틈없이 가두는 재주는 없다 했어요.


  어느 나라에서는 드럼통에 넣고 바닷속에 버린다고 했어요. 어느 나라에서는 땅속 깊이 파서 버린다고 했어요. 그러나, 이런 핵쓰레기도 저런 핵쓰레기도 수십만 해 동안 방사능을 내뿜어요. 핵발전소에서 얻는 전기는 깨끗하다고 가르치지만, 정작 수십만 해를 더럽히는 무서운 쓰레기일 뿐 아니라, 지구별을 무너뜨리는 끔찍한 폭탄을 만드는 무기예요.


.. 요즘 학교 폭력이 문제시되고 있잖아요. 이런 것들도 아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알려줌으로써 풀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텃밭을 가꾸고 생명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보는 경험을 하도록 하는 겁니다. 분명히 효과가 있을 겁니다 ..  (100쪽/이원영)


  《10대와 통하는 탈핵 이야기》(철수와영희,2014)라는 책을 읽습니다. 한참 읽다가 1980년대 끝무렵 독일 이야기를 봅니다. 독일에서는 체르노빌 방사능으로 더러워진 우유를 분유로 만들었고, 방사능으로 얼룩진 분유는 몽땅 한국에서 사들였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는 모든 유제품 회사는 1980년대 끝무렵에 한국에서 ‘체르노빌 방사능 분유’를 팔았다고 해요. 1990년대를 넘은 뒤에도 ‘체르노빌 방사능 분유’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해요.


  설마 싶어 예전 신문기사를 살펴보니, 1989년에 ㅎ신문에 조그마한 기사가 하나 나옵니다. 다른 신문에서는 이 이야기를 안 다룹니다.


  왜 안 다루었을까요? 왜 오늘날까지 제대로 안 건드릴까요? 왜 한국 유제품 회사는 ‘체르노빌 방사능 분유’를 버젓이 팔았을까요? 그무렵 한국 정치꾼과 기자는 왜 이 같은 이야기를 제대로 파헤치지 않았을까요?


  체르노빌 방사능으로 더러워진 먹을거리는 분유뿐이 아닙니다. 분유도 우유도 빵도 과자도 라면도 모두, 방사능으로 더러워진 농산물로 만들었습니다. 케찹도 마요네즈도 똑같습니다.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를 살아온 아이들은 모두 ‘체르노빌 방사능’이 몸에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 일본에서 원폭이 터졌을 때, 히로시마에 피폭자가 42만 명 정도이고 그중에 죽은 사람이 약 16만 명쯤입니다. 여기엔 조선인 피폭자도 섞여 있습니다. 조선인 피폭자는 히로시마에 5만 명쯤, 나가사키에 2만 명쯤 해서 약 7만 명이 피폭을 당합니다. 죽은 사람은 히로시마 3만 명, 나가사키는 1만 명입니다 ..  (119쪽/한홍구)


  한국 어린이는 지구별 어느 나라보다 아토피를 많이 앓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는 어린이는 100% 아토피를 앓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아토피를 100% 앓는지 아무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밝히지 않습니다.


  가만히 따지면, 오늘날 모든 한국 어린이가 아토피를 앓는 까닭은 체르노빌 방사능 농산물 때문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1960년대부터 휩쓴 새마을운동 때문에 이 나라 시골에서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끔찍하게 퍼부었어요. 1960∼70년대에 도시에서 살던 사람은 모조리 농약과 화학비료에 젖어들어야 했습니다. 시골에서 살던 사람은 농약을 뿌리느라 몸이 망가졌겠지요.


  한쪽에서는 방사능 농산물과 가공식품이 춤추고, 한쪽에서는 농약과 화학비료와 항생제에 찌든 농산물과 가공식품이 춤춥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수많은 공장과 발전소에서 내뿜는 매연과 쓰레기가 넘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무섭게 늘어나는 자동차가 내뿜는 배기가스와 쓰레기가 넘칩니다. 게다가 흙집과 풀집을 모두 없애서 ‘석면 지붕’을 쓰도록 새마을운동 지도자 박씨가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이제 시골마을 ‘석면 지붕(슬레트지붕)’을 모두 없애려는 움직임이 일지만, 얼마 앞서까지 군대에서든 여느 사회에서든 석면에 고기를 구워먹기 일쑤였어요. 게다가, 석면에 이어 온통 시멘트로 지은 집이 넘쳐요. 시멘트를 안 쓰는 집이 없어요. 시멘트로 지은 집에다가 아스팔트로 길과 빈터를 뒤덮어요. 시골 논둑까지 시멘트로 덮고, 논자락 흙도랑까지 시멘트도랑으로 바꾸어요.


.. 후쿠시마엔 사고를 알리는 어떤 표시도 없었습니다. 경고문도 없고요. 겉으로 보기엔 사고 이전과 차이가 없었어요. ‘일상을 가장한 야만’이라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 지금도 후쿠시마 원전에서는 하루 300톤의 오염수가 태평양 바다로 유출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것이 장기적으로 해양 생태계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정도로만 파아가고 있어요 ..  (135쪽/우석균)


  ‘탈핵’ 하나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탈핵이란 겨우 첫걸음입니다. 탈핵만 한대서 더러워진 이 나라가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핵발전소는 없애지만, 엄청난 고속도로와 공장과 골프장이 그대로 있다면 어찌 될까요. 핵발전소는 없애지만, 시멘트집을 자꾸 늘리기만 하면 어찌 될까요. 핵발전소는 없애지만, 농약과 화학비료와 항생제를 몰아내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핵발전소는 없애지만, 자동차를 줄이지 않거나 석유를 줄이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그리고, 핵발전소는 없애는데, 학력차별이나 계급차별이나 재산차별을 없애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핵발전소는 없애지만, 모두 도시로만 쏠리는 우리 사회를 바로세우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핵발전소는 없애지만, 입시지옥은 그대로 두면 어찌 될까요. 그야말로 탈핵은 첫걸음입니다. 이 첫걸음조차 제대로 디디지 못한다면, 지구별에서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며 살아갈 길은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4347.3.1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