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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옷을 입은 구름 ㅣ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10
이은봉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6월
평점 :
시를 노래하는 말 278
예순 살 몸뚱이도 얼마든지 ‘꽃몸’
― 걸레옷을 입은 구름
이은봉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3.6.21. 8000원
1953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시인 이은봉 님은 이제 예순 나이를 훌쩍 넘어서 일흔 줄로 달려갑니다. 2013년에 선보인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실천문학사)은 이녁이 예순 줄을 넘어설 즈음 어떤 마음이요 살림인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지난 1980년대 이후, 꽃 피고 지는 오월 / 함부로 노래하지 못했다 /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찬 역사에 들떠 / 꽃이나 나무 따위 들여다보지 못했다 (오월이라고)
한창 젊은 날에는 꽃을 보더라도 꽃을 노래할 수 없었다고 해요. 한창 펄펄 끓던 날에는 꽃이 아닌 피를 볼 수밖에 없었고, 사회와 역사와 정치만 바라보느라 오월에 어떤 오월꽃도 눈에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다가 예순 줄 ‘걸레옷’ 같은 몸이 된 즈음 비로소 꽃을 볼 수 있었다고 해요. 시인이 걸친 ‘몸이라는 옷’은 낡고 쿰쿰하지만, 풀이나 나무는 해마다 오월이면 눈부시도록 싱그러운 꽃을 피우면서 새로운 모습을 새삼스레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주를 흘러 다니며 내 몸의 날씨를 만드는 힘,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녀석은 내 몸의 물관부를 따라 함부로 떠돌며 행패를 부린다 // 때로는 귓속을 가득 메우며 귀뚜라미처럼 울기도 하는 기상대 // 해와 별과의 교신이 다시 연결되고 날씨가 맑아지면 녀석은 잽싸게 태도를 바꾼다 촐랑촐랑 내 몸속의 물관부를 뛰어다니며 까르르 웃는다 (기상대)
어느 모로 본다면 예순이나 일흔이나 여든이라는 나이에 걸치는 ‘몸이라는 옷’은 ‘걸레’일 수 있을까요? 누군가 이렇게 볼 수 있을 테고, 시인 할아버지도 이처럼 여길 수 있을 테지요. 그러나 다르게 예순 줄을 바라본다면 예순이라는 나이는 ‘걸레라는 옷’이기보다는 ‘새롭게 깨어나는 옷’일 수 있습니다. 나이를 먹고 또 먹어도 꽃을 피우는 나무처럼, 사람도 예순이건 일흔이건 여든이건 얼마든지 새롭게 피어나는 ‘꽃몸’이 될 만하다고 느껴요.
밭두둑의 흙은 강아지풀의 집이지요 / 강아지풀은 흙 속에서 살지요 (강아지풀)
손톱을 깎는다 내 안에서 / 자라는 죽음을 깎는다 / 수염을 깎는다 내 속에서 / 자라는 어제를 깎는다 (오늘 치의 죽음)
작은 손길 하나로도 멋스러운 살림을 지을 수 있습니다. 작은 눈길 하나로도 따스한 살림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작은 손길 하나로도 밭을 일굴 수 있습니다. 작은 눈길 하나로도 이웃을 보듬을 수 있습니다.
예순 해를 살아내면서 몸으로 날씨를 읽을 수 있겠지요. 예순 해를 살아내면서 ‘몸에 깃든 숱한 말’을 걸러내어 아이들한테 이쁘장하게 물려줄 수 있겠지요. 예순 해를 살아내면서 마음에 담은 넉넉한 사랑을 젊은 넋한테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홈마트에서 싱싱한 오이 두 개를 샀다 / 하얀 비닐봉지에 돌돌 말아 왔다 / 밥보다 채소를 많이 먹으려고……. // 하나는 그날 곧장 깨물어 먹고 / 나머지 하나는 냉장고에 처넣어두었다 // 처넣어둔 것이 문제였다 / 처넣어두고 잊어버린 것이 문제였다 (오이)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은 그야말로 ‘걸레옷’을 입은 늙은 삶을 찬찬히 보여줍니다. 걸레옷을 입었기에 죽음으로 치달리는 모습을 그린다고 할 수 있고, 아무리 보아도 걸레옷이라 하지만 걸레옷이 아닌 꽃옷으로 바꾸고 싶다는 마음을 그린다고 할 수 있지 싶어요.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좋아해요.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늙건 말건 그리 대수로이 여기지 않아요. 아마 이런 몸짓이랑 눈짓이랑 마음짓인 아이들인 터라,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라고 말할 만하지 싶어요. 예순 고개를 넘어 일흔 고개로 달리는 ‘늙은 시인 할아버지’도 부디 몸이나 나이를 내려놓고서 즐거운 슬기하고 고운 손길을 이 땅에 새롭게 심는 씨앗노래로 가꾸어 볼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2016.12.28.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