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0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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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11


이 가을에 모두 잘 있다는 한 마디
―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병률 글
 문학과지성사, 2017.9.20. 8000원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살지요
실패하지 않으려 가시가 되지요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죽지요
그리하여 사막은 자꾸 넓어지지요 (사람)


  가을이 깊습니다. 저희 집 뒤꼍에서 크는 감나무는 올해에 감을 제법 많이 맺습니다. 큰아이하고 즐겁게 한 소쿠리를 따서 말랑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려 놓습니다. 말랑감은 말랑할 적에 먹어도 맛나고, 꽁꽁 얼려서 숟가락으로 파먹어도 맛있습니다. 아이들이 배불리 먹고서 남은 말랑감을 얼리면서 겨울을 기다립니다. 언말랑감은 다른 철보다 추운 겨울에 제맛이더군요.

  마을에서 집집마다 감을 따느라 부산합니다. 나락을 베고 털고 말린 뒤에는 으레 감을 따요. 그리고 십일월이 깊으면 유자를 땁니다. 제주에서 겨울에 귤이 잔뜩 나오듯, 남녘 바다를 낀 포근한 고장에서는 찬바람이 싱싱 부는 철에 유자알이 샛노랗게 익어요.


그 사람은 지금 여기 없습니다

충분히 기억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내 목을 조른 사람이거든요

처음부터 나중까지 오래
올 수 있으며
한참을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

지금 여기 없습니다
내게 칼을 들이댄 적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은 여기 없습니다)


  가을에 모두 잘 있습니다. 가랑잎을 떨구는 나무는 곧 앙상한 가지가 되려고 부지런히 잎을 내놓습니다. 겨울에도 잎이 푸른 나무는 새봄에 꽃을 피우려고 곳곳에 꽃망울이며 잎망울을 내놓습니다. 후박나무나 동백나무가 이런 모습이지요.

  들풀도 씨앗을 퍼뜨리려고 바쁘고, 솔(부추)도 새까만 씨앗을 잔뜩 맺으면서 터뜨리려고 합니다. 논둑이나 조용한 멧자락에는 가을 산국이 노랗게 올라오고요. 그리고 사마귀는 알을 낳으려고 마땅한 자리를 찾아나섭니다. 때로는 어느 틈인가 찾아내어 집에까지 들어와서 알을 낳습니다. 마당 한복판에서 가쁜 숨을 내쉬면서 알 낳을 곳을 찾기도 합니다.

  따뜻한 나라를 찾는 새는 벌써 이 고장을 떠난 지 오래입니다. 이 고장에서 겨울을 나는 텃새는 추위를 앞두고 몸을 부풀리려고 나무 열매나 곡식을 찾아 바쁘게 날아다닙니다. 아이들도 이제는 긴소매에 긴바지를 챙겨서 입으며 양말을 꼬박꼬박 신습니다. 바야흐로 새로운 철을 앞두고 모두 새로운 몸짓입니다.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
몰라도 만나는 사람들

만나더라도 만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이 좁디좁은 우주에서 우리는 그리 되었다 (사람의 재료)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집을 지을 것이다
아프리카 마사이 여부족처럼
결혼해서 살 집을 내 손으로 지을 것이다

꽃을 꺾지 않으려는 마음도 마음이지만
꽃을 꺾는 마음도 마음이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여자라면 사랑한다고 자주 말할 것이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신을 매번 염려할 것이다 (정착)


  이병률 님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문학과지성사, 2017)를 읽습니다. 시인 곁에 있는 사람을 그리기도 하고, 시인 곁에 없는 사람을 그리기도 합니다. 시인 곁에 있는 사람을 마주하면서 서로 얼마나 살갑거나 가까운가를 헤아립니다. 시인 곁에 없는 사람을 문득 맞닥뜨리고는 서로 어쭐 줄 몰라서 허둥지둥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시인은 “내가 여자였다면 집을 지을” 생각이라고 하는데, 여자 아닌 남자여도 집을 지으면 되겠지요. 시인은 “내가 여자라면 사랑한다고 자주 말할” 생각이라고 하는데, 여자 아닌 남자여도 늘 사랑한다고 말하며 살면 될 테지요.

  가만히 보면 한국 사회에서 숱한 사내는 보금자리를 짓고 가꾸는 일보다는, 집 바깥을 떠도는 일로 삶을 보내기 일쑤입니다. 왜, 그렇잖아요. 아직도 집일은 거의 모두 가시내가 해요. 아직도 아이는 거의 모두 가시내가 돌봐요. 바깥으로 나도는 사내요, 집에서는 도무지 손에 물도 잘 못 묻히고 도마질이 무엇인지조차 잘 몰라요.

  어쩌면 숱한 한국 사내는 보금자리를 짓거나 가꿀 줄 모를 뿐 아니라,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셈 아닐까 싶어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니 바깥으로만 맴돌고,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니 속에서 우러나오는 따사로운 사랑 한 마디를 노래할 줄 모르지 싶어요.


한 잔만 더 마시면 죽을 수도 있고
그 한 잔으로
어쩌면 잘 살 수도 있겠다 싶어 들어간 어느 포장마차에서
딱 한 잔만 달라고 하였다

한 잔을 비우고 난 뒤 한 병 값을 치르겠다고 하자
주인이 술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당신이 취하기 위해 필요한 건 한 잔이 아니었냐며
주인은 헐거워진 마개로 술병을 닫았다 (미신)


  모든 사내가 사랑을 모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해요. 포장마차에 살짝 들어 소주 한 잔을 거저로 얻어마신 시인인데요, 시인한테 소주 한 잔쯤 아무렇지 않게 그냥 내어줄 줄 아는 가게지기는 틀림없이 사랑을 알겠지요. 밤새 포장마차에서 선 채로 도마질을 하고 술손을 맞이하는 가게지기는 참말로 보금자리를 짓거나 가꾸는 살림살이를 알 테지요.


눈을 뜨고 잠을 잘 수는 없어
창문을 얼어 두고 잠을 잤더니
어느새 나무 이파리 한 장이 들어와 내 옆에서 잠을 잔다 (내가 쓴 것)


  이 가을에 모두 잘 있다는 한 마디를 들려주고 싶은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이지 싶습니다. 바다도 잘 있을 테고, 들도 멧골도 냇물도 잘 있을 테지요. 아픈 바다가 있고, 아픈 들이며 멧골이며 냇물도 있습니다. 부디 가을이 깊고 겨울이 찾아들면, 아픈 골골샅샅으로 소복소복 포근한 눈이 덮이면서 앙금도 생채기도 시름도 씻어낼 수 있기를 빕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나뭇잎 하나 들어와서 잠들면서 노래를 남긴다고 하듯이, 우리 마음자리에 시 한 줄이 가만히 스며들어서 웃음꽃으로 새롭게 피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7.10.27.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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