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 - 보통 엄마의 거창고 직업십계명 3년 체험기
강현정.전성은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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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31



‘내 일’을 찾으면 아름답습니다

―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

 강현정·전성은 글

 메디치 펴냄, 2015.1.20.



  우리는 누구나 일을 합니다. 느끼든 느끼지 않든 우리는 저마다 ‘내 일’을 찾아서 합니다. ‘내 일’이란 내가 스스로 찾아서 누리는 일입니다. 남이 시키기에 하는 일은 ‘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깨달아서 바라볼 수 있을 때에 ‘내 일’입니다.


  ‘내 일’은 ‘내 삶’입니다. 내가 스스로 짓는 삶이란 내가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찾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내 삶을 짓지 못합니다. 내가 스스로 바라면서 꿈을 꿀 때에 내 삶을 짓습니다. 남이 시키는 일만 꾸역꾸역 한다면 내 삶을 짓지 못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할 때에도 ‘내 삶’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다만, 남이 시키는 일을 해서 드러나는 ‘내 삶’은 내가 바라거나 꿈꾸는 모습이 아닙니다. 반갑지 않고 기쁘지 않으며 설레지 않는 모습입니다. 어설픈 모습이요, 아름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 인생은 원래 그런 거라고, 힘들어도 참으면서 이 속에서 내 자리를 만들어 가는 거라 믿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형국을 보니 여태껏 내가 믿어 왔던 게 혹시 허상은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 내가 부모로서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려 하는지, 이 아이와 함께 어떤 삶을 꾸려 나가려 하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러기 위해 나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같은 문제에서 아무런 기준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항상 흔들렸다 ..  (27, 31쪽)



  ‘내 일’을 하는 사람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내 일을 하기에 얼굴이 환합니다. 내 일을 할 적에 마음이 가볍고, 내 일을 하며 마음이 가볍기에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기쁘게 여기는 일을 하면 홀가분합니다. 스스로 기쁘게 여기는 일을 하면 안 늙습니다. 스스로 기쁘게 여기는 일을 하면 안 아프고 안 힘듭니다. 남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하기에 거북하거나 힘들거나 지겹거나 따분합니다.


  우리는 모두 잘 알아야 합니다. 내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은 따로 ‘쉴 틈’을 내지 않습니다. 내 일을 하기에 굳이 안 쉽니다. 내 일은 워낙 기쁘고 아름다우니 이 일에 아주 빠져들어서 무척 오랫동안 신나게 하지요. 이와 달리 남이 시키는 일을 할 때에는 몸이 지치고 마음도 벅차기에 자꾸 쉬어야 합니다. 남이 시키는 일을 하다가 살짝 쉬더라도 기운을 되찾기 어렵고, 남이 시키는 일을 날마다 해야 하는 사람은 온몸이 찌뿌둥합니다.


  이를테면, 서울을 오가며 일터를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서울 바깥에서 서울 안쪽으로 새벽같이 들어가서 저녁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에 핏기가 없기 일쑤요, 웃음도 없기 마련입니다. 아무 낯빛이 없어요.



.. 선생이 하고 싶었던 얘기는 결국 ‘사랑’이었다 … 내 아이들에게 절대로 포기해선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할 것, 그것은 사랑을 이루는 참 사람됨의 가치다 …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돈과 힘을 갖겠다는 말은 어쩌면 지독한 오만일지 모른다 … “몸은 힘들었지만 내 안에서 질문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집이란 뭘까? 기둥은 왜 이렇게 세워야 하지? 이음은 이런 식으로밖에 할 수 없는 걸까? 내 인생에 처음으로 질문을 던진 순간이었지요.” 성윤제한테는 온통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  (37, 79, 125, 157쪽)



  우리 어른들은 ‘스스로 기쁜 일’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기쁜 일을 하면서 스스로 아름답게 빛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아름답게 빛나면서 스스로 사랑스레 노래하고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일은 아니나, 돈을 많이 벌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기쁜 일’이라면 돈을 아랑곳하지 않기 마련이지만, 스스로 기쁜 일이기에 이 일에는 돈이 끝없이 들어옵니다. 아름다이 일하는 사람한테는 아름다운 돈이 줄기차게 들어옵니다.


  돈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돈이 기쁘게 들어와서, 다시 돈이 기쁘게 나갑니다. 돈에 시달리거나 들볶이지 않기 때문에 돈을 기쁘게 벌어서, 다시 돈을 기쁘게 씁니다.


  우리는 돈을 벌려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지으려고 일을 합니다. 우리는 돈 때문에 일거리를 찾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찾아서 기쁘게 지으려고 내 일을 살펴서 껴안습니다.


  ‘직업’이나 ‘진로’를 찾아야 하지 않습니다. ‘일’을 찾아야 합니다. ‘기쁨’을 찾아서 ‘기쁜 일’을 누려야 합니다. ‘사랑’을 찾아서 ‘사랑으로 기쁜 일’을 해야 합니다.



.. 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진학과 진로를 성적에 맞추는 모양새가 우리 현실이긴 하다 … 공부와 인성, 둘 중에 인성이 훨씬 중요하다고 백날 말해도, 내 아이의 착한 행동보다 성적만 좋은 옆집 누구를 부러워하는 부모의 모습은 아이에게 너무나 강력한 메시지를 던질 것이다 … “차라리 삐삐만 있던 때가 좋았어. 아니, 그것도 없던 때가 좋았어. 인터넷도 없던 때가 좋았어.” 하며 부질없이 기술의 발전을 탓한다. 하지만 이 모든 푸념은 속상한 내 감정을 배설해 버리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45, 65, 174쪽)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메디치.2015)을 읽습니다. 강현정·전성은 두 분이 엮은 책입니다. 강현정 님은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로서, 이녁 스스로 돌아보는 이야기를 이 책에 담고, 거창고등학교를 이끈 전성은 님한테 말씀을 여쭈어 ‘배움·가르침’을 들으며, 거창고등학교를 다닌 아이들을 만나서 ‘삶’을 어떻게 짓는가 하는 대목을 묻습니다.


  책이름을 보면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이라 나오는데, 강현정 님이 만난 ‘거창고 마친 아이들’을 보면, ‘직업’을 찾아서 산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사는 아이들은 누구나 ‘직업’이 아닌 ‘내 일’을 찾습니다. 사회에서 남들이 바라보는 ‘더 좋아할 만한 직업’이 아닌 ‘스스로 내 삶을 기쁘게 지을 만한 일’을 보면서 한 걸음씩 걷습니다.



.. 그 일은 아이에게 단지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다는 기쁨만 준 게 아니었다. 더 큰 소득은 자신감이었다. 아이는 엄마가 믿어 준 만큼 자신감을 얻는다 … 부모는 아이 속에 신의 형상이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부모는 늘 불안하다. 하지만 불안해도 아이에게 믿음을 주면 통제 속에서 큰 아이보다 훨씬 더 성숙할 수 있다 … 가만히 따져 보면 화가 난다. 도대체 뭣 때문에 교육을 이렇게 비비 꼬아 놓은 걸까. 누구를 위해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걸까. 도대체 누구에게 득이 되는 걸까 ..  (181, 199, 202쪽)



  거창고등학교에는 ‘직업선택의 십계’가 있다고 합니다.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이라는 책을 보면 첫머리에 이 열 가지 다짐말이 나옵니다. “하나,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셋,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넷,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여섯,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열,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이 열 가지를 하나하나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열 가지 다짐말은 거창고등학교 아이들한테 빛이 되거나 소금이 될 만하리라 느낍니다. 다만, 나한테는 이 열 가지 다짐말이 하나도 안 와닿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시골에서 두 아이와 곁님하고 살거든요. 이 열 가지 다짐말 가운데 ‘시골사람’한테 걸맞는 대목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시골사람은 ‘월급’이 없는데 월급이 적은 쪽이 어디 있을까요? 월급을 따지는 일자리는 도시에 있습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노동자한테는 이런 것을 따져야 할 텐데, 왜 고등학교 아이들이 ‘월급 노동자’로만 일해야 할까요? 왜 돈을 먼저 따져야 할까요?


  아이들이 돈을 버는 일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습니다.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을 뿐입니다. 아이들이 돈을 생각하도록 하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할 만한 일을 찾아서 하느냐’ 하는 대목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내가 손수 삶을 짓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내 꿈으로 가는 일을 해야지, 남이 시키는 일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니 ‘승진’이라든지 ‘모든 조건’이라든지 ‘장래성’이라든지 ‘사회 존경’ 같은 대목은 부질없어요. 그리고, ‘좋은 조건’이 있다면 마다 할 까닭이 없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나는 두 아이와 사는 어버이이기 때문에 이 대목을 늘 생각합니다. 내가 시골에서 아름답게 일구는 보금자리라면 누구보다 아이한테 물려줄 만합니다. 내가 아름답게 일군 보금자리를 아이들이 물려받아서 이 아이들이 새롭게 가꾸어서 사랑스레 지으면,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새로운 아이들한테 다시 물려주어서 다시금 새롭게 가꾸는 보금자리로 이을 수 있어요. 아름다운 보금자리에서 두고두고 수많은 나날에 걸쳐서 즐겁게 살면 모두 아름답습니다.



.. 지금은 옆에 안 계시지만 엄마가 나에게 보여준 교육은 그런 거였다. 엄마가 나에게 정말 해 주고 싶었던 말, 내가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셨던지 그 마음. 그걸 그렇게 나와 함께하는 때때마다 삶 속에서 보여주셨던 거다 ..  (223쪽)



  나는 내 나름대로 새롭게 다짐말을 짓습니다. 나는 내가 할 일과 놀이를 생각하면서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한 다짐말을 손수 새롭게 짓습니다. 나는 ‘직업’을 찾을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오직 ‘내 일(내 놀이·내 삶·내 길)’을 찾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하나, 하면서 기쁜 일을 하자. 둘, 하면서 신나는 일을 하자.


 셋, 손수 밥·옷·집 짓는 일을 하자. 넷, 사랑스러운 일을 하자. 다섯, 아름다운 일을 하자. 여섯,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일을 하자. 일곱,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을 하자. 여덟, 숲을 짓는 일을 하자. 아홉, 파란하늘을 보며 바람을 마시는 일을 하자. 열,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는 일을 하자.” 이렇게 열 가지 다짐말을 새롭게 적습니다. 나는 이 열 가지 다짐말을 새롭게 적으나, 우리 아이들이 스무 살 즈음 되면, 우리 아이들은 또 우리 아이들 나름대로 새로운 ‘내 일 찾기 다짐말’을 가슴에 새길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열 가지로 새 다짐말을 쓸 수 있고, 한 가지만 쓸 수 있으며, 스무 가지를 써도 됩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거창고등학교 아이들이 ‘직업선택의 십계’를 외우듯이 쳐다보도록 하지 말고, 거창고 아이들 스스로 ‘내 길 찾는 다짐말’을 쓰도록 이끌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울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 길은 내가 스스로 찾아야 내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은 내가 손수 짓지, 남이 지어 주지 않습니다. 내 일은 스스로 찾아서 할 뿐, 남이 시키거나 알려주어서는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다울 때에 아름답습니다. 내가 너를 흉내내면 안 아름답습니다. 내가 나다운 말을 할 때에 즐겁습니다. 내가 네 말을 흉내내거나 따라하면 앵무새가 될 뿐입니다. 내 삶은 오직 내가 압니다. 내 사랑은 오직 내가 길어올립니다. 내 꿈은 오직 내가 이룹니다.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을 쓴 강현정 님도 이 대목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남을 따라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강현정 님 아이들도 ‘남이 하는 일을 시키려’ 하면 그 아이들도 힘들고 강현정 님도 힘듭니다. 스스로 할 일을 스스로 합니다. 스스로 누릴 삶을 스스로 누립니다.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가르치며, 스스로 사랑합니다. 4348.3.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을 배우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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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온의 숨어 있는 방 창비아동문고 228
황선미 지음, 김윤주 그림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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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82



눈과 마음을 모두 닫은 사람들

― 나온의 숨어 있는 방

 황선미 글

 김윤주 그림

 창비 펴냄, 2006.9.7.



  우리는 누구나 모두 다 볼 수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누구나 모두 다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모두 다 보는 눈’을 차츰 잃거나 잊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없으나,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보는 일’을 잃거나 잊으면서 쳇바퀴에 올라탑니다.


  학교에서는 시험공부만 시킵니다. 시험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서로 어우러져 놀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따돌림이나 편가르기나 괴롭히기 따위를 하거나, 홀로 컴퓨터게임으로 빠져듭니다. 어버이나 어른은 아이들을 시험공부와 학원에 몰아넣으면서 삶과 사랑과 꿈하고는 등을 지도록 합니다. 삶과 사랑과 꿈을 내려놓아야 하는 아이들은 이제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코앞에 있는 것조차 두 눈으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밥 한 그릇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농약을 친 푸성귀를 알아채지 못하며, 햇볕·바람·빗물을 먹은 싱그러운 나물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오직 돈만 벌어야 한다는 사회·경제 얼거리에 갇힙니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일자리가 아니라면 아무 뜻이 없는 줄 여깁니다. 삶을 가꾸는 일이나, 사랑을 나누는 일이나, 꿈을 키우는 일하고는 아예 등을 집니다. 이리하여, 스무 살쯤 될 무렵에는 사람을 제대로 마주할 줄 모르고, 서른 살쯤 될 무렵에는 사람한테 깃든 착한 숨결을 찬찬히 바라볼 줄 모르며, 마흔 살쯤 될 무렵에는 사람한테 서린 참된 넋을 옳게 읽을 줄 모릅니다.



.. “나무 좀 베었다고 세 살던 사람을 내보낸 건 성급한 처사지. 나무가 워낙 커서 창문도 가리고, 볕도 안 들어 그랬다는데.” “그럼, 집주인에게 물어 봤어야죠. 그렇게 오래 살고 약이 되는 나무를 물어 보지도 않고 벤 걸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나요. 당숙모가 얼마나 애지중지하던 나문데.” … 여기에 살았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오늘은 여기가 꼭 우리 집인 것처럼 반갑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  (13, 68쪽)



  오늘날 꽤 많은 사람들은 장삿속을 가리지 못합니다. 장삿속을 가릴 줄 알더라도 그냥 장삿속에 휘둘립니다. 오늘날 퍽 많은 사람들은 겉치레나 눈속임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정치나 경제나 사회나 문화를 휘어잡은 이들이 꾸미는 겉치레나 눈속임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거짓말에 쉬 넘어갑니다. 참이 아닌 거짓을 쏟아내는 신문과 방송이 흘러넘쳐도, 참과 거짓을 스스로 가릴 줄 모릅니다. 곁에서 눈밝은 사람이 참과 거짓을 제대로 가려내어 알려주어도 이를 귀담아듣거나 눈여겨보지 못합니다. 아주 종(노예)이 되고 맙니다.


  이를테면, 요즈음 아이들은 딸기가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돋는 열매인지 모릅니다. 딸기꽃을 아는 아이는 매우 드뭅니다. 딸기는 비닐집이 아니라 들과 숲에서 나는 열매인 줄 생각하는 아이는 아주 드뭅니다. 가게에 나도는 거의 모든 딸기는 비닐집에서 겨우내 석유난로 기름내음을 먹으면서 비료와 농약과 항생제와 수돗물로 자란 줄 생각하지 못하고, 이런 모습을 보더라도 아무것도 못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막걸리라 ‘쌀로 빚은 술’인 줄 잊습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막걸리는 ‘쌀’로도 안 빚고 수입밀로 빚습니다. 한국에서 나는 쌀로도 안 빚고 수입쌀로 빚기 일쑤입니다. 여기에 갖가지 첨가물과 화학약품을 집어넣어 단맛을 돋웁니다. 그렇지만 이를 깨닫는 어른은 대단히 드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닭우리에 갇힌 닭처럼 길드는 오늘날 사람인 탓에, 비닐집에서 농약과 비료와 수돗물로 키우는 딸기나 푸성귀를 먹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학교와 사회와 제도권에 길들여진 사람은 ‘길들여진 밥’과 ‘공장에서 똑같이 찍은 밥’만 먹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아이들도 길드는 종이 되는 길로 접어드니까, 스스로 놀이를 새롭게 지어서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컴퓨터게임에만 빠져들어야 할밖에 없는지 모릅니다. 눈은 있으되 눈으로 못 보고, 귀가 있으되 귀로 못 듣고, 마음이 있으되 마음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 강우가 이상해질 수밖에 없는 일을 겪기는 했다. 아파트가 떠들썩하게 싸워대던 부모님이 이혼하고 나가 버려서 할머니랑 살게 된 것이다. 그게 우리 집 일이었다면 난 미쳐 버렸을지 모른다 … 엄마는 내가 여자답기만 바라지, 그게 나를 힘들게 한다는 건 모른다 … “너네는 어디로 간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야말로 갈 데가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넝쿨 집. 어쩌면, 안 그럴지도 모르지만…….” “좋은 집인가 보다. 이름이 예쁘네.” “응. 거긴, 예쁘고 좋아.” ..  (27, 33, 222쪽)



  황선미 님이 쓴 어린이문학 《나온의 숨어 있는 방》(창비,2006)을 읽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아이는 ‘내 삶’이 없습니다. 아이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학교를 다니고, 옷을 입으며, 밥을 먹습니다. 아이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학원을 다니고, 하루를 보냅니다. 이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할 줄 아는 일이 없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놀 줄 모릅니다. 아이는 스스로 동무를 사귀지 못합니다.


  그저 책에 나오는 이야기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도시를 보면 사람도 많고, 어른과 아이도 많습니다. 그러나, 도시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은 서로 이웃이나 동무로 여기지 않습니다. 도시에 있는 학교는 얼마나 크고, 학급도 얼마나 많은가요? 그러면, 그 많은 ‘학교 아이’는 서로 동무일까요?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이웃이나 언니 오빠 누나 동생으로 지내는가요?


  시골에는 마을마다 아이가 없어서 동무를 사귀지 못합니다. 도시에는 동네마다 아이가 넘치지만 동무를 사귀지 못합니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똑같습니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막힌 모습은 똑같습니다.



.. “와아! 누가 이걸 다 키웠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사방이 꽃이었다. 평평한 곳이든 언덕진 곳이든, 돌 틈이든, 장독 옆이든, 나무 근처든 어디든 갖가지 색의 크고 작은 꽃들이 들쭉날쭉한 풀과 더불어 사방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꽃이 진 자리에는 갈색이나 짙은 보라색 열매가 맺혀 있었다. 그 애는 콧노래를 부르며 꽃들 사이를 걸어갔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머리가 시원해!” ..  (146쪽)



  마음이 있으면, 우리는 눈을 감아도 서로 알아봅니다. 마음을 열면,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어떤 느낌이요 생각인지 환하게 알아챕니다. 마음이 없기에, 우리는 눈을 떠도 서로 살가이 사귀지 못합니다. 거짓과 속임수와 눈가림과 겉치레만 판칩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니, 우리는 하루 내내 한곳에 함께 있어도 기쁘게 웃거나 노래하지 못합니다.



.. 울음이 멎자 할머니가 다시 나를 마주보고 섰다. “아가. 무엇이든 자신이 속한 시간에 살아야 한단다. 라온과 내가 속한 시간, 네가 속한 시간은 달라. 넌 살아 있는 영혼이고, 우린 아니지. 그런데 네가 여기 있구나. 그래서 내가 찾아내기 어려웠던 게야. 넌 지금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 그래서 위험해. 자기 시간에 속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냐. 떠돌이나 마찬가지란다. 라온과 나는 곧 우리만의 시간을 따라갈 거야. 네가 속해야 할 시간으로 가렴. 내가 도와주마.” … “할머니가 잊으신 게 저 신발이에요?” “아니다. 그리고 난 무얼 잊은 적이 없다. 아주 요긴한 때 쓰려고 잘 숨겨 두었지. 봐라, 나뭇잎 신발을 받쳐 줄 바람이 오고 있지 않느냐. 태 항아리 덕분이야. 저 바람은 라온을 잡아 주는 삼신할미 손길이란다. 오랜만에 저걸 타는구나. 라온은 바람의 잔등을 타는 걸 참 좋아했지.” ..  (238, 239쪽)



  눈과 마음을 뜨지 못하면, 몸뚱이는 ‘산 목숨’으로 보여도 ‘죽은 목숨’과 같습니다. 눈과 마음을 뜨면, 몸과 마음이 싱그럽게 빛납니다. 눈과 마음을 닫으려 하면, 몸뚱이와 마음은 그저 죽음길로 치닫습니다. 눈과 마음을 열려 하면, 몸과 마음은 눈부시게 깨어나서 아름답게 거듭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부터 풀과 나무와 꽃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부터 흙하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부터 새와 짐승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섞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도시나 시골 모두 풀·나무·꽃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냥 아무 들이나 숲을 삽차로 밀어붙여서 고속도로나 골프장이나 관광단지나 발전소나 송전탑이나 군부대나 아파트나 이런저런 쓰레기더미로 바꾸고 맙니다. 오늘날에는 도시와 시골 모두 흙이나 새나 짐승을 동무로 삼지 않습니다. 흙이 죽든, 새와 짐승이 숨을 거두든, 참말 하나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평화하고는 동떨어진 전쟁무기를 잔뜩 갖추느라 어마어마한 돈을 퍼붓지만, 막상 더 무섭고 아프며 괴로운 사회가 되는 줄 깨달으려 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짓밟는 전쟁무기를 갖춘 군부대에 젊은이를 집어넣어 바보로 만들지만, 정작 이렇게 스스로 바보가 되는 줄 옳게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나온의 숨어 있는 방》에 나오는 아이 ‘나온’은 몸뚱이가 깃든 이곳(이승)에서 즐겁지 않습니다. 즐거운 날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쌍둥이로 함께 태어났으나 먼저 저곳(저승)으로 떠난 ‘라온’과 함께 가려 합니다. 삶도 사랑도 꿈도 없어 보이는 이곳에 있을 뜻이나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린 ‘나온’은 이곳에서 삶을 찾을 수 있을까요? 나온을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제라도 뉘우치고 깨달으면서 사랑과 꿈을 키우는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바로 옆에 있는 아이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제 ‘나온’과 ‘라온’을 함께 바라보도록 눈을 뜨면서 삶을 새롭게 지을 수 있을까요?


  ‘라온’은 바람을 타고 저곳으로 갑니다. ‘나온’은 할머니가 가로막아서 라온과 함께 바람 타고 가는 길로 가지 못합니다. 나온은 앞으로 어떻게 살까요? 나온은 앞으로 스스로 눈을 뜰 수 있을까요? 4348.2.27.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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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원마루 옮김 / 포이에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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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30



작은 씨앗을 보살피는 흙과 같이

―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글

 원마루 옮김

 포이에마 펴냄, 2014.12.1.



  이월로 접어들어 하루하루 흐르면서 이월 한복판으로 접어들 무렵부터 우리 집 뒤꼍에서 쑥삭이 돋습니다. 쑥은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 키보다 훌쩍 크게 자라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그야말로 아주 조그마하면서 앙증맞습니다. 이 조그마한 싹이 나중에 우람한 풀줄기로 커서 꽃을 피우고 잎을 떨구다가 시들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요.


  작은 쑥잎은 더 작은 씨앗에서 깨어납니다. 더없이 자그마한 씨앗에서 조그마한 쑥잎이 돋습니다. 흙은 아주 자그마한 쑥씨를 품어서 따스하게 어루만지는데, 이 따스한 품을 고맙게 맞아들인 쑥씨는 그야말로 무럭무럭 자라고, 쑥대가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꽤 많은 흙이 쑥대를 붙잡아 주어야 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쑥대는 천천히 시들어서, 그동안 저를 붙잡느라 힘써 준 흙한테 다시 돌아가 ‘새로운 흙’이 생기도록 온몸을 내놓습니다.


  다른 풀씨를 보아도 쑥씨와 비슷합니다. 모든 풀씨는 대단히 작습니다. 깨알보다 훨씬 작은 풀씨입니다. 아주 작은 먼지조각으로 보이는 풀씨예요. 흙은 이 모든 풀씨를 고이 아낍니다. 풀씨를 고이 아끼면서 보듬고 돌보는 흙은 나중에 풀한테서 너른 사랑을 돌려받습니다.



.. 이 지구를 파괴하는 건 탐욕과 이기심이지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온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이 우리의 선생으로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어쩔 수 없이 장시간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부모의 역할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만다. 아침에 아이들에게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고, 병치레하는 아이를 돌보고, 밤에 아이를 재우는 일을 비롯해 전통적인 부모의 역할을 포기하고 있다 … 서구 사회에는 돈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 돈이 어린이집이나 학교로 흘러가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  (17, 18, 20쪽)



  아기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흙과 같습니다. 작은 씨앗이라고 할 아이들을 아끼고 돌보면서 섬기는 어버이는 흙과 같은 마음결입니다. 작은 씨앗인 아이들은 어버이를 흙처럼 반기고 고마워 하며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이리하여, 작은 씨앗은 흙을 믿고 기대면서 무럭무럭 자라요. 흙은 작은 씨앗을 사랑하고 어루만지면서 무럭무럭 자라도록 북돋우지요.


  풀은 흙이 있어서 자랍니다. 흙은 풀이 있어서 기름질 뿐 아니라, 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쓸리지 않습니다. 드세거나 거친 비바람에 흙이 좀 쓸리면, 때로는 많이 쓸리면, 흙은 아파 하거나 슬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작은 풀씨가 해마다 나고 지고 자라고 시들면서 새로운 흙을 빚으니까요. 오랜 나날에 걸쳐서 흙은 제자리를 되찾습니다.


  높은 봉우리는 높이가 낮아지지 않습니다. 백두산도 한라산도 지리산도, 봉우리 높이는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새로운 풀씨가 끝없이 자라고 돋아서 시들어서 흙한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흙이 쓸리고 쓸려도 새로운 흙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 마음에 상처를 입은 아이도 여전히 희망을 품고 당신을 보며 묻는다. “제 손을 잡아 주실 수 있나요? 이 세상에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죠?” … 강제력을 동원해서는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 스스로 배우고 싶어 해야 한다 … 정부가 요구하는 학업 프로그램 탓에 아이들은 놀며 배울 기회를 점점 더 빼앗기고 교사들은 과도한 서류 작업에 짓눌리고 있다 … 1000년에 걸쳐 아이들은 마을 어른들 곁에 앉아 인생을 배웠다. 노인들의 말을 듣다가도 어디론가 뛰어가 흥미로운 걸 찾아 놀곤 했다. 이것 역시 배움이다 ..  (25, 33, 37, 43쪽)



  그런데 사람들이 억지로 삽차를 써서 흙을 파헤치면, 이때에는 흙이 앓는 소리를 냅니다. 이때에는 풀씨가 죽는 소리를 냅니다. 억지로 쥐어짜거나 뒤흔들거나 괴롭히면 풀씨도 흙도 모두 고달프면서 아파서 눈물을 흘립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은 풀씨와 흙이 앓다가 죽는 소리에 귀를 닫습니다. 오늘날 학교교육과 제도권과 법률과 정치경제는 모두 풀씨와 흙이 아파서 죽어 가는 모습에 눈을 감습니다.


  피를 말리는 싸움을 붙이는 물질문명입니다. 피가 뒤도록 다투게 몰아세우는 현대사회입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작은 풀씨와 너른 흙은 모두 괴롭습니다. 물질문명 현대사회에서 아이와 어른 모두 고단하면서 힘에 부쳐서 쓰러지고 맙니다.



.. 요즘 부모들은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 주기보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아기의 두뇌 발달에 미치는 효과를 운운하는 연구 결과에 귀를 기울인다 … 제3세계 국가에서 아이들을 징병한다는 소식에 우리는 놀란다. 하지만 사실 우리 아이들도 제3세계에 있는 아이들 못지않게 잔인한 민병대의 일원으로 우리 가정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기업이 여러분의 자녀에게 어떤 친구를 사귀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라고 일러 주는 것이 과연 타당한 걸까 … 아이들에게 평생 남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부모가 주는 사랑이다 ..  (49, 69, 84, 92쪽)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님이 글을 쓰고, 원마루 님이 한국말로 옮긴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를 읽습니다. 책이름에서도 드러나지만, 아이들 이름은 ‘오늘’입니다. 아이들 이름은 ‘어제’도 ‘모레’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바로 ‘오늘’입니다.


  그러면 어른들 이름은 무엇일까요? 어른들은 ‘어제’일까요? 어른들은 ‘모레’가 되면 될까요? 아니에요. 어른들도 이름은 아이들과 똑같이 ‘오늘’입니다. 모든 사람은 ‘오늘’을 삽니다. 모든 사람은 오늘을 살면서 어제를 돌아보고 모레를 내다봅니다. 모든 사람을 오늘을 지으면서 어제를 사랑하고 모레를 꿈꿉니다.



.. 무조건 복종하는 아이로 만드는 게 양육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아이들이 확신을 갖고 인생을 탐험하게 돕되 자신의 한계도 알게 해야 한다 … 하루하루가 새로운 출발이어야 하고 과거는 깨끗이 용서받아야 한다 … 아이들이 보이는 문제 행동을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고 잠재적으로 위험성이 있는 약을 주는 것은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일한 길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 … ‘정상’이라는 것이 있기나 하는 걸까? 어린아이를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대신 변화의 뿌리에 초점을 맞추는 게 어떨까 ..  (123, 125, 140, 146쪽)



  어버이가 할 몫은 삶을 지어서 아이와 함께 누리고 가꾸는 길입니다. 아이가 할 놀이는 삶을 짓는 어버이 곁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면서 웃고 노래하는 길입니다.


  어버이는 삶을 짓습니다. 아이는 놀이를 누립니다. 어버이는 일을 합니다. 아이는 노래를 부릅니다. 어버이는 살림을 가꿉니다. 아이는 웃음을 짓습니다. 이리하여, 어른(어버이)과 아이는 한집을 이루어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지요. 아름다운 보금자리에서는 사랑스러운 싹이 터서 새로운 숲이 우거집니다.


  학교에 맡겨야 할 교육이 아니라, 집에서 삶을 지으면 되는 하루입니다. 사회생활을 잘 해야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삶을 슬기롭게 가꾸어야 할 아이들입니다.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예술에 이바지를 할 아이들이 아니라, 내 보금자리에서 숲을 돌보면서 사랑과 꿈으로 하루를 누려야 할 아이들입니다.



.. 나는 모든 아이가 태어날 때 창조주의 흔적을 안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 마음만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 … 규칙이나 금지 따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부모가 사랑을 보여주면 아이들에게는 안정감이 선물로 따라온다 ..  (163, 179, 185, 186쪽)



  우리 모두 씨앗을 심어요. 우리 모두 텃밭을 일구어요. 도시에는 텃밭 삼을 땅이 없다구요? 그러면 자가용을 내다팔아요. 자가용을 내다팔고 땅을 한 평이든 두 평이든 내 몫으로 장만하고, 아이 이름으로 마련해요. 자가용은 돈을 더 모아서 나중에 다시 장만해도 돼요. 그러나, 내 땅은 바로 오늘 장만해야 해요. 도시에서도 한 평짜리 자투리땅부터 장만해요. 그리고 이 땅에 씨앗을 심어요. 두 평을 장만할 수 있으면 한 평에는 풀씨(푸성귀 씨앗)를 심고, 다른 한 평에는 나무를 심어요. 이윽고 석 평과 넉 평을 더 장만하고, 자꾸자꾸 땅을 넓혀서 열 평과 백 평을 이루도록 해요. 시골에서는 백 평이나 천 평씩 꾸준히 땅을 넓혀서 아름다운 숲으로 가꾸어요. 도시에서도 텃밭과 조그마한 숲정이를 이루어서, 아이와 어른이 함께 웃고 노래할 터전으로 가꾸어요.


  땅값이 비싼가요? 땅값이 비싸면 이 땅값을 댈 만큼 즐겁고 씩씩하게 돈을 벌어요. 아니면, 땅값이 싼 곳으로 집을 옮겨서 ‘부동산’ 아닌 ‘보금자리’가 될 곳을 찾아야지요. 그대로 머무르지 마셔요. 그대로 고인 물이 되지 마셔요. 우리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씨앗을 손수 심어서 가꿀 수 있는 땅뙈기’에 보금자리를 지어야 합니다. 우리 집을 우리가 손수 지어야 합니다.


  건물까지 손수 지으면 가장 나으나, 건물은 남이 지은 데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러나, 땅만큼은, 씨앗만큼은, 바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심어서 숲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교육을 학교한테 맡기지 마셔요. 삶을 사회한테 맡기지 마셔요. 사랑을 정치한테 맡기지 마셔요. 살림을 경제한테 맡기지 마셔요. 꿈을 인문학한테 맡기지 마셔요. 이야기를 종교한테 맡기지 마셔요. 놀이를 스포츠한테 맡기지 마셔요. 노래를 영화나 예술한테 맡기지 마셔요. 모든 배움(교육)과 삶과 사랑과 살림과 꿈과 이야기와 놀이와 노래를 우리가 손수 지어서 기쁘게 누려요. 바로 오늘 이곳에 내 삶을 날마다 새롭게 짓는 길이 있어요. 4348.2.2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배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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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 - 밀사와 연희의 성노동 이야기 철수와 영희를 위한 대자보 시리즈 6
밀사.연희.지승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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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3



‘사랑’을 모르거나 잊은 한국 사회

― 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

 연희·밀사·지승호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5.2.14.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이 무척 드문 오늘날입니다.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사랑을 제대로 모르기 일쑤인데, 오늘날 사람들은 나 스스로 사랑을 제대로 모르는 줄 생각조차 못 하기까지 합니다.


  한자말 ‘연애’는 사랑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영어 ‘섹스’는 사랑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대중노래나 연속극이나 영화에 으레 나오는 ‘사랑’ 가운데 사랑이라고 할 만한 숨결이나 넋이나 이야기는 거의 없거나 아예 없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시내와 사내 사이에서 마음이 끌리거나 살갗을 부비는 몸짓은 어느 한 가지도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랑을 제대로 말하는 사람이 없는데, 사랑을 제대로 바라본 적 없으니 사랑을 알 턱이 없어서 사랑을 제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순 엉터리만 흐릅니다. 집에서는 아이와 어른 모두 바깥으로 나돌도록 내몹니다. 마을에서는 돈으로만 얽힌 사회 얼거리만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시험공부만 시키면서 대학바라기가 되고, 대학교에서는 취업바라기에다가 어설픈 놀음놀이만 판칩니다. 사회는 서로 피가 튀는 돈다툼이기 일쑤입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사랑을 제대로 보여주거나 드러내거나 함께하는 일이란 참말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 사회는 여성에게 정숙할 것을 요구하죠. 그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는 여성은 낙인찍고 추방하고요. 여성을 ‘성녀’ 혹은 ‘창녀’로 가르는 폭력적이고 이분법적인 시선이 이 사회에는 만연합니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서 자신이 ‘창녀’가 아니라는 것을, ‘창녀’와 다르다는 것을, 그렇기에 자신은 ‘창녀’를 증오하고 경멸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어필하고 증명해야 합니다 … 내심은 그냥 그 운동이 싫은 거예요. 남성들의 기득권을 흔드는 여성주의 운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다 … 성노동은 여성 빈곤의 문제와도 닿아 있어요. 절대다수의 성노동자들에게 성노동은 생계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성노동자임을 알리라는 요구는 너무 가혹해요 ..  (13, 22쪽)



  마음이 끌리는 일은 ‘마음 끌리기’입니다. 눈이 맞는 일은 ‘눈 맞음’입니다. 마음이 끌리거나 눈이 맞는대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살을 섞는대서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이성애나 동성애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사랑은 아닙니다. 이성끼리 끌리거나 동성끼리 끌리는 모습일 뿐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끌릴 적에는 ‘좋아하다’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마음이 끌려서 그리로 내 마음과 몸이 가니까 ‘좋아하다’입니다. 어느 한쪽이 없으면 살맛이 안 난다거나, 어느 한쪽이 있으면 살맛이 난다고 하는 마음은 ‘좋아하다’입니다.


  그래서 ‘좋아하다’라는 마음일 적에는 어느 한 사람을 놓고 기쁘거나 싫거나 아쉽거나 즐겁거나 벅차거나 서운하고 안쓰럽거나 하는 뭇느낌이 불거집니다. 그저 ‘좋아할’ 뿐이니까요.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취미나 취향입니다. 이상형을 따지는 마음이란 ‘좋아하는’ 틀입니다. 어느 한 가지에 끌리자면, 내 마음에 들거나 끌리는 데가 있어야겠지요. 그러니까, 취미와 취향과 이상형 같은 모습을 살필 뿐인데, 이러한 모습이나 흐름을 섣불리 ‘사랑’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걸맞지 않습니다.



.. 성노동을 인정하게 되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성노동이 만연한 것입니다 …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돈과 힘을 가진 남자는 언제든 손쉽게 여성의 성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성매매금지가 법으로 제정된 이후에도 그런 현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요 … 남자들이 보기에 여자들의 섹스는 ‘몸만 대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성노동은 육체노동과 감정노동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  (25, 27, 64쪽)



  마음이 끌리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으면 ‘좋다’입니다. 좋다는 마음과 함께 ‘싫다’는 마음도 있을 테지요. ‘좋다·싫다’는 뭇느낌(감정)이 아닙니다. 뭇느낌에 따라 좋거나 싫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어떤 느낌에 따라 휘둘리거나 휩쓸리지 않으면서 차분하게 드러나는 ‘좋다·싫다’입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라든지 ‘좋은 사이’라든지 ‘좋은 동무’라든지 ‘좋은 이웃’처럼 말합니다.


  ‘좋아하는 나라’라 한다면, 그저 내 마음이 끌리는 나라를 가리키고, ‘좋은 나라’라 한다면, 내 마음이 끌리지 않더라도 살 만하다 싶은 나라를 가리킵니다.


  좋은 사람이라면, 이녁이 나한테는 내키지 않거나 못마땅하거나 마음에 안 들더라도, 얼마든지 동무로 사귑니다. 좋은 사람이니까요. 좋은 사람은 허물이 없습니다. 좋은 사람은 금을 긋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때에는 ‘좋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리하여, 아주 많은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사람’ 사이에서 갈팡질팡합니다. 마음이 끌리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가겠느냐, 아니면 마음이 안 끌려도 좋은 사람한테 가겠느냐, 이렇게 두 갈래이지요.


  어느 쪽으로 간대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이 되지는 않습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간다면, 나 스스로 눈먼 매달림일 테고, 좋은 사람한테 간다면, 내 느낌을 숨기거나 가리거나 감추는 셈일 테지요.



.. 성노동자라고 밝히면 성추행·성희롱에 바로 노출되더라고요. 운동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여성들은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그 앞에서는 섹스 이야기도 꺼리면서도 성노동자들 앞에서는 그러지 않아요 … 온라인 유흥가 사이트에서는 업소에 많이 다니고 후기를 올린 사람은 권력이 돼요. 구매자들이 그 사람의 글을 신뢰하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거예요 … 그분들 생각에 성노동 즉 성매매라는 것은 그 자체로 여성들에 대한 폭력이고 사라져야 할 악입니다.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나는 그 일이 좋다. 자부심을 갖는다. 내 스스로 선택한 거고 앞으로도 계속하겠다’ 이렇게 말하니 불편할 수밖에 없는 거죠 ..  (78∼79, 83, 87쪽)



  우리는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서로 ‘그릴’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 있지 못한다면, 몹시 애가 타거나 괴롭거나 힘듭니다.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옆에 없으니 안절부절 못할 뿐 아니라 기운이 빠져요. 좋은 사람이 옆에 없으면 아쉽습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옆에 없다 해서 안절부절 못할 일은 없고, 기운이 빠질 일도 없습니다.


  ‘그리운 사람’은 옆에 있건 없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무리 먼 데 떨어졌어도 마음과 마음으로 만날 수 있기에 다 괜찮습니다. 그리움은 엽서 한 장으로도 가슴을 부풀도록 하고, 그리움은 말 한 마디로도 기운이 샘솟도록 합니다. 그리움 하나에 기대어 서른 해나 쉰 해를 얼마든지 기다립니다. 그리움은 ‘때와 곳(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마음입니다. 서로 그릴 수 있기에 거룩하고, 서로 그릴 수 있으니 아름답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그리움도 사랑은 아닙니다. 그리움은 그리움이지요. 그리움을 놓고 사랑이라 말할 수 없어요. 그리고, 사랑을 놓고도 그리움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움은 거룩하거나 아름답게 보일 수 있습니다만, 언제나 꼭 이만큼입니다.


  하나 더 헤아린다면, ‘좋아하다’가 ‘좋다’나 ‘그리다’보다 낮지 않습니다. ‘그리다’나 ‘좋다’가 ‘좋아하다’보다 높지 않습니다. 세 가지 마음은 높낮이가 아닙니다. 그저 마음 움직임일 뿐이고, 마음결일 뿐입니다.



.. 진보는 자신이 얼마나 양심적인지를 호소하는 인정투쟁에만 머물러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문제는 그런 식의 자기만족이 과연 진보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 이분법적인 대립관계 속에서 투쟁방향을 설정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뜻으로 커밍아웃을 했다고 해도 언론에서 진지하게 그 취지를 살려 줄까요? 일단은 ‘알리는’ 게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많이 알리는 게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19, 40, 45쪽)



  《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철수와영희,2015)라는 책을 읽습니다. 연희·밀사 두 사람이 지승호 님과 주고받은 이야기가 흐르는 책입니다. ‘성매매자’가 아닌 ‘성노동자’가 누구인지 밝히면서 말하는 책이고, ‘성노동’이란 무엇인지 드러내면서 다루는 책입니다. ‘성매매 심판’이 아니라 ‘성노동 바라보기’로 이끄는 책이요, 사랑과 꿈이 자라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성노동을 하는 성노동자한테도 권리(노동권)가 있다는 대목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와 아울러, 제도권으로 똘똘 뭉친 여성운동과 진보운동 모두 어설픈 울타리에 갇혀서 삶과 동떨어진 모습을 찬찬히 드러내는 책입니다. 



.. 간파를 했어야죠. ‘아, 이걸 놓쳤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게 운동가로서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왜 저들이 나를 거부할까?’ 이런 생각 자체가 오만한 겁니다. 자기들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성노동자들을 위한 법을 만든다는 사람들이 성노동자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잖아요. 있었다면 법을 그런 식으로 만들지는 않죠. 성매매특별법을 만들 때 법의 당사자인 성노동자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의 성찰도 없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할 일인 거예요 ..  (48쪽)



  여성운동이나 진보운동이 나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성운동과 진보운동은 좋을 까닭도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한국 사회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도 학교교육만 받았을 뿐이기에, 사회와 삶과 사랑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어요.


  학교에서 성교육은 시키지만, 그나마 허울뿐인 성교육입니다. 임신과 피임을 다루는 성교육이지만, 성추행이나 성폭력이나 성희롱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못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어떤 몸이고, 사람은 어떤 숨결이며, 목숨은 어떠한 빛인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청소년이나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성교육은 과학(생물학) 언저리조차 못 닿습니다.


  여성운동을 하더라도 여성과 남성을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진보운동을 하더라도 사람과 사랑과 삶을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여성운동을 하는 이들은 남녀평등을 외칠 테지만, 평등이란 무엇일까요. 가사분담이 평등일까요? 남자도 아이를 돌보도록 이끌어야 평등일까요? 그러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남자나 여자는 아이를 낳고 키우고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돌보고 하는 흐름을 제대로 배우기나 하는지요? 의무교육 열두 해에다가 대학교육 네 해를 받은 젊은이(여성·남성)는 아이를 낳을 만한 몸과 마음이 어느 만큼이라고 할 만할까요? 아이를 왜 낳고, 아이를 어떻게 낳는가를 알면서 살곶이(섹스)를 하는 젊은이인지요?


  사람은 왜 이 땅에 태어날까요.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무엇을 할까요. 평화란 무엇이고 진보란 무엇인가요. 경제성장이나 경제개발은 진보가 아닙니다. 권리와 의무와 법률과 행정이 조금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진보가 아닙니다. 바보스럽거나 멍청한 권력이나 언론하고 맞서기에 진보가 아닙니다. 덜 바보스러운 사람이 진보일 수 없습니다. 조금 바보스럽든 많이 바보스럽든 모두 바보스러울 뿐입니다. 진보라 할 때에는, 스스로 제대로 삶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제대로 거듭날 줄 아는 숨결입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면서 진보를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읽지 못하며 알지 못하면서, 진보운동이나 여성운동을 하기에, 모두 삶과 동떨어지고 이웃과 어깨동무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 제가 처음에 집창촌에 있었는데, 그때 여성단체들이 자주 와서 반성매매 운동을 했었거든요. 그때는 그게 운동인지도 몰랐는데, 여자들 몇 명이 와서 과자 몇 개 주고, 머리끈도 주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지도 아닌데. 그러면서 이런 나쁜 일 하지 말고 업소에서 나와라, 자기들이 도와주겠다고 해요. 솔직히 불쾌했어요. 자기들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것도 아니잖아요. 당장 일을 그만두면 어떻게 먹고살겠어요 … 업주한테서 받은 선불금을 ‘마이킹’이라고 하거든요. 이게 큰돈인데 법적으로 무효라고 판결이 났다는 거예요. 하지만 아가씨들 입장에선 쉽게 소송을 못 걸죠. 업주나 일수쟁이들이 다 조폭 끼고 장사를 하는데, 후환이 두려운 겁니다 ..  (73, 78쪽)



  사랑이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야 하고, 제대로 헤아려야 하며, 슬기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마음 끌리기(좋아하다)’가 아닙니다. 사랑은 ‘싫고 좋음을 따지는 마음’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리워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사랑은 거룩하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랑은 늘 사랑 그대로입니다. 사랑은 너와 나를 잇습니다. 사랑은 너와 내가 하나로 되는 길로 나아갑니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 수 있는 삶을 밝힐 때에, 비로소 사랑으로 가는 길을 엽니다.


  사랑은 징검다리 구실을 합니다. 사랑은 이음고리 노릇을 합니다. 사랑은 너와 나를 잇는 징검다리가 되어, 서로 한마음인 줄 느끼도록 합니다. 사랑은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울타리가 없음을 보여주면서 서로 한몸인 줄 알도록 합니다.


  넉넉하고 너그러우면서 넓은 ‘사랑’입니다. 따스하면서 포근하고 밝은 ‘사랑’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사랑일 적에는 아픈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일 적에는 다치거나 슬픈 사람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일 적에는 기쁨이나 즐거움도 없습니다. 사랑은 ‘뭇느낌(감정)’에 따라 휘둘리거나 휩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기쁨일 뿐이지, 사랑이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즐거움은 즐거움일 뿐, 사랑이 아니로구나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사랑이 될 때에는, 바야흐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나아가는 길로 접어듭니다. 내가 스스로 사랑으로 거듭날 적에는, 이제부터 삶다운 삶을 짓는 길에 한 발자국 들어섭니다.



.. 우선 불우한 환경에서 시작한 사례가 있어요.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라다가 집을 나와 일을 시작한 사람이 있고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전형적인 경우지요. 돈을 벌려고 시작한 분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언니는 20대 때 악착같이 일해서 모은 돈으로 지금은 다른 일을 하면서 잘 지냅니다. 또 알바 삼아 잠깐 나오는 사람, 특히 학생들이 많아요. 학비나 자취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잠깐씩 일하러 오는 경우지요 … 어쩔 수 없이 성노동을 택하는 건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건 구조적인 문제잖아요. 그렇다면 빈곤해소,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죠. 그 사람들을 피해자로 낙인찍는다고 해서 해결이 되느냐는 거예요. 아무 대책도 없이 말입니다 … 성노동자는 피해자도 아니고 죄인도 아니라는 점, 열악한 현실에서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고 있는 성노동자들이 바로 나와 같은 평범한 한 인간이라는 점을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  (98, 106, 118쪽)



  인문책 《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를 읽으려면, 우리 마음을 ‘사랑’으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사랑으로 가다듬지 못하면서 이 책을 펼친다면, 이 책에서 흐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눈을 밝히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책 한 권을 읽어서 알고 느끼며 거듭나야 할 슬기는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삶과 사랑과 사람을 알고 느끼면서, 새로운 숨결이 되는 슬기를 얻습니다.


  성노동이란 무엇일까요. 가사노동과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이란 무엇일까요. 더 높은 노동이 있을까요? 더 낮은 노동이 있을까요? 성노동자란 누구일까요. 공장노동자와 시골노동자와 사무직노동자란 누구일까요? 더 높은 노동자가 있을까요? 더 낮은 노동자가 있을까요?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가 가장 거룩할까요? 1급 공무원이 가장 높을까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이 가장 훌륭할까요? 청소부나 재벌그룹 우두머리가 가장 대단할까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거룩하거나 훌륭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을 삶 그대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에, 우리는 사랑을 사랑 그대로 맞아들이면서, 내 삶을 내 손으로 짓는 길을 걷고, 내 삶을 내 손으로 지을 수 있을 때에, 서로 하나되는 넋으로 거듭납니다. 서로 하나로 어우러지는 숨결로 다시 태어납니다.


  사랑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사랑은 어디에서나 새롭습니다. 사랑으로 몸과 마음을 가눌 수 있는 사람은, 늘 웃고 노래하면서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는 새로운 하루를 엽니다. 우리는 바로 이곳 지구별에서 사랑을 하려고 태어나고, 어른이 되며, 아이를 낳습니다. 4348.2.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청소년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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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 보림문학선 4
오카다 준 지음, 박종진 옮김, 이세 히데코 그림 / 보림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어린이책 읽는 삶 81



함께 짓는 웃음

― 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

 오카다 준 글

 이세 히데코 그림

 박종진 옮김

 보림 펴냄, 2006.11.16.



  아이가 웃습니다. 아이를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습니다. 아이가 웁니다. 아이를 바라보면서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하고 말하면서 가만히 웃음을 짓습니다. 울던 아이는 천천히 울음을 그칩니다. 웃음은 늘 웃음으로 이어지고, 웃음꽃이 피면 눈물꽃도 어느새 웃음꽃으로 바뀝니다. 참말 웃음은 모든 앙금을 씻거나 털면서 우리 마음이 홀가분하게 태어나도록 이끕니다.


  어른이 웃습니다. 어른을 바라보는 아이가 웃습니다. 어른이 찡그립니다. 어른을 바라보는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다시 웃습니다. 어른이 찡그리는데 아이는 왜 웃을까요? 어른이 찡그린 얼굴이 퍽 우스꽝스럽기 때문입니다. 어른더러 왜 찡그리면서 스스로 슬프거나 괴로우려 하느냐 물으면서 웃음으로 모두 털거나 씻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를 바라보던 어른은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찡그린 얼굴을 풀다가, 이내 무엇인가 깨닫고는 활짝 웃습니다.



.. 공원 나무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에 쓰르라미 소리가 어우러지기 시작하면 여름방학이 슬슬 끝나 간다는 뜻이다 … 사치에는 또 어떤가 하면 공이 지나가고 2초쯤 지나서야 방망이를 휘두른다. 멍하니 방망이를 들고 있다가 운 좋게 공이 맞기라도 하면 좋아서 펄쩍펄쩍 뛰다가 곧장 2루로 내달리고 만다. 그래도 게임을 자꾸 하다 보니 소노미와 사치에를 어떻게 끼워 주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런대로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  (9, 14쪽)



  웃을 만한 일이 있기에 웃습니다만, 웃을 만한 일이 없어도 스스로 웃음을 자아냅니다. 웃을 만한 일이 없으니 안 웃는다고 하지만, 웃을 만한 일은 늘 내가 스스로 짓습니다. 남이 나를 웃기지 않습니다. 익살꾼이 찾아와서 공연을 해야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밥을 짓다가 웃고, 길을 걷다가 웃습니다. 또르르 구르는 가랑잎을 보면서 웃고, 저절로 노래가 나와서 웃습니다.


  자전거를 몰면서 웃어요. 자가용을 타면서 웃지요. 함께 말을 섞는 동안 웃습니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주는 동무가 있어서 웃습니다. 나한테 이야기를 새록새록 들려주는 이웃이 있어서 환하게 웃습니다.


  그러니까 안 웃을 까닭이 없는 하루입니다. 혼자 있을 적에도 웃고, 여럿이 있을 적에도 웃습니다. 춤을 추면서 웃고, 조용히 생각에 잠기다가 웃습니다. 책을 읽다가 웃고, 풀밭에 쉬를 하다가 웃습니다. 들고양이를 보면서 웃고, 구름한테 손을 흔들면서 웃습니다.


  꽃이 나를 바라보며 웃습니다. 나무가 푸른 그늘을 드리우면서 웃습니다. 밭자락에 씨앗을 한 톨 심으면서 웃고, 무를 뽑거나 파를 끊으면서 웃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기도 할머니도 어머니도 동생도 모두 ‘웃는 낯’으로 자요. 찡그린 낯으로 자는 사람이 없이, 다 같이 웃는 낯으로 아늑하게 잠들어요.



.. 전에 살던 데는 보기에는 복박복닥해도 다들 한가족 같아서 마음이 편했어. 학교 끝나고 와도 외톨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지. 그랬는데 그 골목이 난데없이 사라진다는 거야. 이유는 나도 몰라 … 보트 그림자가 바다 밑바닥에 깔린 하얀 모래 위를 미끄러졌어. 노를 저을 때마다 작은 물결이 일었어. 물결이 햇빛을 온갖 모양으로 바꿔서 바닷속에 그림을 그리는 게 재미있었지. 내가 재미있어 하니까 그 아이도 기쁜 눈치였지. 제대로 보트 젓는 법도 배우고 같이 수영도 하는 사이에 훌쩍 시간이 흘렀나 봐. 하늘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어 ..  (23, 48쪽)



  오카다 준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보림,2006)를 읽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모두 ‘포근한 보금자리’를 잃습니다. 어버이가 바깥일로 바쁘다든지, 마음을 붙이고 살던 동네가 재개발 때문에 하루아침에 사라져야 한다든지, 두 어버이가 갈라서야 한다든지, 학교나 동네에서 가까운 동무가 없다든지, 여러 가지 까닭 때문에 쓸쓸하지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서 서로 돌보고 어루만집니다. 이 아이들이 한 곳에 모이면서 즐겁게 어우러지고 함께 노는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 사이에 ‘아마모리’라는 아저씨가 있습니다.


  아마모리라는 아저씨는 어떤 사람일까요. 아마모리라는 아저씨는 왜 아이들 사이에서 살며시 징검다리가 될까요. 웃음을 잊거나 잃은 아이들한테 아마모리 아저씨는 어떻게 새로운 웃음을 찾아 주거나 나누어 줄 수 있을까요.



.. 선생님은 내 말을 다 듣고 나서도 그저 “그래?” 한마디뿐이었어. 하다못해 다짜고짜 때려서 미안하다는 말조차 안 했어. 되레 히사오 옷차림이 어떻다는 둥, 걸핏하면 준비물을 잊어버린다는 둥 야단치는 거야. 속상해서 내가 다 눈물이 나오더라 … 나는 고집을 부리느라 무서운 꿈을 꾸고도 엄마한테 달려가지 않았어. 엄마도 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침대 속에 기어 들어간 나한테 한 번도 오지 않았고. ‘이 집에는 외로운 어린아이 둘이 살고 있는 거야.’ 나는 속으로 되뇌면서 공원에 드리워진 내 그림자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  (82, 86쪽)



  온누리에는 두 가지 사랑이 있습니다. 이분법이나 이원론으로 가르는 사랑이 아닌, 두 가지 사랑입니다. 첫째, 낳는 사랑입니다. 둘째, 기르는 사랑입니다. 아기를 몸에 배어 낳는 사랑이 하나요, 아기를 몸에 배어 낳지 않았으나, 아기를 제 몸에서 낳은 목숨처럼 헤아리는 사랑이 둘입니다.


  둘레에 있는 수많은 아이를 ‘내가 낳은 아이’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옆에 있는 모든 아이를 ‘내가 기르는 아이’처럼 사랑할 수 있어요. 가시내와 사내가 서로 ‘낳은 아이를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고, ‘아이를 기르는 사랑’처럼 따스하거나 포근하게 서로 아끼며 보살필 수 있습니다.


  사랑을 안다고 한다면, 내 몸으로 아기를 낳아서 돌보는 사랑을 안다는 뜻인 한편, 내 몸으로 낳지 않은 아기이지만, 언제까지나 곱게 돌볼 수 있는 사랑을 안다는 뜻입니다.



.. 아마모리 씨는 곧장 아파트로 들어가 버렸어. ‘그냥 버릴 수도 없고, 이걸 어쩌지?’ 손에 쥔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어. 내 원피스처럼 노란 종이가 아주 가볍고 튼튼해 보였어. 문득 ‘이걸로 종이비행기나 접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미끄럼틀 계단에 앉아서 그때까지 한 번도 안 만들어 본 모양으로 비행기를 접었어. 종이가 저절로 비행기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어 … 미끄럼틀 터널을 돌아보면서 가쓰지가 이치로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들 아마모리 씨를 알게 된 것 같다고 했지만, 난 아이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 ..  (92∼93, 119쪽)



  서로 사랑하기에 웃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에 웃습니다. 내가 나를 아끼듯이 너를 아낄 수 있으니 사랑입니다. 함께 어깨동무를 하면서 웃을 줄 아는 기쁨을 누리니 사랑입니다.


  바람이 불어 지구별이 푸릅니다. 숲에서 부는 바람이 바다를 적시고,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 숲을 보듬습니다. 나한테서 샘솟은 사랑이 너한테 가고, 너한테서 자라는 사랑이 나한테 옵니다.


  함께 짓는 웃음이란, 함께 짓는 사랑입니다. 함께 짓는 사랑이란, 함께 짓는 삶입니다. 웃음과 사랑과 삶을 함께 짓기에, 우리는 이곳 지구별에서 아름다운 꿈을 꿉니다. 4348.2.5.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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