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1 | 112 | 113 | 1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이제는 테마다 - 곽윤섭 기자가 제안하는 나만의 사진 찍기
곽윤섭 지음 / 동녘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사진을 살리는 길과 사진을 죽이는 길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4] 곽윤섭, 《이제는 테마다》



- 책이름 : 이제는 테마다
- 글·사진 : 곽윤섭
- 펴낸곳 : 동녘 (2010.6.5.)
- 책값 : 13800원


 (1) 사진을 하는 마음


 집살림을 쉰 해나 예순 해나 일흔 해를 해 온 할머니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신이 꾸려 온 삶이 대단한 삶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여자라면 누구나 으레 꾸려야 하는 집살림이기에, 당신 또한 여느 여자와 마찬가지로 집살림 한길만을 걸어야 했다고 느낄 뿐입니다.

 집살림을 놓고 ‘가사노동’이라 일컫기는 하지만, 정작 집살림을 하는 살림꾼한테 돈값을 치르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집식구가 집살림을 할 때에는 ‘거저로 도맡아 해 줄 일’로 여기고, 밖에서 사람을 불러 일을 시킬 때에 비로소 돈값을 치릅니다. 집안에 있으면 벌이를 하나도 안 한다 여기고, 집밖에 있어야 비로소 벌이를 한다고 여깁니다.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은 집안에서 살림을 하던 할머니와 살림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닮았다고 느낍니다.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사진을 수수하고 조촐하게 즐기는 사람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줍잖게 ‘전문 사진작가 흉내’를 내느라 제멋을 잃고 있는 사람이 보이는 한편, ‘다른 어느 누구 흉내를 내지 않고 스스로 제멋을 살리며’ 더없이 싱그럽고 재미나게 사진을 찍는 사람이 보입니다. 제멋을 잃고 있는 사람은 으레 으쓱으쓱거리면서 마치 당신이 언제라도 ‘전문 사진작가’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릴 수 있기라도 하는 듯 뻐기곤 합니다. 제멋을 사랑하며 살리는 사람은 으레 ‘아유, 이런 사진이 뭐가 좋다고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좋아서 찍은 사진인데요.’ 하면서 당신 스스로를 스스럼없이 낮추곤 합니다. 전문 사진작가라고 내세운다든지 전문 사진작가 시늉을 하는 사람들은 당신들이 읽거나 들은 ‘전문 지식’이라 일컫는 이론을 들려줍니다. 스스로 좋아서 사진을 즐기는 사람은 당신들이 겪거나 부대낀 ‘삶’을 웃음이나 눈물을 담아 들려줍니다.

 전문 사진작가라고 해서 사진이 훌륭하란 법이 없습니다. 전문 사진작가이기에 사진이 대단하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여느 사진 즐김이라고 해서 사진이 안 훌륭하란 법이 없습니다. 여느 사진 즐김이이기 때문에 사진이 어설프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가장 크게 돌아볼 대목은 ‘사진하는 마음’이 어떠하느냐입니다. 여기에 ‘사진하는 매무새’가 어떤 모습인가를 돌아봅니다. 다음으로 ‘사진하는 손길’에 어떤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는가를 헤아립니다. 그리고 ‘사진하는 길’이 어느 구비를 거쳤는가를 살핍니다.

 한 사람을 돌아볼 때에 이이가 어떤 일을 해서 돈을 얼마나 벌거나 이름값을 얼마나 높였는가는 하나도 돌아볼 만한 대목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돌아보고자 한다면 이이가 당신 삶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어 즐거이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했느냐를 돌아볼 뿐입니다.

 집살림하는 분들은 집살림을 학교에서 배우지 않습니다. 집살림을 무슨무슨 요리학원이나 문화센터 같은 데에서 익히지 않습니다. 집살림하는 분들은 당신 스스로 집안에서 부대끼고 복닥이면서 차근차근 온몸과 온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집살림하는 분들한테 시어머니이든 친정어머니이든 있을 때에 가장 가까우면서 고마운 스승으로 삼으며 드문드문 하나씩 살가이 맞아들입니다. 그런데 당신 시어머니이든 친정어머니이든 ‘전문 살림꾼’은 아닙니다. 그저 ‘여느 살림꾼’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네 살림꾼들이 일구는 집살림은 살림집 숫자만큼 많습니다. 사람마다 살림하는 모양이 다르고, 사람마다 살림하는 틀이 다릅니다. 집집마다 장맛과 김치맛이 다르다고 하듯, 사람마다 살아가는 얼거리가 달라요. 그러니까, 이렇듯 모두 다른 삶결대로 모두 다른 살림을 꾸려 온 이들이 바로 우리네 살림꾼인 할머니와 어머니라는 소리요, 오늘날까지 가장 막대접이나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고 알뜰히 당신 길을 걸어온 어른이 할머니와 어머니라는 얘기입니다.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 ‘사진하는 아름다움’을 건사하려 한다면, 다른 어느 누가 아닌 집살림하는 할머니가 걷던 길이나 어머니가 걷는 길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손꼽히는 요리강사나 국보급 인간문화재한테서 무언가를 배우거나 익혀야 살림을 잘하겠습니까. 손꼽히는 요리강사한테서도 무언가를 배우고, 국보급 인간문화재한테서도 어떤 이야기를 듣기는 할 테지요.

 그렇지만, 내 삶은 내 가슴으로 내 나름대로 느끼면서 내 결대로 내 길을 걸어가면서 일굴 수 있습니다. 남이 하는 모습을 흉내낸다든지 남을 엿보면서 시늉을 한다고 내 삶을 일굴 수 없습니다. 내 살림은 내 몸과 마음에 맞추어 내 깜냥껏 일구어야 합니다. 곧, 내 사진은 다른 어느 누구한테서 배워서 하는 사진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좋고 나쁨을 느끼며 찍는 사진이어야 합니다. 전문 사진강사한테서 좋은 구도를 배운다든지 괜찮은 빛느낌을 익힌다든지 쓸 만한 사진감(소재나 주제 모두)을 받아들인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내 깜냥껏 반갑고 아쉬움을 헤아리며 담는 사진이어야 합니다. 내 눈을 믿고 내 손을 믿으며 내 사랑과 믿음을 믿으며 즐기는 사진이어야 합니다.

 지난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앞으로 이어질 머나먼 나날까지, 집살림하는 분들이 꾸린 삶자락이란 바깥사람 눈길로 보기에 ‘아무 모양새(주제)’가 없었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집살림하는 당신들처럼 살림을 하는 사람이라든지 집안에서 당신 곁에 머물며 오래오래 함께 살아가는 사람 눈길로 보기에 ‘참 고우며 좋은 모양새(주제)’였다 할 만합니다.

 인천 골목동네에 살 때에 알고 지내던 아주머니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엊그제, 마침 충주에서 인천으로 볼일을 보러 가는 길이었기에, 장례식장에 들렀습니다. 장례식장에서도 마구 뛰고 휘저으며 노는 딸아이를 붙잡느라 정작 돌아가신 분한테 ‘고이 저승길을 걸어가소서’ 하고 비손할 겨를조차 없이 바빴습니다. 고단해 하며 시나브로 잠들 듯한 아이를 안고 잠자리로 가는 길에서야 겨우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에 어떠했는지를 여쭙지 못했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때에도 어디에선가 할머니들은 한 분 두 분 숨을 거두고 있을 텐데, 숨을 거두는 할머니들 궂긴 소식은 신문에든 방송에든 나오지 않습니다. 여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어느 신문이나 방송에서 당신들 삶을 다루겠습니까.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루는 궂긴 소식은 이름난 사람들이나 연예인이나 정치꾼이나 회사 간부나 높은자리 공직자들뿐입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름난 사람들한테서 얻거나 느낄 마음이란 무엇일는지요? 하나같이 양복을 쫙 빼입고 있는 그 이름난 분들 궂긴 소식 사진을 바라보면서 무슨 울렁거림이 있을는지요?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진을 찍는 바로 그때부터 ‘내 사진감(사진 주제)’이 태어났다고 느낍니다. 집에서 식구들 모습을 찍든, 꽃 사진을 찍든, 동네에서 동무나 이웃 사진을 찍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찍든 ‘내 사진감(사진 주제)’을 알뜰살뜰 즐기고 있다고 느낍니다.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동안에 언제나 내 사진감이 하나둘 새록새록 쌓이고 있달까요.

 따로 사진감을 찾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찍는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나 무엇이든 넓고 깊은 숱한 사진감으로 샘솟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 하나만 찍자’고 해야 사진감이 되지 않습니다. 골목고양이 하나만 찍자고 해서 ‘주제가 있는 사진’을 찍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산과 바다만을 찍자고 해서 ‘주제가 서린 사진’을 담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찍는 모든 사진은 ‘주제가 있는 사진’입니다. 다만, 한 가지 틀에서는 다릅니다. 모든 사진에는 저마다 사진감(주제)이 있습니다만, ‘이야기’까지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래저래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에도 이야기를 우겨넣을 수 있기는 할 테지요. 이야기란 우겨넣든 꾸겨넣든 쑤셔넣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셔요. 우겨넣거나 꾸겨넣거나 쑤셔넣은 이야기를 달가이 반길 사람은 얼마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 생각을 하기 앞서, 나 스스로 생각해 보셔요. 우겨넣은 이야기가 즐거웁겠습니까. 꾸겨넣거나 쑤셔넣은 이야기를 나 스스로 오래도록 즐길 수 있겠습니까.

 할머니나 어머니를 만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풀다 보면, 방송 연속극에 나오는 ‘억지로 지어내거나 짜낸 웃음눈물’하고 견줄 수 없이 산뜻하고 너르며 풋풋한 웃음과 눈물이 가득하곤 합니다. 여느 사람들 누구나 이런 느낌이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 누구한테서나 살가우며 재미난 한편으로 고달프고 힘겨운 나날인 까닭에, 여느 사람들 삶이야기야말로 눈물나거나 웃음납니다. 그래도 여느 사람들은 당신들 삶을 이야기하기보다 방송 연속극을 들여다보기 좋아하시는데, 그저 당신들 할머니나 어머니 삶을 찬찬히 들으며 당신들 삶을 책으로 쓰거나 연속극으로 담은 일이 없을 뿐입니다. 당신들이 온몸과 온마음으로 붙잡고 부둥켜안으면서 보내 온 삶에는 늘 ‘주제’와 ‘이야기’가 깃들어 있으나, 당신들부터 이러한 삶에 깃든 주제와 이야기를 내세운 적이 없는 가운데 우리 또한 돌아보거나 살피거나 보듬지 않아 왔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하고 싶은 분들은 굳이 사진을 배울 까닭이 없습니다. 그예 ‘사진하는 마음’을 잘 다스리시면 됩니다. 여기에 ‘사진하는 매무새’를 알차게 돌보면 됩니다. 다음으로 ‘사진하는 손길’을 보살피면서 ‘사진하는 길’을 힘차게 걸어가면 돼요. 이 모든 줄기와 구비는 나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합니다. 다른 이 손을 빌 일이란 없습니다. 홀로 걷다가 벅차면 누군가 도와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남한테 맡겨서는 이룰 수 없는 우리 집 살림이요 내 사진밭입니다. 홀로 걷다가 벅차다 할지라도 바로 이렇게 ‘벅찬 배움’ 때문에 나 스스로 내 사진을 더 튼튼하고 힘차게 갈고닦을 수 있습니다. 벽에 부딪혔을 때에 누군가 등받이를 해 주어 밟고 올라설 수 있습니다만, 이 벽을 내 자그마한 두 주먹으로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이 벽을 멀리 에돌아 갈 수 있는 한편, 내 손으로 사다리 하나 만들어서 벽을 살며시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어찌 되든, 벽 앞에 선 나는 내 깜냥껏 이 벽하고 온몸으로 부대끼면서 내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글쓰기를 할 때에도 똑같고, 그림그리기를 할 때에도 똑같습니다. 노래를 부르거나 지을 때, 춤을 추거나 어떤 공연을 할 때에도 똑같습니다. 남을 따라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남한테서 배워 글쓰기를 할 수 없고 좋은 스승한테서 배운다고 그림그리기를 할 수 없습니다.

 교사나 강사나 스승이나 교수나 전문가라는 분들한테서 몇 가지 자잘한 솜씨는 받아들이거나 물려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글 한 줄에 담는 넋은 내 넋을 담을 노릇입니다. 그림 한 장에 싣는 얼은 내 얼을 실을 노릇입니다. 내 스승 넋을 내 사진에 담아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내 스승 넋은 내 스승이 당신 스스로 찍는 사진에 당신 나름대로 담을 뿐입니다.


 (2) 사진은 억지로 가르칠 수 없는데


 한겨레신문사에서 사진기자 일을 하는 곽윤섭 님이 《이제는 테마다》라는 이름을 붙인 책 하나 내놓습니다.

 사진강좌를 열기도 하고, 사진하는 사람들한테 길잡이말을 찬찬히 일러 주기도 하는 곽윤섭 님입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곽윤섭님한테서 도움을 받은 사진쟁이가 꽤 많지 싶고, 곽윤섭 님이 도와준 사람들 숫자 또한 무척 많지 싶습니다.

 그렇지만 걱정스럽습니다. 사진은 누가 누구한테 가르쳐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누가 누구한테서 배울 수 없으니까요. 곽윤섭 님 사진은 곽윤섭 님 스스로 깨달으면서 찍는 사진입니다. 당신한테 사진을 가르쳐 준 교수님이나 작가님이 있다 할지라도, 곽윤섭 님 당신 사진은 당신 나름대로 깨닫고 깨우쳐야 비로소 이루는 사진입니다. 곽윤섭 님한테서 사진강의를 듣는 분들도 매한가지예요. 사진강의를 듣는 분들은 사진강사한테서 훌륭하거나 알뜰하다 싶은 이야기를 엿듣거나 받아들여야 당신 사진을 훌륭하게 끌어올리거나 일굴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강의를 듣든 안 듣든 당신 스스로 당신 사진길을 당신이 몸소 부대끼면서 깨닫고 깨우쳐야 비로소 당신 사진길을 걸으면서 당신 사진을 훌륭히 끌어올리거나 일굽니다.


.. 사진에 선이 들어 있으면 주목도가 높아집니다. 바닷가나 사막의 모래밭을 떠올려 봅시다 … 이 모래밭 사진을 찍었을 때 담을 수 있는 것은 모래의 질감과 색일 것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찍은 사막 사진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 도시에서 사진을 찍으면 삭막하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숱하게 등장하는 사각형들 때문입니다. 어디서 카메라를 들여다봐도 사각형을 피하기가 힘듭니다. 굳이 사진을 찍지 않고 눈으로만 본다고 해도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  (13, 25쪽)


 곽윤섭 님은 《이제는 테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책이름부터 이렇게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진은 “주제가 있는 사진”입니다. 주제(테마)가 없는 사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사진에는 늘 주제가 있으나 이야기가 꼭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들 사진하는 사람이 ‘이제 막 사진길을 걸으려고 하는 사람’이나 ‘사진길을 걷다가 망설이거나 헤매는 사람’한테 길잡이 노릇을 하자면, “이제는 테마다!” 하고 외칠 노릇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모든 사진에는 주제가 있어요. 그러나 우리 스스로 우리 사진 어디에나 주제가 있음을 못 느끼거나 못 알아채고 있답니다.” 하고 따스한 목소리로 알려주는 가운데 “그런데 말이에요. 우리들이 찍는 모든 사진에는 주제가 있기는 한데, 이야기를 싣지 못할 때에는 영 맛이 없거나 멋이 없답니다.” 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어깨를 토닥이며 딱 한 가지 모자람만 짚으면 됩니다.


.. 모르는 사람을 모델 삼아 찍기가 어렵다면 주변 인물, 즉 가족, 친구, 동료들을 미리 점찍어 둔 공간에 데리고 가서 찍어 봅시다 … 사진은 그림과 달라 비슷한 두 개의 꽃병을 다르게 찍기가 어렵습니다. 사진은 발견이며 선택의 문제입니다. 부지런한 발로 끊임없이 돌아다니면서 어떤 것을 찍을지 보고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비슷한 두 개의 꽃병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생긴 두 개의 꽃병을 찾아다니는 것이 사진입니다 ..  (39, 41쪽)


 이야기가 없으니 맛도 멋도 있을 턱이 없습니다. 이야기가 있으면 흔들린 사진이든 초점이 어긋난 사진이든 좀 어둡거나 밝게 나온 사진이든 재미가 있습니다. 신이 나고 기쁨이 묻어 나기 마련입니다. 놀랍도록 훌륭하다 하는 사진쟁이들이 마련한 사진잔치에 가 보면 으레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이 몇 점씩 끼어 있곤 한데, 당신들은 틀림없이 ‘안 흔들리거나 초점 잘 맞춘’ 사진을 다시금 찍고 새로 더 찍었을 텐데, 사진잔치 자리에서는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을 어김없이 내걸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 흔들리거나 초점 잘 맞춘 사진이든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이든 “주제는 다 같이 있”습니다만, “이야기는 다 같이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안 흔들리거나 초점은 잘 맞았어도 “이야기 하나 제대로 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진은 쓰지 못합니다.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이라 할지라도 “이야기 하나 살뜰히 실어냈기” 때문에 이 사진을 씁니다.

 한 달에 오백만 원을 벌어야 좋은 돈벌이가 아닙니다. 한 달에 사백구십오만 원을 벌어도 좋은 돈벌이요, 사백오십만 원을 벌든 삼백오십만 원을 벌든 이백오십만 원을 벌든 오십만 원을 벌든 좋은 돈벌이입니다. 오로지 돈벌이만 하느라 내 삶을 놓치고 있다면 끔찍한 돈벌이입니다. 벌어들이는 돈 숫자가 낮을지라도 내 삶을 가꿀 겨를이 있는 가운데, 보람찬 돈을 벌어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나한테 좋은 돈벌이입니다.

 우리는 “이제는 주제다”가 아닌 “이제는 이야기다” 하고 외쳐 주어야 합니다. 이제 막 사진길을 걷는 새내기한테든, 오래도록 사진길을 걸은 즐김이한테든, 꼭 한 가지 말마디, “여러분 당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이야기를 그저 있는 그대로 살포시 사진 한 장에 담아 주셔요. 이뿐이랍니다.” 하고 들려주어야 합니다.

 무슨무슨 소재를 시험 삼아 찍어 보라고 일러 주어 보았자 부질없습니다. 이럴 때에는 이런 구도로 찍어 보고 저럴 때에는 저런 느낌을 담아 보라고 해 보았자 덧없습니다. 만듦사진이 부질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야기 하나 없는데 만듦사진이든 스냅사진이든 스트레이트이든 무어이든 해 보았자 “사진이 될” 수 없어요.

 마구 휘갈겨 쓴 글이나 아무렇게나 휘갈기듯 그린 그림이라 할지라도, 글쓴이나 그린이 나름대로 이야기 한 자락 담고 있으면 놀랍도록 눈물나거나 웃음나는 글이나 그림으로 남습니다. 세발이를 받치고 오래도록 기다린 끝에 찰칵 한 장 찍었다고 훌륭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구도와 빛과 그림자를 맞추어 황금분할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멋있는 사진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진조차 될 수 없”습니다.


..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는 아이를 찍을 때 옆에 있는 다른 놀이기구의 테두리를 이용해 찍는 것. 이것도 프레임 속 프레임입니다 … 회화에서는 화가 특유의 터치로 시각에 따라 대상을 표현하는 선이나 면을 일그러지게, 때로는 더 과장되게 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는 다른 사람의 해바라기와 아주 다르게 보입니다. 그러나 셔터를 눌러서 찍는 사진에서는 사진가 임의대로 터치를 바꾸는 것이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  (59, 69쪽)


 우러나오는 사진이 되도록 ‘사진하는 사람’들 누구나 스스로 당신 삶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면서 넉넉히 사랑하고 아끼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는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든 글이나 그림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든, 아니면 여느 교사로서 초중고등학교나 대안학교나 대학교나 뭐 이런저런 배움터에 있든 똑같습니다.

 우리는 지식을 물려줄 수 없어요. 지식이란 책에 적바림해 놓고 ‘한번 읽으셔요’ 하고 내밀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삶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만 물려줍니다. 삶에 서린 눈물을 물려주고, 삶에 깃든 웃음을 남깁니다. 삶을 마주하는 매무새를 잇는 가운데, 삶을 돌아보는 눈길과 손길을 나눕니다.


.. 사진을 찍어서 예쁘게 나올 만한 길들을 찾아봅시다. 우선 한강을 따라가 봅시다. 한강 주변에는 멋진 산책로가 많이 있습니다. 서울의 선유도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만나는 무지개다리는 낮이나 밤이 모두 아름다운 곳입니다 ..  (163쪽)


 사진하는 사람들한테 ‘사진 지식’을 펼쳐 보이는 《이제는 테마다》라는 책 하나라고 느낍니다. ‘사진 지식’이 아닌 ‘사진 삶’을 펼쳐 보였어야 할 곽윤섭 님이 아닌가 싶은데, 이제까지 퍽 오랫동안 전문 사진기자 길을 걸어오셨으나 정작 사람들한테 ‘사진 삶’은 펼쳐 보이지 못하고 책머리부터 책끝까지 온통 ‘사진 지식’만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사진하는 지식을 다루는 책이라면 구태여 《이제는 테마다》 같은 책을 들출 까닭이 없습니다. 아니, 사진하는 지식을 다루는 책은 《이제는 테마다》를 비롯해 그 어떤 책조차 들출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가 들출 사진책이라면 사진하는 삶을 다루는 책이어야 합니다. 사진하는 삶을 ‘사진책을 쓴 사진쟁이’ 스스로 먼저 온몸과 온마음으로 보여주는 가운데, 당신 뒷사람들한테 사진하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우며 멋진가를 깨닫도록 한손을 내미는 책을 들추어야 합니다.

 집살림을 하는 분들은 당신 집안에서 톡톡히 살림꾼입니다. 사진을 하는 분들은 당신 두 다리로 서 있는 어느 곳에서나 톡톡히 ‘사진 살림꾼’일 노릇입니다. 사진을 하는 살림꾼으로 다시 서고, 사진을 하는 살림꾼으로 새로 서며, 사진을 하는 살림꾼으로 튼튼히 설 노릇입니다.


.. 자전거를 테마로 삼으면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주변 어디에서든지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거리, 공원, 광장 등에서 수시로 자전거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전거에 동그란 바퀴가 있다는 것도 사진을 찍는 데 흥미로운 점입니다. 사진 속에 무엇인가를 담을 때는 특이한 소재가 있으면 무조건 도움이 되는데, 자전거의 바퀴는 모양 덕에 풍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동그라미는 명랑하고 원만하며 희망적인 느낌을 줍니다 ..  (191쪽)


 사진을 살리는 길과 사진을 죽이는 길은 종이 한 장과 같습니다. 종이를 앞으로 뒤집으면 사진을 살리고, 종이를 뒤로 뒤집으면 사진을 죽입니다.

 내 눈을 믿고 내 가슴을 사랑하며 내 삶을 좋아하면 사진을 살립니다. 내 눈이 아닌 남 눈에 기대거나 내 가슴이 아닌 다른 이 가슴을 눈치 보듯 살피거나 내 삶이 아닌 딴 사람들 삶에 홀리고 있다면 사진을 죽입니다. 내 사진기가 값싼 녀석이든 비싼 녀석이든, 이 하나를 내 몸통으로 여기며 언제나 고이 아낄 수 있으면 사진을 살립니다. 내 사진기 하나를 아끼기보다 더 값있고 괜찮다는 기계에 자꾸 눈이 멀다 보면 사진을 죽입니다. 척 보기에 눈물나거나 웃음나도록 아름다운 사진을 좋아하는 가운데 나 스스로 내 사진에 아름다움을 담으려고 해야 사진을 살립니다. 남 앞에서 내보이거나 무슨 기록을 만든다거나 어떤 일거리에 따라 찍으려고 하는 사진이라면 저절로 사진을 죽입니다.

 내 두 손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살아가면 사진을 살립니다. 내 두 다리가 단단해지도록 살아가면 사진을 살찌웁니다. 손수 꾸리고 몸소 일구는 삶이라면 사진이 살아납니다. 사진이란 ‘손수’ 하는 일이고, 내가 ‘몸소’ 즐기는 놀이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사진을 막 배우려는’ 분들이나 ‘사진을 오랫동안 했으나 갈팡질팡하는’ 분들이라면 제발 사진강의는 듣지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부디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가려고 용을 쓰지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진을 아름답게 꽃피우는 뿌리는 바로 내 삶에 있으니까요. 사진을 곱게 여미는 잎사귀는 먼나라가 아닌 내 고향마을 어디에나 곱다시 있으니까요. (4343.7.16.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토 저널리즘 - 프로 사진가의 접근
케네스 코브레 지음, 구자호.이기명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사진은 어디에서 어떻게 배우는가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7] 케네스 코브레, 《포토저널리즘 (5판)》



 사진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찍기 또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읽기마저 가르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름난 사진쟁이가 가르칠 수 있는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평론가나 비평가나 지식인이 가르칠 수 있는 사진읽기가 아닙니다.

 스스로 깨우치는 사진입니다. 스스로 익히는 사진찍기입니다. 스스로 깨닫는 사진읽기입니다.

 그러나 사진이든 사진찍기이든 사진읽기이든 대학교를 다닌다든지 사진강좌를 듣는다든지 하면서 배우려고 하는 우리들입니다. 어느 학교에서도 사진이나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를 가르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떠한 강좌나 이론 또한 사진이며 사진찍기이며 사진읽기를 가르칠 수 없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을 곰곰이 살피면, 사진뿐 아니라 사랑 또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지 않습니다. 누구한테 아무개를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 없을 뿐더러 어떻게 해야 사랑이 된다고 알려줄 수 없습니다. 사랑편지를 쓰라느니, 만나면 어디를 가라느니 하고 도움말을 할 수는 있으나, 마음이 맞는 두 짝꿍이 이루는 사랑은 두 사람 스스로 두 사람 깜냥껏 이룰 뿐입니다.

 사랑만 스스로 깜냥껏 이루지 않습니다. 우리들 누구나 ‘어머니 손맛’을 이야기하는데, 어머니들 스스로 어머니 손맛을 이루어지기까지 누구한테서 살림살이 비법을 배운 적이 있겠습니까. 누구나 처음부터 어머니이지 않았고, 누구도 처음부터 어머니 손맛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살아내면서 차츰차츰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 손맛을 익힐 뿐입니다.

 학자가 되는 길이든 교사가 되는 길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논문을 쓰거나 책을 내놓아야 학자가 아닙니다. 대학원을 다녀야 학자로 설 수 있지 않아요. 내 배움길을 스스로 갈고닦으며 살피고 가다듬으며 비로소 학자가 됩니다. 교대를 나와 교사자격증을 땄다고 교사이지 않습니다. 배움터에서 아이들하고 부대끼는 가운데 한 해 두 해 차근차근 교사다움을 익히고 받아들이면서 아주 천천히 교사가 됩니다.

 《포토저널리즘 (5판)》이라고 하는 ‘사진 길잡이책’은 사진과 사진찍기와 사진읽기를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혀’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한테 살짝이나마 사진밭을 맛보도록 이끄는 책입니다. 이 사진책은 ‘전문 사진기자가 되려는 사람한테 도움말을 건네는 책’이라 할 만하지만, 전문 사진기자이든 아마추어이든, 또는 집에서 꽃이나 강아지나 식구들을 찍으며 사진을 즐기든, 사진을 좀더 깊이 헤아리면서 좋아하고자 하는 이들한테 사진말을 나누어 주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진을 좋아하고 싶으면 읽는 책이요, 사진을 배우고 싶을 때에 ‘사진을 배우는 길’이란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를 익히는 책입니다.

 “사진기자들은 제한된 시간 동안 최상의 사진을 얻기 위해 계속 촬영을 한다. 아마추어들은 몇 장의 스냅사진을 찍고 최상의 작품을 기대한다 … 많은 사진기자들이 필름을 다 쓰기 전에 촬영을 멈춘다. 필름을 남겨 두는 이유는 누군가 건물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극적인 상황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28, 33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진기자와 아마추어를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나라밖에서 훌륭하며 알뜰히 사진기자로 뛰는 사람하고 이와 같지 않은 사람을 나누는 잣대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한국땅 사진기자들 가운데 ‘가장 나은 사진을 얻고자 쉬지 않고 찍는’ 사람은 퍽 드물거든요. 한국땅 사진기자는 너무 바쁜 나머지 취재현장에 오래 있지 않을 뿐더러(아예 취재현장에 안 오기 일쑤입니다), 미리 와서 살펴보지 않고, 행사나 사건이 끝난 다음까지 더 남아서 뒷모습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빨리 찍고 떠나는 한국땅 사진기자입니다. 그림 될 만한 모습을 찍으면 어느새 사라지는 한국땅 사진기자입니다.

 예식장 사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진기자는 예식장 사진기사하고 닮았습니다. 주문받은 사진첩 하나에 넣을 사진만 착착 찍을 뿐, 혼인을 치르는 다 다른 짝꿍들한테서 느낄 다 다를 사진을 이루지 않습니다. 예식장에 미리 찾아와 온갖 모습을 두루 찍는다든지, 예식을 치르는 동안 벌어지는 갖가지 모습을 골고루 담는다든지, 예식을 마치고 나서 어우러지는 숱한 모습을 적바림한다든지 하지 않아요.

 이리하여 《포토저널리즘 (5판)》에 나오는 “최고의 렌즈 테크닉과 빛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도, 사진기자는 여전히 세금 인상을 위해 소집된 시의회와 지역구의 학교 수를 줄이기 위해 열린 회의의 차이를 독자를 위해 구별해 줘야 하는 어려움을 가진다(72쪽).” 같은 대목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문 사진기자들일수록 더 사진을 못 찍는다 할 만합니다. 전문 사진기자라 하는 분들이 사진강좌를 곧잘 열곤 하지만, 이런 분들한테서 사진을 배운다고 한다면, 아마추어이든 그저 ‘사진 즐김이’이든, 저마다 사랑하고 아끼며 가슴으로 받아들일 사진하고는 자꾸 멀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어떤 대단한 사진을 찍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사랑할 자리를 찾고 깨닫고 느끼면서 이러한 모습을 꾸밈없이 담으며 좋아해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슨 그럴싸한 사진을 찍어야 할 사람이 아니요, 우리 삶에서 사랑스런 살붙이와 이웃을 살피고 어깨동무하는 가운데 이들 삶자락을 알뜰살뜰 담으며 기뻐해야 할 사람입니다.

 기자들한테만 “만약 촬영 대상이 카메라 앞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포토저널리즘적으로 뛰어난 기술도 내면을 드러내는 포트레이트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124쪽).” 하고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집에서 내 식구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된 우리들이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 아이가 ‘아이 참, 싫다는데 왜 자꾸 찍어요?’ 하며 이맛살을 찌푸린다면 어떤 사진이 나오겠습니까. 꽃이나 나무 사진을 찍는다 할지라도, 꽃이나 나무가 어떠한 터전을 좋아하고 반기는가를 살피지 않고 찍는다면 고운 꽃 사진 하나 나올 수 있겠습니까. 신문기자 사진이든 여느 생활사진이든 사진 한 장에는 가장 깊은 사랑과 가장 너른 믿음과 가장 따순 손길을 담을 노릇입니다.

 마땅한 일이 마땅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우리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가 초중고등학교다운 적이란 없고, 언제나 입시지옥 굴레에서 허덕입니다. 대학교가 대학교다운 날이란 없으며, 늘 대기업 취직을 바라는 싸움터로만 구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 배움터 모습이 언론에 옳고 바르게 나타나는 일이란 몹시 드뭅니다. 진보를 외치든 보수를 말하든, 참다운 우리 터전을 사랑하면서 우리 터전을 보여주는 목소리는 꽤 드뭅니다. “매체로서의 사진은 당연히 우리의 사회를 반영해야 한다. 당연한 소리다. 그러나 불행히도 편집자들은 고의적이거나 은근한 무시를 통해 전체 인구 구성에서 흑인, 게이와 레즈비언, 중남미인, 아시아인, 모든 종족의 여성을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242쪽).”는 대목을 읽으며, 이 땅 진보나 보수가 얼마나 이 땅 너른 사람들 삶을 담아내는가를 살펴봅니다. 좌파가 진보이거나 우파가 보수이지 않습니다. 좌파는 좌파이고 우파는 우파이며, 진보는 진보이고 보수는 보수입니다. 저마다 우리 삶터를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참된 쪽으로 이끌어 갈 물줄기입니다. 어느 쪽이 옳거나 그른 물줄기가 아니에요. 사진이란, 또 사진찍기란, 그리고 사진읽기란 어떻게 해야 옳다고 말할 수 없으며, 어떻게 하면 그르다고 가를 수 없습니다. 참되고 착하며 고운 길을 걷는 가운데 저마다 다 다른 사람들한테서 사랑과 믿음을 길어올리는 몸짓이 사진으로 됩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는 누구나 나 스스로 좋아하며 사랑하는 삶을 찍습니다. 나 스스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을 담습니다. 나 스스로 아끼거나 돌보고픈 터전을 적바림합니다. “사진기자는 사진 콘테스트나 편집자 혹은 동료 사진기자들을 위해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독자들에게 행복한 순간뿐만 아니라 슬픈 순간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기 위해 사진을 촬영한다(385쪽).”는 말마따나, 사진이란 내 모든 삶을 곱다시 담으며 즐기는 문화이며 예술입니다. 삶을 느끼는 문화이며, 삶을 즐기는 예술인 사진입니다. 삶을 느끼는 문화를 어디 다른 데에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삶을 즐기는 예술을 학교를 오래 다닌다거나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녀온다고 깨닫겠습니까. 스스로 익히고 스스로 찾으며 스스로 즐길 사진입니다. 나 스스로 좀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책을 찾아 읽을 뿐이요, 나 스스로 차츰차츰 한결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다면, 내 사진은 아주 저절로 차츰차츰 한결 나은 사진으로 거듭나고 있는 셈입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알차게 일구고 있으면, 내 사진 또한 시나브로 알차게 일구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을 배우려면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진찍기를 제대로 하고 싶으면 스스로 내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사진읽기를 똑바로 받아들이려면 스스로 내 삶을 껴안아야 합니다. 사진 배움길이란 오직 이 하나입니다. (4343.7.14.물.ㅎㄲㅅㄱ)


― 포토저널리즘, 프로 사진가의 접근 (케네스 코브레 씀, 구자호·이기명 옮김,청어람미디어 펴냄,2005.2.20./39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멋대로 사진찍기
김윤기 지음 / 들녘 / 200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진을 찍는 가장 즐거운 멋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6] 김윤기, 《내 멋대로 사진찍기》


 우리 집에 디지털사진기가 두 대가 되었습니다. 형한테서 얻은 돈을 보태어 가까스로 한 대를 장만하여 쓰고 있었는데, 이 디지털사진기는 고작 한 해 반을 썼을 뿐이지만 부속품이 낡고 닳아 사진기값 1/5에 이르는 돈을 치르며 고치고 한 대를 새로 장만합니다. 사진기 수리점에서는 ‘사막에 다녀오셨어요?’ 하고 묻더군요. 오로지 인천골목길하고 헌책방하고 아이 세 가지만을 사진으로 담았으니 참 어이없는 물음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는 퍽 어릴 무렵부터 아빠 사진기를 갖고 놀았습니다. 백일이 지난 뒤부터가 아닌가 싶은데, 아빠가 늘 사진찍기를 하고 있으니, 사진기가 바닥에 놓여 있으면 엉금엉금 기어와서 사진기를 만지작거렸고, 단추를 하나하나 눌러 보면서 ‘설명서 한 번 안 보고’ 사진기 다루는 솜씨를 웬만큼 익혔습니다. 이제 고작 스물석 달짜리 아이인데, 혼자서 제법 씩씩하게 사진기를 들고는 사진을 찍습니다. 찍힌 사진을 들여다본다든지, 사진을 주루룩 넘긴다든지, 옆사람한테 사진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일을 꽤 잘합니다.

 디지털사진기 한 대만 있고, 필름사진기조차 망가져서 못 쓰고 있는 동안에는 아이가 사진기를 갖고 노는 모습을 따로 사진으로 담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이가 사진기를 갖고 노는 모습을 얼마든지 찍을 수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우리 아이가 사진을 찍을 줄 안다고 하면 못미더워 합니다. 저러다 비싼 사진기 떨어뜨려 깨뜨리지 않느냐며 걱정합니다. 아이는 백일 무렵부터 이제까지 아빠 사진기를 한 번도 바닥에 떨어뜨린 적이 없으며, 늘 살몃살몃 다루어 줍니다. 어린 나날부터 어버이 곁에서 사진기를 갖고 놀았으니 스물석 달을 살았으면서 채 돌이 되기 앞서부터 사진을 찍을밖에 없습니다. 어버이가 농사꾼이면 어린 나날부터 호미질 가래질 쟁기질을 옆에서 지켜보며 농사일을 익힐밖에 없고, 어버이가 살림꾼이면 어린 나날부터 밥하기 빨래하기 씻고 닦기 같은 일을 늘 바라보며 익힐밖에 없습니다. 저마다 삶으로 헤아리고 삶으로 배우며 삶으로 스며듭니다.

 태국에서 짐차를 모는 일을 하는 김윤기라는 분은 사진찍기를 무척 즐긴다고 합니다. 어디를 다니든 사진기를 챙긴다고 하는군요. 당신은 스스로 ‘프로’ 아닌 ‘아마추어’라 얘기하고, 프로이든 아마추어이든 사진을 즐기는 사람이면 사진쟁이라고 밝힙니다. 당신은 《내 멋대로 사진찍기》라는 책까지 하나 써 냈습니다. 사진을 말하는 책을 내놓는 사람들은 으레 사진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인데, 사진으로 밥벌이를 하지 않으면서 사진책을 낸 김윤기 님은 머리말에서 “사진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프로가 아마추어를 가르치는 그런 식이었다 … 사람이 다르면 사진도 다르고, 그 방법도 다를 수밖엔 없다. 길을 가르쳐 준다기보다는 어디든지 가고 싶은 대로 자유로이 떠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7∼8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김윤기 님 말마따나 사람이 다르면 삶이 다르고, 삶이 다르기에 사진이 다릅니다. 사진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더 낫거나 모자란 사진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마다 제 삶을 사랑하는 만큼 제 사진을 사랑하기 마련이요, 저마다 제 삶을 좋아하는 만큼 제 사진을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일이나 놀이를 이야기한다면 누구나 손쉽고 따스하며 넉넉한 말씨로 들려줍니다.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일이나 놀이를 다룰 때에는 언제나 살가우며 가슴이 뭉클하고 신나는 보람 하나를 베풀어 줍니다.

 좋은 사진이란 좋은 넋으로 좋은 말을 나누며 좋은 삶을 꾸릴 때에 태어납니다. 누가 좋다고 말하기 앞서 나 스스로 나부터 좋다고 느끼는 사진입니다. 누가 엉성하다고 따지기 앞서 내가 먼저 온몸으로 엉성하다고 느끼며 뉘우치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찍는 멋이란 내 나름대로 내가 사랑하는 삶을 일구는 멋입니다. 사진을 바라보는 맛이란 내 깜냥껏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사귀며 어깨동무하는 맛입니다. 사진찍기는 온통 땀내 나는 삶이요, 사진읽기는 속속들이 살가우며 따스한 삶입니다.

 “완성에 이르지 못한 예술 사진처럼 쓸데없는 사진이 또 있을까? 무엇을 전하려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고, 막연한 느낌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그러나 주로 실패하는, 그런 사진을 찍는 데 필름을 마구 쓰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일까(34쪽)?”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윤기 님은 필름사진을 찍으면서 필름을 알뜰히 아낀다고 밝힙니다. 식구들하고 먹고사는 가운데 사진찍기에 더 많은 돈을 쓸 수 없기도 하지만, 스스로 더 좋아할 만하거나 더욱 사랑할 만한 사진이 나오기까지 더 생각하고 살피며 부대낀 다음 사진기 단추를 누르고 싶답니다. 사진기 단추를 더 많이 눌러 본다고 해서 당신 마음에 더 들거나 당신이나 둘레 사람이 흐뭇하게 여길 만한 사진이 나오지는 않는다고 밝힙니다. “필름을 아껴 쓰는 것,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아마추어의 사진이란 절제 속에서 그 깊이를 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58쪽).” 하고 덧붙이는데, 곰곰이 따지면, 프로 사진쟁이이든 아마추어 사진쟁이이든 ‘나 스스로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어떤 매무새로 어떻게 담으려는가’에 마음을 쏟을 노릇입니다. 사진찍기를 즐길 수 있느냐 없느냐를 크게 헤아려야지, 어떻게 찍든 잘 나오는 사진 하나 얻으면 그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잘 찍은 사진 한 장이란 부질없거든요. 우리한테는 예쁘게 찍은 사진 한 장이란 덧없거든요. 우리한테는 그럴싸하게 찍은 사진 한 장이란 쓸모없거든요.

 잘 찍은 사진 한 장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예쁘게 찍은 사진 한 장을 저잣거리에 내놓고 팔 생각입니까. 그럴싸하게 찍은 사진을 대문에 걸어 놓고 뽐내려 합니까.

 “보이는 그대로의 세상이 더 아름답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사진을 찍으려 애쓴다(83쪽).”는 이야기처럼, 우리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며 받아들이고자 살아갑니다. 이렇게 우리 두 발을 내디딘 이 땅에서 우리 아름다운 삶을 즐기고자 사진을 찍고 일거리를 찾고 놀이감을 즐기며 사랑하는 사람하고 보금자리를 가꿉니다.

 아름다운 삶에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에는 아름다움을 나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윤기 님 책 《내 멋대로 사진찍기》는 김윤기 님이 살아가는 멋이랑 다른 이름난 사진쟁이가 살아가는 멋이랑 똑같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비슷하거나 닮은 구석 하나조차 없는데, 누가 누구한테서 사진을 배우거나 누가 누구 사진 틀거리를 배우거나 할 수 없음을 넌지시 들려줍니다. 사진강좌이든 사진학교이든 모조리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이론이든 사진실기이든 하나같이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들었으면 내 삶을 꾸밈없이 들여다보면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됩니다. 붓을 들었으면 내 삶을 고즈넉히 살피면서 그림 하나 그리면 됩니다. 연필을 들었으면 내 삶을 맑고 밝게 껴안으면서 글 하나 적바림하면 됩니다. 춤과 노래와 몸짓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삶에 어떤 멋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멋이 어디에서 비롯하는가를 느끼며 비로소 문화이든 예술이든 삶 하나로 모두어지며 태어납니다. 사진은 누구나 ‘내 멋대로’ 찍고 ‘내 삶대로’ 좋아하며 즐기는 가운데 아름다움이라는 옷을 입습니다. (4343.7.11.해.ㅎㄲㅅㄱ)


― 내 멋대로 사진찍기 (김윤기 글·사진,들녘 펴냄,2004.2.23./12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진 그리고 삶
최건수 / 시공사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사진찍기와 ‘사진읽기’ 모두 즐길 노릇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3] 최건수, 《사진 그리고 삶》


- 책이름 : 사진 그리고 삶
- 글·엮음 : 최건수
- 펴낸곳 : 시공아트 (1999.3.20.)
- 책값 : 15000원



 (1) 사진을 언제까지 만들고 있는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닌 사진을 ‘만드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납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은 ‘찍는’ 일만으로 모두 담아내어 보여줄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로서는, ‘찍는’ 틀을 벗어던지며 ‘만드는’ 쪽으로 접어들기도 하겠구나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요즈음 만화쟁이와 그림쟁이들은 종이에 대고 펜이나 붓으로 그림을 안 그리곤 합니다. 셈틀을 켜 놓고 셈틀에서 펜마우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만화책이나 그림책에서 ‘종이 그림’을 만나기란 퍽 힘듭니다. 또한, 종이 그림을 그렸다 할지라도 다시 스캔을 뜨느니 뭐를 하느니 하면서 훨씬 번거로울 뿐 아니라, 종이에 그렸던 그림 느낌을 제대로 살리기까지 퍽 많은 손길과 손품과 돈까지 들여야 합니다.

 만화쟁이와 그림쟁이가 셈틀로 그림을 그린다면, 사진쟁이는 필름사진 아닌 디지털사진을 찍는다 할 만합니다. 요즈음은 필름 원판이 아닌 디지털 파일로 일을 하거나 사진을 마련하거나 책을 꾸미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디지털 파일로 사진을 찍어 놓으면 나중 일이 수월합니다. 필름으로 찍은 사진은 따로 현상을 하고 스캐너를 돌리고 빛느낌을 살피고 하면서 손이 많이 가고 오랫동안 눈 빠지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이와 달리 디지털사진은 처음 사진을 찍을 때에 빛느낌을 다 맞추어 놓고 찍으면 됩니다. 셈틀을 켜고 사진 풀그림을 돌려 이래저래 손질할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빨리빨리 온누리’에 걸맞는 문화나 예술이 디지털사진이 아니냐 싶기도 하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사진쟁이들이 필름값 걱정을 덜며 어느 만큼 홀가분하게 즐기는 디지털사진이라 여길 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디지털사진이라고 반드시 홀가분하지는 않습니다. 필름사진은 필름값이 들지만, 디지털사진은 ‘셈틀 저장장치’가 있어야 하거든요. 필름값도 필름값이지만, 디지털사진 파일은 부피가 작지 않기 때문에 이 파일을 건사할 저장장치가 꽤 커야 할 뿐더러, 한 번 모셔 놓은 저장장치가 언제까지나 알뜰히 지켜질 일은 없으니, 더 큰 부피인 저장장치를 틈틈이 따로 마련하여 겹으로 건사해 놓아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 돈이 많이 깨질밖에 없는 사진입니다.


.. 주입식 교육에 의해서 형성된, 사진에 대한 고정된 틀이 몸에 밴 경우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개성을 잃는 경우가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한국 교육과정의 경직성이 개개인의 개성을 묻혀 버리게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 우리가 외국어를 해독할 때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시각 언어의 해독도 역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다른 학문의 영역과는 달리 예술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열린 마음이지요 ..  (14, 18쪽/구본창)


 우리 집식구는 열흘쯤 앞서 인천 골목동네 살림집을 떠나 충주 산골마을 살림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누구들처럼 돈이 있어 집 사고 땅 사고 하며 들어온 시골집은 아닙니다. 돈이며 집이며 땅이며 하나 없는 주제에 비어 있는 집자리 하나 얻어 살림살이를 옮겼습니다. 여러 날에 걸쳐 손바닥만 한 땅뙈기 돌을 고르고 비닐을 걷어내어 밭으로 일구었고, 이 밭에 처음으로 씨앗을 심어 기릅니다.

 이러는 동안 제 사진찍기는 거의 멈추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담아 온 사진은 ‘헌책방’과 ‘인천골목길’인데, 이 두 가지하고 아주 동떨어진 곳에서 시골살림을 꾸리고 있으니까요.

 새 삶터에서는 새 사진감을 찾아 새 사진을 찍어야 할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만큼은 아닐지라도 내 사진감을 놓거나 잊지 않은 채 틈틈이 찾아다니며 내 사진감을 함께 일굴 노릇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시골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좋으며 반가운 사진감을 하나 느껴 붙잡고, 지난날부터 꾸준히 이어온 사진감은 틈나는 대로 차근차근 가다듬으면서 여태껏 나 스스로 걸어온 사진길이 얼마나 고왔거나 좋았거나 올바랐는지를 돌아보아야지 싶습니다.

 그동안 걸어온 사진길은 나 스스로 바라지 않았어도 ‘이 나라 이 땅에서는 자꾸 스러지거나 잊혀지거나 없어지는’ 모습을 담는 길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제 사진감을 저 스스로 즐기고 있으면서도 ‘오늘 찍은 사진을 앞으로 두 번 다시 나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찍을 수 없겠지’ 하고 느꼈습니다. 따로 조바심을 내려 하지 않았으나, 찍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살펴보며 제대로 못 담은 사진이라고 느낄 때에는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과 ‘이렇게 찍으면 어떡하니’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마주할 수 없는 사진감을 왜 자꾸 엉터리로 찍느냐고 스스로 다그치고 나무라면서 지냈습니다.

 시골집 한 구석에서 밭일을 하다가 아이를 보다가 밥을 하다가 파리를 잡다가 빨래를 하다가 등허리를 두들기며 한동안 드러누웠다가 곰곰이 헤아립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는 나날이 길면서도 짧아, 사진찍기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그나마 시골집으로 온 뒤부터는 아이 사진조차 얼마 못 찍어 주고 있다고.


.. 그러나 몇 달 동안은 거의 사진을 찍을 수 없었어요. 밤거리에서 방황하고 술집 종업원들과 사귀면서 이태원 분위기를 몸으로 익혔죠. 그러다가 한 업체와 연결되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비로소 촬영이 시작됐습니다. 한 3년 찍었어요 … 처음 이태원에 들어갔을 때는 부정적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어요. 예를 든다면 서양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짬뽕 문화의 현장, 속 빈 여대생들이 영어라도 한 마디 배워 볼까 배회하는 곳 등. 그러나 몇 년을 이태원에 출입하고, 유흥가 종업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요. 그들도 평범한 인간들이었고, 도리어 기구한 삶들이 많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더 들었어요. 그래서 그들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면서 고발성 사진을 찍기보다는 그들의 삶을 우리들의 삶과 동격으로 놓고 담담히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스트레이트냐 메이킹이냐 하는 문제보다도 사진가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담기 위해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겠지요 ..  (28, 34쪽/김남진)


 한숨을 돌리고 가만히 돌아봅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저부터 얼마 앞서까지 도시에서 도시사람으로서만 지냈습니다. 시골살림을 꾸리면서도 도시사람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 돌아보면, 사진쟁이뿐 아니라 그림쟁이도 매한가지요, 만화쟁이나 여느 글쟁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인이라고 다르지 않으며, 교사나 교수들 모두 도시사람일 뿐입니다. 전문직이라는 의사나 변호사나 정치꾼 모두 도시사람입니다. 사는 곳은 시골일지라도 도시사람다운 살림살이를 꾸리고 있습니다.

 새소리를 듣고 벌레소리와 바람소리를 느끼는 시골에서 조용히 곱씹습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을 하자면 아무래도 도시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을 즐길 사람은 모조리 도시에만 있으니, 사진쟁이 스스로 도시사람이어야 하고 도시 터전에 발맞추며 지내야 하는지 모릅니다. 사진잔치를 해도 도시에서 하고, 사진책이 나와도 도시에서 나오며, 사진을 누군가 사들인다 하여도 도시사람이 사들입니다. 시골에서 이루어지는 사진잔치는 구경할 수 없습니다. 시골사람한테 팔려고 내놓는 사진책을 본 적은 아직 없습니다. 시골사람이 사진 작품을 장만해서 당신 집이나 논가나 밭가에 세우거나 걸어 놓는 모습 또한 아직 못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 삶이란, 아니 오늘 우리 사진쟁이 삶이란 도시에 뿌리내리고 도시에 머물며 도시만 헤아리는 삶이로구나 싶습니다. 도시에서만 주고받을 사진이요 도시에서 태어나는 사진인 가운데 도시에서 자리매기는 사진이로구나 싶습니다. 삶과 넋과 열매 모두 온통 도시에 쏠려 있는 사진문화이고 사진예술입니다.

 산이나 들이나 바다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산사람이나 들사람이나 바다사람 눈높이와 삶결로 사진을 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안승일 님이 이룬 《굴피집》(1997) 하나쯤 있다고 할까요. 시골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지내는 분들이 찍는 시골살림 사진조차 시골사람이나 시골마을을 ‘풍경’으로 바라보고 풍경으로 담습니다. 시골사람이나 시골마을을 ‘삶’으로 껴안으며 ‘사진’으로 빚어내는 모습은 아직 못 보고 있습니다. 산일이든 들일이든 바다일이든, 산과 들과 바다에서 하는 일을 담을 때에도 ‘풍경’에서 헤매거나, 뭔가 다르다면 그나마 ‘기록’이라는 테두리에 머물 뿐, ‘삶’이라는 자리를 찾아나서지 못합니다. 산사람은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헤아리거나, 들사람과 바다사람은 무엇을 어느 곳에서 어떠한 눈썰미로 바라보고 있는지 살피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오늘날 한국땅 사진쟁이들 사진이란 ‘만듦사진’뿐입니다. 일하는 골방에서 만드는 사진이든, 셈틀을 주무르면서 만드는 사진이든, 인화액과 인화지를 만지작거리며 만드는 사진이든 만듦사진입니다. 더욱이, 사진기 단추를 찰칵찰칵 누르며 담는 사진 또한 있는 그대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만드는’ 사진에 머물고 맙니다.

 삶을 느끼지 못하고 풍경만 잡아채니까, 이 또한 ‘스냅’이나 ‘스트레이트’가 아닌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진쟁이 눈높이로 얼개와 이야기를 억지로 만드는’ 사진이 되어 버립니다. 만듦 삶이고 만듦 넋이며 만듦 사진입니다. 




 (2) ‘한국 사진작가’는 누구인가


 사진찍기와 사진비평과 사진전시와 대학교수 일을 다 함께 한다는 최건수 님이 쓰고 엮은 책 《사진 그리고 삶》을 읽습니다. 이 책 《사진 그리고 삶》에는 한국 사진작가 스물다섯 사람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최건수 님이 사진쟁이 스물다섯 사람을 차례차례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통으로 실어 놓고 있습니다.


.. 요사이는 사진을 전공하지 않은 것을 정말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뭐랄까, 학연이나 인맥으로부터 자유가 결국 작업의 자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요즘은 많이 들어요 … 새로운 소재를 찾기보다는 이미 익숙한 소재들을 새롭게 접근하여 사진을 풀어 가는 것입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애정을 가지고 새롭게 바라볼 때 사물은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  (57, 59쪽/민병헌)


 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글쓴이 최건수 님은 틀림없이 ‘한국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들 스물다섯 사람이 어떻게 ‘한국 사진작가’가 될 수 있는가 궁금합니다. 한국에는 사진작가라 하는 사람이 이들 스물다섯밖에 없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사진작가’ 스물다섯 사람을 드는 책을 내놓는다고 할 때에, 이들 스물다섯 사람이 맨 먼저 다루어져야 하는 까닭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최건수 님은 2004년에 《사진 속으로의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한국 사진작가 스물다섯 사람’ 이야기를 내놓습니다. 《사진 그리고 삶》은 판이 끊어졌고, 《사진 속으로의 여행》은 품절되었다고 하는데, 첫 번째 스물다섯 사진쟁이 이야기에서는 “구본창, 김남진, 김장섭, 민병헌, 이상일, 이정진, 이주용, 임양환, 조남붕, 최광호, 최병관, 황경희, 김대수, 김재경, 김석종, 김석중, 박용세, 신경철, 신미혜, 신현숙, 신혜경, 안승환, 정동석, 정주하, 한세준” 님을 다룹니다. 두 번째 스물다섯 사진쟁이 이야기에서는, “강상훈, 강용석, 고명근, 권순평, 김기찬, 김우영, 김정수, 박홍천, 배병우, 성남훈, 양성철, 오상조, 오형근, 우종일, 육명심, 이갑철, 이완교, 임영균, 전흥수, 정창기, 주명덕, 차용부, 한정식, 홍순태, 황규태” 님을 다룹니다.

 사진쟁이 이름을 낱낱이 살펴보면 이들을 두고 ‘한국 사진쟁이’라 일컫는 일이 엉성하거나 잘못이라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모든 사진쟁이를 다룰 수 없고 모든 사진밭을 두루 살필 수 없으며 모든 사진삶을 펼쳐 보일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몇몇 분을 빼놓고는 사진을 만드는 분들입니다. 사진으로 이야기 하나 엮으려고 하는 분들은 몇 사람 다루지 않습니다. 사진 한 장에 사진쟁이 온삶을 실어내는 사람은 쉰 꼭지에 이르는 만나보기 이야기 가운데 몇 되지 않습니다.


.. 대학의 사진과에 입학함과 동시에 정신적으로 이미 예술가가 되어 버리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사진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증거지요 … 결국 내가 찍은 사진이 내가 가지고 있는 자양분으로부터 나오지 못할 때, 한 사람의 올곧은 사진가가 아닌 모방꾼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 또 하나의 원인이라면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자각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쉽게 예술가라는 탈을 뒤집어쓰기 위해서라도 메이킹으로 선회하죠 ..  (73쪽/이상일)


 한국에서 사진을 하고 있으면 누구나 ‘한국 사진작가’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말이나 ‘사진작가’라는 말은 더없이 부질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 책에 실린 사진쟁이들 발자국을 더듬어 보면,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 ‘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분이 꽤 많기 때문입니다.

 사진기를 내려놓고 강단에 섰다 할지라도 사진쟁이는 사진쟁이입니다. 사진을 찍은 손품에 따라 강사도 되고 교수도 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이룬 사진은 다른 이들보다 한결 돋보이거나 빼어나다 여길 수 있습니다. 주류라 하건 비주류라 하건 이들 ‘가르침이 + 찍새’인 분들이 숱한 ‘아마추어’ 사진쟁이들한테 피와 살이 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면 이 책은 값있고 뜻있고 멋있다 할 만합니다.


.. 인상 깊었던 것은 그들(미국에서 손꼽히는 사진쟁이)의 사진 속에 그들의 삶이 스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사진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깊이 있는 사진을 하면서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삶의 즐거움입니다 ..  (106쪽/이주용)


 만듦사진이라고 해서 사진을 모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만듦사진을 한다고 해서 사진하고 동떨어진 길을 걷는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만듦사진이든 삶사진이든 사진을 할 수 있으면 되고, 사진으로 이야기를 엮어서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최건수 님이 만나본 최광호 님 말씀마따나 ‘사진으로 재미있게 살’ 수 있으면 되는 한편, ‘사진으로 이야기를 엮’을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최건수 님 사진책에 실린 쉰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나마 두 갈래 가운데 하나에 드는 분이라 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분들이 돈이나 이름을 바라며 사진을 찍지는 않을 터이나, 거의 모두 만듦사진을 하는 사람만 만나면서 사진하고 삶이 이어지는 고리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는지 잘 모겠습니다.

 만듦사진 또한 똑같이 사진이요, 만듦사진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누구한테나 삶이 있으니 《사진 그리고 삶》이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듦사진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몇몇 ‘찍는 사진’을 하는 사람을 끼워넣는 일은 달가워 보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스물다섯 사람 + 스물다섯 사람을 몽땅 만듦사진을 하는 사람으로 채워서 ‘만듦사진에도 어김없이 삶이 있고 사람이 있으며 이야기가 있다’고 나아가면서 더욱 깊은 사진말을 들려줄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오거나 나라밖으로 사진을 배우러 다녀왔거나 대학교나 대학원에서 사진학을 하거나 사진을 가르치는 이들만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식구들 사진을 찍는 사람 또한 ‘사진을 하는’ 사람입니다. 《윤미네 집》을 일군 전몽각 님 또한 ‘사진을 하는’ 사람입니다. 《골목 안 풍경》을 이룬 김기찬 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사진밭에서는 ‘당신은 아마추어요’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데, 여느 사람들이 복닥거리며 어우러지는 삶을 찍는 사진을 즐기는 사진쟁이가 얼마 없기는 합니다만, 다른 누구도 아닌 사진작가이면서 사진비평가이고 사진전시자인 가운데 대학교수이기까지 한 최건수 님이라 한다면, 당신만 한 자리에서 써 내려갈 《사진 그리고 삶》이란 이러한 높낮이에서 그칠 책이어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참말로 사진은 무엇이며 삶은 또 무엇인가를 파헤치면서 건드리는 책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들한테서 당신들한테 사진과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뿐 아니라 최건수 님 스스로 생각하는 사진과 삶을 또렷이 밝히며 더욱 깊고 너른 이야기를 나누어 《사진 그리고 삶》에 담아야 할 노릇이 아니냐 싶습니다.


.. 미국에서는 사진으로 재미있게 사는 방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사진이 다양한 것은 사진을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 우리 사진은 무엇을 주장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진을 가지고 즐기지도 못합니다. 어정쩡하게 서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곁눈질하면서 사진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 사진의 특성은 이미지 전달이지요. 기계적 특성에 너무 매달리면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 사진은 보편적 아름다움이나 결정적 순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느낀 것을 토해 내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일상 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장비는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진가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죠 ..  (157, 164쪽/최광호)


 아쉬우나마, 숱한 사진쟁이들은 사진하는 마음과 살아가는 마음을 이 도톰한 책에 알뜰히 펼쳐 보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쉽게도 최건수 님은 이 대목에서 더 깊고 그윽한 대목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자기가 느낀 것을 토해 내는” 사진이라 한다면, “무엇을 느끼셔서 무엇을 담았습니까?” 하고 물을 줄 알아야 하고, “느낀 그 무엇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던가요?” 하고 다시금 물을 줄 알아야 하며, “사진으로서 그 무엇을 느끼는 일이란 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고 거듭 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일상 속에 있는 자기가 느낀 것을 보려면 어떻게 살며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 같은 물음을 잇는다든지, 이 물음을 사진쟁이들이 하기 앞서 최건수 님 스스로 “아, 그래요. 사진이란 이러구저러구이며 삶이란 이바구저바구로군요.” 하는 사진말을 길어내야지 싶습니다.


.. 조금 극단적인 예가 되겠습니다만, 일본의 어린 유치원생들은 해를 그릴 때도 모두 빨간색으로 그리도록 교육받지 않습니다. 파란 해를 그린 아이도 있고, 검정 해를 그린 아이들도 있죠. 선생님들은 그 부분을 인정하고 북돋아 주지요. 이렇게 열린 사고로 훈련받은 아이들은 세상과 사물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요 ..  (122쪽/임영환)


 어제 집에서 아이랑 애 엄마랑 영화 〈로빙화〉를 또 한 번 보았습니다. 어제는 “아명, 왜 해를 파랗게 칠하지?” “해가 너무 뜨거우면 아빠가 일하시기 힘드니까요.”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목이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마침 요 며칠 동안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텃밭에서 돌 고르기를 한 탓인지 모릅니다. 해를 발갛게 그릴 수 있으나 노랗게 그릴 수 있고, 또 파랗게 그리거나 까맣게 그릴 수 있습니다. 하얗게 그린다거나 잇빛으로 그릴 수 있겠지요. 푸르게 그리거나 하늘빛에 녹아들도록 그릴 수 있습니다. 어느 때이든 해를 그리는 사람 마음이 깃들어 있다면 제 마음 가는 대로 그릴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오늘 우리 누리에서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 하는 사진이란 무엇인가 새삼스레 곱씹습니다. ‘찍는’ 사진이 되든 ‘만드는’ 사진이 되든, 오늘 이 땅 이 나라 사진쟁이라 하는 분들은 참으로 당신들 나름대로 당신 삶으로 받아들이는 무엇인가를 느끼면서 사진기를 쥐고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사진작품을 선보이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싸해 보이는 사진이나 잘 팔리는 사진이나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에 얽매인 채, 정작 ‘내 사진 즐기기’하고는 그예 멀어지거나 등을 돌리고 있지 않느냐 걱정스럽습니다. 사진을 말하는 글을 쓰거나 책을 엮는 분들을 바라보면서도 이러한 걱정은 이어집니다. 참말 ‘좋은 사진을 좋게 즐기는 마음을 담는 사진읽기’를 펼치고 있으신지, 강단에 선 지식인으로서 ‘말 만들기’를 하고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사진찍기도 즐기는 일이요, 사진읽기도 즐기는 일입니다. 즐길 수 없다면 사진찍기가 아니고 사진읽기가 아닙니다. 아니, 즐기지 못한다면 삶이 아닙니다. 즐기지 못하면서 사진삶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4343.7.8.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끝나지 않은 전쟁
조지 풀러 / 눈빛 / 1996년 6월
평점 :
품절



 한국전쟁을 빛깔사진으로 담은 미군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5] 조지 풀러, 《끝나지 않은 전쟁》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예순 해를 맞이하면서 여러 가지 책과 사진자료가 빛을 봅니다. 이 가운데 지난 5월 10일에 나온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존 리치 사진,서울셀렉션 펴냄,2010)은 무척 돋보이는 사진책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맨 앞자리에 실린 추천글을 쓴 사람은 백선엽 씨입니다. 백선엽 씨 이름 밑에는 ‘대한민국 육군협회 회장’과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고문’이라는 직책이 달려 있습니다. 백선엽 씨가 한국전쟁 때 거두었다는 ‘큰 성과(쥐잡기 작전)’를 헤아린다면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사진책에 추천글을 쓸 만할 수 있으며, 한국전쟁을 기린다는 사업회 고문 자리를 맡을 만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선엽 씨 발자취를 돌아보면 일제강점기에 만주군관학교를 나왔고, 인천에서 당신과 동생 백인엽 씨 이름을 딴 ‘선인재단’을 만들었습니다. 만주군관학교라는 곳은 아무나 들어가는 여느 학교가 아닙니다. 인천에서 선인재단은 어마어마한 사학비리를 저지른 곳일 뿐 아니라 인천이라는 곳이 꼴통이 되도록 권력을 뒤흔들던 곳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일제강점기 발자취라든지 군사독재정권 무렵 사학비리를 저질렀다든지 하는 발자국이란 ‘한국전쟁 공로’에 견주면 아무것 아닐 수 있으며, 눈감을 만한 티끌로 삼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속이 갑갑하고 아찔합니다. 전쟁 때에 나라를 지키겠다고 외치며 두 주먹 불끈 쥐었던 사람이라면 전쟁을 마친 다음에도 나라를 지킬 수 있게끔 맑고 깨끗하며 정갈한 삶을 꾸려야 할 노릇이 아니냐 싶습니다. 전쟁 업적과 친일부역과 사학비리란 한 자리에 한 사람한테 나란히 놓일 만한 보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씁쓸한 추천글이 달린 사진책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을 한 장 한 장 넘깁니다. 추천글은 씁쓸하더라도 책에 담긴 사진이 씁쓸하지 않다면 이 사진책은 훌륭합니다. 아니, 이런저런 추천글하고는 아랑곳하지 않을 책 하나 알맹이입니다. 그런데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에 실린 사진들 또한 그리 달갑지 못합니다. ‘컬러로 보는’이라는 책이름답게 한국전쟁 모습을 빛깔사진으로 담은 드문 자료로 엮은 책이기는 하나, 한국땅에서 일어나 한겨레가 서로 치고박으며 숨을 거두고 괴로워 하던 나날을 읽을 수 없습니다. 또한, 총부리를 마주하며 다투는 가운데에도 여느 사람들은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살림을 여느 매무새로 꾸리고 있던 손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지난 1996년에 나온 작은 사진책 《끝나지 않은 전쟁》을 책꽂이에서 꺼내어 다시 한 번 읽어 봅니다.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이든 《끝나지 않은 전쟁》이든 미군 사진기자가 찍은 빛깔사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책은 한국땅과 한국전쟁과 한겨레붙이를 바라보는 눈매가 사뭇 다릅니다. 아니, 한국땅과 한국전쟁과 한겨레붙이를 바라보는 눈매가 다르다기보다 두 미군 사진기자 삶이 달랐겠지요. 사뭇 다른 삶에 따라 서로 다른 눈매가 되었을 테며, 서로 다른 눈매에 따라 서로 다른 눈썰미로 한국땅에서 한국전쟁을 부대끼고 한겨레붙이를 마주하면서 빛깔사진을 담았을 테지요.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사진책은 책이름 그대로 1950년 무렵이든 1996년 무렵이든, 또 2010년 무렵이든 끝나지 않았을 뿐더러 끝날 수 없어 보이는 싸움터 삶자락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끝나지 않을 싸움터로 보이는 이 자그마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자그마한 사람들은 아기자기하며 앙증맞습니다. 군인들이 쏘아댄 총알과 폭탄 때문에 산과 들은 무너지고 나무는 꺾이고 풀과 꽃은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나 군인 아닌 여느 사람들, 또 군인으로 끌려간 여느 사람들은 빈 들판에 곡식을 심어 일구고 빈 멧부리에 나무가 자라도록 마음을 쏟습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헌 옷가지이든 모포이든 무엇이든 그러모아 바느질을 하여 아이들 옷과 어른들 옷을 마련합니다. 쑥대밭이 된 마을에서 흙과 나무로 집을 다시 세우고, 이런 마을 한켠에서 아이들은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코를 흘리며 골목놀이를 합니다. 널뛰기를 하고 초콜릿을 얻으려고 미군한테 달려듭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작은 사진책을 덮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이 사진책 하나로 엮인 전쟁 사진을 찍은 미군 사진기자 조지 풀러 님은 ‘전쟁과 자본주의 미국 문화와 삶에 진저리를 치면서 넋이 맑고 차분하고 깨끔한 사람과 삶’을 찾아나서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하고. 왜냐하면 《끝나지 않은 전쟁》에 실린 한국땅 여느 한겨레붙이 모습을 보면, 오늘날 한국 사진쟁이가 인도이니 티벳이니 네팔이니 찾아가서 사진으로 담는 ‘거룩하고 수수하며 깨끗하고 착하다는 사람들’ 느낌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사진책에 실린 한국땅 한겨레붙이 모습을 볼라치면 한 마디로 ‘전쟁 난민’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으레 떠올릴 만한 ‘코소보 아이들’이라든지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이라든지 ‘콩고 아이들’과 같은 느낌이 납니다.

 한국전쟁이란 참으로 쓰디쓴 우리 옛 생채기입니다. 죽인 쪽이나 죽은 쪽이나 아프디아픈 자국입니다. 앞으로 마흔 해가 더 지나 한국전쟁 백 해를 맞이한대서 아물 수 없는 슬픔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왜 우리한테 생채기요 아픔이요 슬픔이 될까요. 한국전쟁을 떠올릴 때 곰곰이 살필 대목이란 북침이니 남침이니 전쟁 피해이니 하는 숫자셈이어야 할까요. 몇 백만이 죽거나 얼마나 많은 산과 들이 무너졌거나 얼마나 많은 들짐승이 나란히 숨을 거두었거나 하는 한국전쟁이 아닙니다. 이때 뒤로 남과 북이 서로서로 무기를 더 늘리려고 얼마나 큰돈을 쏟아부었으며 서로서로 독재 틀거리를 지키고자 반공과 반미를 왜 그토록 모질게 외쳤는가 하는 대목 또한 한국전쟁하고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한국전쟁이란 다름아닌 우리 아버지가 죽고 우리 어머니가 죽었으며 우리 누나가 죽는 가운데 우리 동생이 죽은 끔찍한 일입니다. 내 살붙이가 죽고 내 이웃이 죽었으며 내 동무가 죽은 끔찍한 일입니다. 고단하게 죽고 만 용산 철거민 또한 내 이웃이요, 미선이와 효순이 또한 내 동생이며, 한때 정치권력자와 언론들이 폭도로 내몰았던 광주사람 또한 내 살붙이입니다.

 어떤 전쟁이든 우리 삶을 망가뜨릴 뿐 아니라 괴롭히며 짓밟습니다. 어떤 전쟁에서든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여느 사람들은 아프고 힘들며 고단해야 합니다. 어떤 전쟁이든 거룩하다거나 뜻깊다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어떤 전쟁에서든 권력자와 지휘자는 죽지 않으며, 전쟁이 끝났든 전쟁이 없는 동안에든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자면 모든 무기와 군인이 사라져야 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참된 힘이란 무기와 군대가 아닙니다. 나라를 지키는 참다운 힘이란 여느 사람들 따스한 사랑과 땀흘려 일하는 투박한 손에서 샘솟습니다. (4343.6.25.쇠.ㅎㄲㅅㄱ)


- 끝나지 않은 전쟁 (조지 풀러 사진,신광수 엮음,눈빛 펴냄,1996.6.3./1만 원)
(재미있다고 해야 할까 모르겠으나, 사진책 《끝나지 않은 전쟁》을 엮은 신광수 님 또한 백선엽 씨한테서 도움을 받아 사진에 나온 곳이나 그무렵 이야기를 듣고 갈무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지 풀러 - 끝나지 않은 전쟁]에 실린 사진들 





















 

[존 리치 -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에 실린 사진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1 | 112 | 113 | 1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