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 - 웃음을 잃지 않고 세상과 싸우는 법
린디 웨스트 지음, 정혜윤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82



‘지나 데이비스’쯤 안 되는 여자는 ‘돼지’니?

―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

 린디 웨스트 글

 정혜윤 옮김

 세종서적 펴냄, 2017.2.21. 15800원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이라고 한답니다. 저는 이런 날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다만 하나는 생각해 보았어요. ‘세계 여성의 날’이 있다고 한다면 세계에서 여성은 아직 날갯짓을 마음껏 펴지 못한다는 뜻이요,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뜻이지 싶어요.


  이와 맞물려 남성 스스로 남성다운 살림을 슬기롭게 짓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여성을 억누르거나 괴롭히는 이는 때때로 여성 스스로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남성이 여성을 억누르거나 괴롭히는 사회 얼거리일 테니까요.



할리우드가 정해 놓은 미의 기준이란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수준인가 하면, 지나 데이비스쯤 되지 않으면 자신을 완전히 쓰레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정도이다. (26쪽)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 나는 내 몸이라는 사실을. 내 몸이 작아진다 해도 그것은 나고, 커진다 해도 그것 역시 나다. 내 안에서 날씬한 여자가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35쪽)



  린디 웨스트 님이 쓴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세종서적,2017)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는 갓난쟁이일 무렵부터 ‘가시내라 하기에는 너무 큰 덩치’로 태어나서 자란 린디 웨스트 님이 겪은 일이 찬찬히 흐릅니다. 다시 말해서 갓난쟁이일 무렵부터 ‘사랑’ 아닌 ‘손가락질’을 받느라 몸을 사리거나 어딘가에 숨느라 바빴던 삶을 낱낱이 드러내는 책입니다.


  한번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여느 아기보다 커다란 사내가 태어나면 사람들은 으레 씩씩하다느니 ‘장군감’이라느니 말합니다. 여느 아기보다 커다란 가시내가 태어나면? 가시내는 커다란 몸집으로 태어나면 안 될까요? 이를테면 키가 2미터가 넘는 가시내가 있고,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이 넘는 가시내가 있어요. 사내도 이와 마찬가지이지요. 키가 크면 그저 키가 클 뿐이고, 몸무게가 많이 나가면 그저 몸무게가 많이 나갈 뿐이에요.


  키 큰 사람이나 키 작은 사람을 놀리거나 괴롭혀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든 적게 나가든 몸무게로 사람을 놀리거나 괴롭혀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유일한 치료법이 굶고 극도로 절제하며 작아지도록 노력하는 일이라고 믿게끔 키워진다면, 또 우리 여성들끼리 서로 비교당하면서 흠잡힉고 … 우리가 줄기차게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퍼부을 수밖에 없도록 그런 압박을 받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세상은 어쩔 수 없이 그런 방향으로만 흘러갈 것이다. (41쪽)


지금까지 줄곧 내가 지녀 왔던 생각이 전부 다 틀린 거라면, 이 모든 게 마법이고, 그냥 ‘스스로가 가치 있는 존재라고 결정하기만’ 하면 실제로 그렇게 되는 건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거라면? 대체 그동안 나는 무엇 때문에 날 미워하는 타인의 손에 그 결정을 송두리째 맡겨버렸던 걸까? (118쪽)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를 쓴 린디 웨스트 님은 어릴 적부터 ‘크고 뚱뚱한 몸집’ 때문에 늘 놀림과 따돌림을 받았다고 밝히는데, 둘레에서 ‘여자를 보는 눈’은, 아니 방송이나 매체에서는 ‘여자는 이쯤 되어야 한다’면서 ‘지나 데이비스는 되어야 한다’고 떠들었다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지나 데이비스쯤 안 되면 린디 웨스트 님 같은 이들뿐 아니라 퍽 날씬하구나 싶은 여성도 살을 빼거나 굶거나 뭔가를 해야 한다는 짐덩이에 짓눌렸다고 합니다. 모든 여성이 똑같은 몸집에 몸매에 얼굴이 되어야 한다는 듯 내모는 사회 얼거리는 대단히 드세다고 해요.


  가만히 사회를 돌아봅니다. 사회뿐 아니라 문화나 예술이나 교육이나 정치에서도 ‘여성 = 긴머리’가 아직도 단단합니다. ‘여성 = 치마’라는 생각도 대단히 굳어요. 요새는 긴머리 사내가 제법 있습니다만, ‘남성 = 짧은머리’여야 한다고 여기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도 꽤 많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는 여성을 그릴 적에 ‘짧은머리에 바지’차림으로 그릴 수 있을까요? 초등학교 교과서는 남성을 그릴 적에 ‘민소매 치마에 긴머리’차림으로 그릴 수 있을까요?


  틀을 깨고, 아니 처음부터 틀을 안 세우고서 자유롭게 남성과 여성을 바라보고, 평등하면서 평화롭게 여성과 남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전 제 몸이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이고 건강하고 유용한지에 대해 누구에게든 애써 정당화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몸은 제 것이니까요. 당신 게 아니고요. (149쪽)


하지만 뚱뚱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 여전히 문화적으로 용인되는 탓에 우리는 해결책을 강하게 요구하지 못한다. (215쪽)


그런 말들은 농담에 불과한 게 아니에요. 그 말들이 세상 속으로 번져 들어가서 우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정당화해 주고 우리로 하여금 더더욱 침묵하게 만듭니다. (264쪽)



  린디 웨스트 님은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 이르도록 ‘뚱뚱한 내 몸’을 감추며 살았다고 합니다. 누가 둘레에서 ‘뚱뚱한 너 때문’에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에서 자리가 좁다고 투덜대면 늘 죄인이 된 마음이 될 뿐이었다고 해요. 뚱뚱한 사람 탓이 아닌 줄, 사회 얼거리가 잘못되거나 뒤틀렸다는 대목을 따져야 하는 줄, 바꿀 것은 ‘뚱뚱한 사람’이 아닌 ‘사회 얼거리’인 줄 제대로 느껴서 말하기가 어려웠다고 해요.


  우리는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승강기나 자동계단은 ‘다리가 멀쩡한 비장애인’이 아닌 ‘장애인 복지와 평등’ 테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승강기나 자동계단은 장애인뿐 아니라 비장애인한테도 크게 도움이 되어요. 뚱뚱한 사람한테 좁다는 비행기 걸상은 안 뚱뚱한 사람한테도 좁기 마련입니다. 버스 걸상도 이와 같지요.


  성평등이란 어느 한쪽 성만 헤아리는 길이 아니라고 느껴요. 성평등이란 내리누르거나 내리눌리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는 자리에서 서로 아끼면서 돌볼 줄 아는 따사로운 삶자리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느껴요. 1908년 3월 8일 미국에서 일어난 커다란 물결은 ‘여성 노동자 권리’만 외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몹시 억눌린 여성 노동자 권리를 밝히려는 목소리는 ‘여성보다 덜 억눌린다고 하더라도, 남성 노동자 권리’를 함께 제대로 지키자는 목소리로 이어집니다. ‘어린이 노동 권리’를 짓밟지 말자는 목소리로도 이어지지요. ‘이주노동자 권리’를 지키자는 목소리로도 이어질 테고요.



“강간이나 당해버려, 돼지야!”가 건설적인 대화로 나아가는 길이라 여기는 이들과 자신들이 동급으로 취급되는 건 자기 홍보에 재앙이 된다는 사실을 유명 코미디언들이 깨달았을 때, 그들의 아첨쟁이 추종자들은 자기네 두목 말을 따르는 것 외의 다른 걸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294쪽)



  미국 사회에는 “강간이나 당해버려, 돼지야!” 같은 우스갯소리를 ‘남성 코미디언’이 방송이나 무대에서 버젓이 읊는다고 합니다. ‘돼지야’ 하고 이죽거리는 말도 몹쓸 말이지만, ‘강간당하라’고 비아냥거리는 말도 대단히 몹쓸 말입니다. 그렇지만 ‘남성 코미디언’은 이 같은 말이 왜 잘못인가를 생각하려 하지 않을 뿐더러, 고치거나 없애려고도 안 했다지요.


  한국 사회에도 이와 비슷한 ‘씹할 년’이나 ‘씨발’이라는 거친 말씨가 있습니다. 이런 말씨를 어른도 아이도 사내도 가시내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습니다. 방송에서는 이 말씨를 ‘식빵’으로 걸러서 쓰기도 한다지만, ‘식빵’으로 바꾼다고 해서 이 말씨에 깃든 끔찍한 성차별이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안 할 수 없을 만큼 사회가 어지럽거나 엉망이라 하더라도, 왜 어지럽거나 엉망인 사회를 나무라거나 탓하는 말이 아닌 ‘여성을 깎아내리는 뜻’이 담긴 말을 써야 할까요? 왜 한국사람은 이런 대목은 생각을 안 할까요? 우리한테 버릇처럼 단단히 박힌 못을 언제쯤 빼낼 수 있을까요?



그 모든 자기반성이 있었음에도 그는, 어째서 한 여자에 대한 분노가 여자들 전체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는지를 묻는 내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남자들은 자기 자신이 미울 때 여자를 그 화풀이의 대상으로 삼는 걸까? (356쪽)



  여성은 어머니이자 할머니이자 누나이자 언니이자 딸이자 동생입니다. 남성은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이자 형이자 오빠이자 아들이자 동생이에요. 여성도 남성도 서로 아름다운 숨결입니다. 여성도 남성도 함께 사랑받고 사랑할 사람입니다.


  딱 하루 ‘세계 여성의 날’에만 여성 권리를 헤아리거나 마음을 쓰는 정책이나 사회가 아니기를 빕니다.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일하고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고 마을이 되며 보금자리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부드럽고 따사로이 흐르는 마음에서 사랑이 태어나고 삶이 자랍니다. 부드럽고 따사로이 헤아리는 마음으로 사회와 나라를 바꿀 수 있습니다. 2017.3.8.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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