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빨래터에서 읽는 책 2017.6.13.
6월 7일 아침에 마을 어귀를 지나 군내버스를 타고 바깥일을 보러 가면서 빨래터를 바라보니 물이끼가 꽤 많이 끼었다. 내가 바깥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물이끼가 수북하겠구나 싶더라. 닷새 만에 돌아오니 참말 물이끼는 수북했고, 아무도 이 물이끼를 걷어내지 않는다. 마을에는 온통 할매들이니 할매들더러 치우라 할 수 없는 노릇. 볕이 한창 뜨거울 때를 골라서 수세미를 들고 걸어간다. 두 아이는 볕하고 물을 느끼면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싶다. 그러렴. 물어보지 말고 너희 뜻대로 하렴. 나는 맨발로 빨래터 바닥을 구석구석 느끼면서 조금이라도 미끄러운 데가 없도록 문지른다. 아이들이 나한테 묻기 앞서 틀림없이 물놀이를 하리라 여겼다. 바깥일을 마치고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났으나 아직 내 팔뚝이나 어깨는 힘을 되찾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수세미질은 할 만하다. 큰아이 신도 한 켤레 빨래한다. 작은아이 신은 바깥일 나가기 앞서 먼저 빨래해 놓았다. 일을 마치고 숨을 돌린다. 담벼락에 걸터앉아서 《한 줌의 모래》를 읽는다.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를 한국말로 옮겼단다. 나는 이시카와 다쿠보쿠가 남긴 시는 일본말로 된 책으로 모두 건사해 놓았다. 어쩐지 이이 시는 내 마음에 끌려서 아직 일본말을 잘 모르던 때에도 이시카와 다쿠보쿠 이름이 보이면 헌책방에서 모조리 장만해 놓았다. 2017년에 나온 이시카와 다쿠보쿠 번역은 무척 반가우면서, 번역 말씨는 퍽 아쉽다. 학문을 하거나 논문을 쓰듯이 옮기지 말고, 이시카와 다쿠보쿠라는 이가 가슴을 찢으면서 눈물에 젖어 노래를 부르는 그러한 숨결로 눈물노래를 부르듯이 옮기면 좋았을 텐데. 문학을 하는 이만 문학을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제품설명서를 쓰는 사람도, 나처럼 한국말사전을 쓰는 사람도, 또 번역을 하는 사람도, 아이들한테 읽힐 글을 쓰는 사람도, 다 같이 다르면서 같은 문학을 한다고 느낀다. 아무튼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를 한국말로 옮겨 준 일은 얼마나 고마운가. 게다가 한국말 밑에 일본말을 고스란히 붙여 주었으니, 번역이 못마땅하면 내가 일본말사전을 뒤지면서 내 깜냥껏 일본 말결을 헤아리면서 느끼면 된다. 엊그제 서울에서 고흥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에서 《한국 개미》를 읽었는데 미처 다 읽지 못한 터라, 《한 줌의 모래》를 150쪽 남짓 읽은 뒤에는 《한국 개미》를 마저 읽는다. 빨래터 담벼락에 앉아서 《한국 개미》를 읽는데, 우리 마을 개미들이 내 허벅지랑 팔뚝이랑 등이랑 목을 타고 신나게 오르내린다. 아이고, 간지러워라.
(숲노래/최종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