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집 하기 좋은 자리



  어떤 일을 하기에 참으로 좋은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 자리에 있어야만 어떤 일을 훌륭히 할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바꾸기도 하지만, 사람이 자리를 바꾸기도 하거든요. 우리는 돈 많고 집 넓은 어버이한테서 태어나서 처음부터 그저 넉넉하게 다 누리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돈 없고 집 없는 어버이한테서 태어나 처음부터 갖은 가시밭길을 걸으며 온통 모자란 채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여기지 않을 뿐더러, 더 좋은 길도 없다고 여깁니다. 다만 우리는 어느 쪽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든 우리 이야기를 쓰고 나눌 수 있어요. 갖은 가시밭길을 걸었으면 이 이야기를 글로도 쓰고 둘레에 밝히면서 나처럼 가시밭길을 걷는 뒷사람이나 젊은이를 도울 수 있습니다. 모두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살았으면 이 넉넉한 살림을 곁에 있는 이웃이나 동무하고 나누면서 서로 즐겁게 꿈으로 나아가는 길을 갈 수 있어요. 이리하여 “책집 하기 좋은 자리는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뜸하게 다닌다면 아직 사람이 뜸하게 다닐 뿐입니다. 이제 책이란, 누구나 집이나 일터에서 누리그물로 손쉽게 살 수 있어요. 그러니 목 좋은 곳에 책집을 연다 한들 하나도 안 좋다고 여길 만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책이란, 책집이란, 사람들이 품을 들이고 말미를 들여서 골목이며 시골이며 마을이며 느끼면서 바람을 마시고 볕을 쬐며 비를 우산으로 받으면서 찾아가는 즐거움을 맛보면서 찾아가서 숲을 배우는 터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책이 그저 상품이나 물건이 아닙니다. 이제는 흔한 상품이나 물건마다 “왜 굳이 이 자리에서 이 마을책집을 가꾸는가를 이웃한테 밝혀서, 책 하나를 만나러 먼먼 골목이며 서울이며 시골이며 마을을 돌고 돌아서 찾아오는 맛이랑 멋”을 함께하자는 마음을 속삭일 수 있습니다. 2018.3.15.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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