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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엽수 지대 ㅣ 창비시선 99
김명수 지음 / 창비 / 1991년 11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말 289
우리 곁에 있는 의젓한 바늘잎나무
― 침엽수 지대
김명인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1.11.25.
옛날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배밭을 가꾸던 신명 많은 이웃네들
우라질 것 오늘은 우리 판이다
도가 나오면 꽹과리 치고
개가 나와도 덩실덩실 춤을 추고
소주 한잔에 벌겋게 취해
오늘은 대보름날 저녁이면 달 뜨리라 (윷판)
변한 것은 없었다
국토 2백여 리
의정부에서 동두천까지
동두천에서 전곡까지
얼룩무늬로 위장한 군용트럭이
포장 안된 작전도로로
흙먼지를 일으키고 달려가고
그 길 양편에 호박넝쿨 올라간
시멘트 블록의 시골집들 (흙먼지)
연초록 진달래 이파리에 싸여
이파리를 갉아먹는 노란 풀벌레야
빨간 띠줄은 누가 그었니?
한 사나흘 잎에 붙어 잎을 먹다가
까맣게 말라죽은 노란 풀벌레야
우리는 무심코 한세상을 산단다
하늘은 또 잿빛으로 흐려오누나 (풀벌레)
꿀을 먹을 때 꿀벌들을 보느냐
꿀벌을 볼 때 꽃밭을 보느냐
꽃밭을 볼 때 꽃을 피운 흙을 보느냐
흙을 볼 때 흙에 스몄던 빗방울을 보느냐
빗방울을 볼 때 구름과 하늘을 보느냐
꿀 한방울이 빗방울이 되고 빗방울은 또 하늘이 된다 (꿀을 먹을 때)
그 손가락 하나 잃고
징집을 면한 아버지가
6·25때 목숨을 건지고
논 다섯 마지기 부치며 키운 아들을
오늘 막 버스에 실어 보냈다
그의 아들이 군에 가는 것이다 (斷指)
뺏긴 것 되찾고
억눌린 굴레 벗고
더러운 것 새롭게
목 졸린 건 자유롭게
불의와 독재도
쓰레기와 함께
핵무기도 주둔군도
쓰레기와 함께
철조망도 외세도
쓰레기와 함께
우리들 스스로가
치워 없애야지 (그러나 새해에는)
어릴 적 일을 떠올립니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침엽수·활엽수’라는 이름으로 가르쳤어요. 이때 저는 두 말마디를 도무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한자를 익혀서 ‘침·활’을 알더라도 늘 아리송했습니다.
이러다가 ‘바늘잎나무·넓은잎나무’라는 낱말을 나중에 듣고서 깜짝 놀랐어요. 아니 이렇게 또렷하면서 쉬운 이름이 있는데 왜 어른들은 학교에서 ‘침엽수·활엽수’라는 이름만 가르쳤을까요?
두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이즈음에는 이 대목을 한결 뼛속 깊이 느낍니다. 일곱 살이나 열 살 어린이한테 ‘침엽수·활엽수’ 같은 이름을 말하면 하나도 못 알아듣습니다. 이 이름을 외우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바늘잎나무·넓은잎나무’라고 말하면 바로 알아듣지요.
가만히 보면 아이들은 ‘나무’라고 할 적에 늘 곧장 알아듣지만 ‘수(樹)’라는 한자를 붙이면 못 알아듣습니다. ‘나무’라는 쉬운 말을 놓고 구태여 ‘樹’ 같은 한자를 왜 써야 하는지 아리송할 테지요. 그렇지만 우리 사회 어른들은 어린이 눈높이를 헤아리지 않기 일쑤예요. 아직도 많은 어른들은 그냥 ‘침엽수·활엽수’ 같은 이름을 써요.
1991년에 나온 김명인 님 시집 《침엽수 지대》(창작과비평사)를 새삼스레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시인한테 아이가 있다면, 또 시인이 아이한테 이 나라 나무를 이야기하거나 가르친다면, 틀림없이 ‘바늘잎나무’ 같은 이름을 썼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말을 알뜰히 사랑하기에 쓰는 ‘바늘잎나무’라는 이름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바늘·잎·나무’ 세 낱말을 쉽게 알아요. 이와 달리 ‘침·엽·수’라는 세 한자는 어렵습니다. 낯설고요.
나라에서는 틈틈이 입시제도를 바꿉니다. 한때 연합고사였고, 한때 본고사였으며, 요즈음 수능입니다. 수시입학도 있고 이러저러한 틀도 있는데, 어느 모로 보든 나라에서는 ‘입시’라고 하는 얼거리를 뜯어고치지 않아요. 더 깊고 크게 배우는 대학교가 아니라, 졸업장을 거머쥐어서 돈 잘 버는 일자리를 얻기 좋도록 하는 길로 가기만 해요.
그렇다고 나라 탓만 할 수 없습니다. 시집이나 장가를 가려는 젊은이는 맞은쪽 어버이한테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가’를 밝혀야 합니다. 어른들은 며느리나 사위가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가를 궁금하게 여깁니다. 공공기관에서도 대졸자를 좋아합니다만, 적잖은 개인사업자도 일꾼을 찾을 적에 대졸자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일쑤예요. 더군다나 대학교를 마친 이한테 일삯을 더 주곤 하지요.
다시 말해서 한국 사회를 비롯해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바늘잎나무’라는 쉽고 또렷한 이름을 쓰기 어려운 얼거리입니다. 쉬운 말을 옆에 두고도 버젓이 ‘침엽수’ 같은 말을 전문용어로 삼는 한국 사회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달라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앞으로 달라지려고 애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땅에 아름드리나무가 자라는 아름다운 살림터를 가꿀 수 있을까요? 시집 《침엽수 지대》에 흐르는 이야기는 답답한 굴레에 갇혀서 갑갑한 길을 가기만 하는 어둡고 차디찬 사회를 다룹니다. 이제는 달라지기를 바라면서 시인 스스로 발버둥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늘잎나무를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소나무, 잣나무, 향나무, 전나무, 가문비나무, 노간주나무, 측백나무 …… 같은 이름을 그려 봅니다. 씩씩한 소나무, 살뜰한 잣나무, 향긋한 향나무, 의젓한 전나무 …… 나무마다 한 가지씩 느낌을 붙여 봅니다. 포근하고, 미덥고, 눈부신, 이러면서 언제나 하늘을 닮은 파란 바람을 베풀어 주는 나무를 떠올려 봅니다.
이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오늘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요? 앞으로 이 나라는 어떤 길로 나아갈까요? 오랜 시집 《침엽수 지대》처럼 우리 마음자리를 오래도록 밝히면서 씩씩하고 살뜰하며 의젓하게 북돋우며 곁에 있는 바늘잎나무를 생각하는 하루입니다. 2017.9.2.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