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함께 : 신화편 - 상 신과 함께 시리즈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682



빈손으로 활을 당겨 해를 떨군 한겨레 옛이야기

― 신과 함께, 신화편 상

 주호민 글·그림

 애니북스 펴냄, 2012.11.16. 11000원



  젊은 만화가 주호민 님은 우리 신화에 만화라는 옷을 입혀서 새롭게 선보였습니다. 《신과 함께》라는 이름으로 2010년에 ‘저승편’을, 2011년에 ‘이승편’을, 2012년에 ‘신화편’을 마무리지어요


  우리한테도 ‘하느님 이야기(신화)’가 있느냐고 아리송해 할 분이 있을 텐데, 우리한테뿐 아니라 모든 겨레에는 ‘하느님 이야기’가 있어요. 중국에도 일본에도, 태국에도 라오스에도, 브라질에도 멕시코에도 저마다 다른 ‘하느님 이야기’가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그리스나 로마 하느님 이야기만 있지 않습니다. 북유럽이나 아일랜드 하느님 이야기만 있지도 않고요.


  다만 한국에서는 ‘한겨레 하느님 이야기’가 어느 때부터 뚝 끊어졌을 뿐입니다. 정치권력을 거머쥔 쪽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싹 끊어버렸을 뿐이에요. 우리 스스로 이 땅에서 사람이 살아온 뿌리를 잊거나 놓거나 잃은 셈이라고도 할 만해요.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땅과 하늘도 없고 처음과 끝도 없고 선과 악도 없는 혼돈. 어느 날 그 혼돈의 작은 틈을 찢고 거신들이 나타났다. 거신의 돌로 찢은 혼돈은 하늘과 땅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거신이 땅에서 솟아났다. 두 번째 거신은 네 개의 눈에서 불같이 뜨거운 빛과 얼음같이 차가운 빛을 뿜어냈다. 격렬한 싸움 끝에 첫 번째 거신이 두 번째 거신을 제압하고, 그의 눈을 뽑아 하늘에 던지니, 두 개의 해와 두 개의 달이 되었다. 두 번째 거신은 흩어지고 세상에는 오색구름이 피어나 산과 강과 들이 생겨났다. 훗날 사람들은 첫 번째 거신을 가리켜 하늘 문을 지키는 산 ‘도수문장’ 또는 ‘미륵’이라 불렀다. (9∼13쪽)



  《신과 함께》 신화편 상권은 ‘대별소별전’하고 ‘차사전’ 두 가지 이야기를 다룹니다. ‘대별소별전’은 ‘천지왕본풀이(제주도 신화)’에서 따와 새롭게 빚었다고 밝힙니다. 신화편 중권에서는 ‘할락궁이전’하고 ‘성주전’ 두 가지 이야기를 다룹니다. 중권 ‘할락궁이전’은 ‘이공본풀이(제주도 신화)’에서 따와 새롭게 빚었다고 밝혀요.


  만화 이야기 끝에 어느 옛이야기에서 따왔는가 하고 밝히는 대목을 살피노라면, 이 땅에서도 제주도나 함경도나 평안도나 전라도나 강원도나 충청도마다 다 다른 옛이야기가 오랫동안 흘렀지 하고 느낄 만합니다. 이제는 텔레비전과 영화에 밀려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만, 고장마다 오랜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물려주면서 나누었어요. 아스라히 먼 옛날 옛적에 지구가 어떻게 태어나고 사람이 어떻게 생겼으며 들이며 숲이며 바다이며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대목을 한국에서도 한겨레 하느님 이야기로 엿볼 만합니다.



“아버님께선 제압하라고 하셨지 죽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장난해? 내 이마 안 보여? 날 죽이려 했다고!” “우린 이자에게 배울 것이 많아.” (43쪽)


“그렇게 많은 활은 없을 뿐더러 인간들은 아무런 힘이 없다고!” “활은 필요없어. 내가 수명장자를 쐈을 때처럼 쏘는 시늉만 하면 돼.” (99쪽)



  대별왕하고 소별왕 이야기를 보면, 이승 나라에서 임금이 되고픈 동생 소별왕은 형 대별왕을 여러모로 속입니다. 이를 다른 이들 누구나 뻔히 알지만 소별왕 속임수대로 소별왕은 이승 나라 임금이 되어요. 형 대별왕은 으레 동생한테 속아넘어가 줍니다 이럴 뿐 아니라 동생을 돕지요.


  더욱이 대별왕은 동생만 돕지 않습니다. 이승이라는 곳에 사는 여느 사람들을 함께 도와요. 마치 종처럼 큰 권력자한테 눌리거나 부려지는 사람들을 넌지시 일깨웁니다. 두 손에 엄청난 무기가 있어야 하지 않은 줄 깨닫게 해요.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요. 대별왕 소별왕 둘이서 저승하고 이승을 나누어 맡는 임금 노릇을 할 무렵, 이승에는 해랑 달이 둘씩 있었대요. 사람들은 둘씩 있는 해랑 달 때문에 낮이고 밤이고 너무 살기 어려웠대요. 소별왕은 이를 어찌 풀어내지 못하지만 대별왕이 슬기로운 마음을 써서 이를 풀어내지요.


  대별왕은 혼자서 이 일을 풀어내지 않아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끌어내어 이 일을 풀어내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빈손으로 시늉만 할 뿐이지만, 사람들이 다 함께 해랑 달을 바라보면서 ‘빈손 활쏘기’를 하도록 시켜요. ‘마음으로 쏘는 활’로 ‘두 헤와 두 달’ 가운데 하나씩 떨어뜨리도록 하지요. 아주 커다란 활이나 아주 듬직한 활이 아닌 ‘마음으로 쏘는 활’입니다. 겉보기로는 그저 빈손일 뿐이지만, 이 빈손인 채로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면 ‘빈손에 가없이 큰 힘을 내는 활’이 생겨난다고 알려주어요. 이리하여 대별왕은 하늘에 ‘한 해와 한 달’이 있도록 이끌어요.



“이로써 사람들은 자존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의 힘으로 무엇이든 바꿀 수 있다는.” (105쪽)


“도와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느냐?” “이승도 속임수로 차지하고, 폐하와의 약속도 저버리고 수명장자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그게 그렇게 궁금하더냐?” ‘가끔은 바보 같단 말입니다.’ “소별을 도운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도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느냐.” (113쪽)



  대별왕이 사람들을 일깨운 대목을 보며 생각해 봅니다. 온갖 말썽거리를 일으킨 대통령하고 대통령을 둘러싼 권력자를 ‘맨손인 수수한 사람들’이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힘이 오늘날 우리한테 있습니다. 우리는 총칼을 손에 쥐면서 말썽쟁이 대통령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맨손으로 말썽쟁이 대통령을 끌어내립니다. 다만 맨손에 촛불을 하나씩 쥐었을 뿐이에요. 촛불을 굳이 손에 쥐지 않더라도 서로 한마음이 되어 외치기에, 다 같이 한마음이 되어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훌륭한 나라를 바라기에, 이 마음이 너울치면서 가없이 커다란 힘으로 거듭나요.


  민주도 평화도 평등도 이렇게 마음으로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뛰어난 사람이 하나 나타나서 대통령이 되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수수한 우리가 집과 마을에서 먼저 따사로운 마음으로 민주와 평화와 평등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집과 마을에서 다 같이 따사롭게 민주와 평화와 평등을 이루어 내면, 이 힘이 하나하나 모여서 너울치는 아주 가없이 커다란 힘으로 거듭나리라 생각해요.



“근데요, 여기서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살았는데, 우리 땅이 아니에요?” “아니야.” “왜 아니에요?” “나라에서 정했으니까.” “그런 건 누가 정해요?” (170쪽)


“국경을 지키라고 보내 놨더니 오랑캐하고 붙어먹어? 그러고도 네놈이 녹봉을 받아먹는 무관이냐!” “말씀대로 국경을 지키러 왔지, 아이들을 죽이러 오지 않았소.” (210쪽)



  ‘차사전’ 이야기에서는 ‘국경수비’를 맡은 ‘하얀 삵’이 살다가 죽는 모습을 그립니다. 처음에는 차갑게 사람들을 죽이는 군인이던 하얀 삵은 어느 날 북방 국경수비대 일을 하다가 아이들을 만난다고 해요. 이 아이들이 하얀 삵한테 문득 물어요. 왜 이 아이들은 꽤 오랜 옛날부터 그곳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 아버지 모두 칼에 맞아 죽어야 하고, 저희들은 쉴 자리 없이 떠돌면서 목숨만 겨우 지키느냐고. 어른인 하얀 삯은 ‘나랏님이 국경을 그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대꾸할 뿐, 더 할 말이 없어요.


  이러면서 비로소 스스로 생각을 해 보아요. 왜 나랏님이 시키는 대로 ‘군인이 되어 오랑캐라고 하는 이웃나라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짓을 해야 했을까’ 하고요. 국경이란 무엇인지, 나라를 넓힌다고 하는(국토 확장) 일이란 무엇인지, 군인으로서 나랏님이 시키는 대로 이웃나라 사람들을 그저 오랑캐로만 여기며 죽여도 되는가를 참말로 뒤늦게 생각해 보았다고 해요.


  아스라하기에 도무지 언제 지은 옛이야기인지 종잡을 수는 없습니다. 삼천 해도 오천 해도 아닌, 삼만 해도 오만 해도 아닌 옛이야기이지 싶어요. 삼십만 해나 삼배만 해가 되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오래된 옛이야기가 지구별 모든 겨레마다 있어요.


  지구가 태어나고, 사람이 태어나고, 들과 숲이 태어나고, 마을이 태어나고, 바람과 해와 별이 태어나고, 사람들이 서로 아끼며 보살피다가 그만 권력과 전쟁이 태어나는 숱한 살림살이가 옛이야기 한 자락으로 흘러요.


  이 옛이야기는, 또 만화라는 옷을 새로 입은 《신과 함께》에 깃든 ‘오늘이야기’에는 틀림없이 우리가 서로 배울 만한 슬기가 흐른다고 봅니다. 어제를 되새기며 오늘을 돌아볼 적에 모레를 새롭게 맞이할 슬기를 옛이야기에서 얻을 만하지 싶어요. 빈손으로 활을 당겨 해랑 달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온 하늘을 별나라로 바꾸었다는 먼먼 옛사람 자취를 더듬으며 오늘 이곳에서 지을 새로운 이야기를 그립니다. 2017.3.1.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