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탄생하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501
이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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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10


비밀번호한테 지구를 맡긴 사람들은
― 사랑은 탄생하라
 이원 글
 문학과지성사, 2017.8.25. 8000원


  시집 《사랑은 탄생하라》(문학과지성사, 2017)에는 ‘사랑은 탄생하라’라는 이름으로 적은 시가 없습니다. 시집을 덮을 때까지 안 나온 ‘사랑은 탄생하라’인 터라, 책이름으로 된 시가 없네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꼭 책이름으로 된 시가 나와야 하지는 않다고.

  다만 이 시집에는 ‘사람은 탄생하라’라는 시가 있습니다. ‘사람은 탄생하라’를 다시 읽어 보면서 생각합니다. 사람이란, 서로 사랑하면서 삶을 이루는 숨결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사람이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면, 사랑이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하고 이어지리라 느껴요. 사랑이 태어나는 자리나 때를 바란다면, 저절로 사람도 삶도 태어나는 길이 될 테고요.
  

인사한다. 이상한 새 소리를 내서.
인사한다. 꽃잎과 꽃잎 사이의 그늘에 숨어.
인사한다. 작은 나무 아래 그림자가 되어.
인사한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얼굴이 되어.
인사한다. 없는 모자를 벗어 두 손에 들고. (아이에게)

따뜻한 스웨터 한 벌을 짤 수는 없다
끓어오르는 문장이 다르다
멈추어 섰던 마디가 다르다 (사람은 탄생하라)


  해가 저물 즈음 마당에서 참새 소리를 듣습니다. 저물녘에 참새가 아직 깃을 들이지 않는구나 하고 여기는데, 곁님하고 아이들은 저 새소리를 참새가 내는지 다른 새가 내는지 갸웃해 합니다.
  흔히들 참새가 내는 소리를 ‘짹짹’으로 잘못 알곤 하는데, 참새가 더러 ‘짹짹’하고 비슷한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이런 소리는 거의 안 낸다고 느껴요. ‘지째째’나 ‘찌이이째 찌째’나 ‘쪼로로록 쭈룹’ 같은 소리도 내고, 그때그때 달라요.

  짝이 되는 새하고 지붕에 나란히 앉아서 노래하는 소리가 다르고, 감나무에 앉아 감알을 쪼는 소리가 다릅니다. 하늘을 날며 노래하는 소리가 다르고, 직박구리나 까치한테 쫓겨 감나무에서 옆 나무로 옮겨 앉아 서운해하는 소리가 다릅니다. 그렇지만 이 여러 소리를 귀여겨듣지 않으면, 참새가 내는 숱한 소리를 “이상한 새소리”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요.


지구인 수를 셌다
비밀번호에게 집을 맡겼다
개를 껴안고 잠들었다
달걀마다 산란일자를 표시했다 (뜻밖의 지구)


  시골집에 살다가 도시에 사는 이웃이나 살붙이를 만나러 나들이를 가면 때때로 어쩔 줄 모르곤 합니다. 도시에 있는 여느 가게에 갈 적에도 곧잘 어쩔 줄 모르곤 해요. 언제부터인가 아파트를 비롯해서 다세대주택에도 문간에서 비밀번호를 넣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문간에서 문을 열어 달라고 말을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 몰라서 한참 헤매기도 해요.

  이제는 좀 익숙해졌지만, 손잡이가 없는 문을 처음 보았을 적에 무척 놀랐어요. 가게 문간에서 손잡이를 찾느라 허둥거리곤 했습니다. 한참 허둥거리니 길을 지나가던 누군가 또는 가게에서 누군가 나와서 단추를 눌러 주었지요. 단추를 눌러 저절로 여닫는 문을 보고서 이 문이 좋은 문인지 문명이 발돋움한 문인지 살짝 아리송했습니다. 전기가 끊어지면 이 문을 어떻게 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비행기를 타고 와 커다란 사탕을 줄게
노래를 불러봐
검색대를 통과하면 소리가 달라져
크리스마스가 지났어도
산타와 함께 나타날게
찢어지도록 입을 벌려봐
작은 상자 속엔 어린 양이 있고
울지 못하는 양
귀는 뾰족한 양
비밀이 흘러든 양 (검은 그림)


  시집 《사랑은 탄생하라》는 조그맣게 노래하려 합니다. 어느새 사랑이 사라진 듯한 이 지구라는 별에서 사랑이 새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작은 마음을 노래하려 합니다. 비밀번호가 가득하고, 자동문이 가득하며, 검색대가 가득하고, 첨단에 최첨단이 새삼스레 가득한 이곳에, 사람다운 삶이 스러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하려 합니다.

  시집 한 권은 사랑이 태어나기를, 사람이 태어나기를, 삶이 태어나기를, 이러면서 살갑고 사이좋은 숲이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시집을 읽는 저도 사랑을 사람을 삶을 살가우며 사이좋은 숲을 바랍니다. 시골에서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온 사람이 온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곧추 세운 등뼈 아래로
엉덩이를 엉거주춤 유지해야 하는
이 포즈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얼음 조각에서 녹고 있는 북극곰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제가 어릴 적에는 지구별 사람이 삼십억쯤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릴 적에 국민학교에서 지구별에 머잖아 오십억 사람이 되리라는 말을 듣고 “선생님 터무니없어요! 어떻게 오십억이나!” 하고 외친 적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지구별에 칠십억 사람쯤 되지 싶습니다. 남녘만 해도 사천만을 지나 오천만이라는 숫자가 넘어가는 모습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지구별에 사람 숫자는 꾸준하게 느는데 외려 사람들은 ‘외롭다’ 같은 말을 자꾸 읊습니다. 줄지 않고 느는 숫자이건만 오히려 복닥복닥 어우러지는 흐름이 아닌, 서로 동떨어지면서 고단한 길로 가는구나 싶어요.

  엉킨 실타래는 어떻게 풀면 좋을까요. 사랑이 스러지는 듯한 이 지구별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시인 한 사람이 수수께끼를 풀어 줄 수 없겠지만, 시인 한 사람은 조용히 씨앗을 심고 싶습니다. 사랑도 사람도 삶도 부디 이곳에서 새롭게 자라기를, 서로 따스할 수 있기를, 모두 살가운 이웃이 될 수 있기를, 이제 외로움이 아닌 웃음꽃이 될 수 있기를. 2017.11.17.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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