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이 왔다 - 다카하시 루미코 단편집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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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57



딱 한 번 지나쳤을 뿐인데 죽을 줄이야

― 거울이 왔다

 다카하시 루미코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6.10.25. 9000원



  내 손바닥에 거울이 생겨서 이 거울로 ‘몹쓸 짓을 하는 사람’이 보이고, 그 몹쓸 짓을 하는 사람 마음속에서 꾸물거리는 ‘몹쓸 벌레’를 끄집어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이리하여 손바닥 거울로 ‘내 둘레에 있는 몹쓸 벌레 몸짓’을 찾아내어 하나하나 끄집어낸 뒤에 나 스스로 지근지근 밟아서 이 벌레를 죽여야 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손바닥 거울을 하루라도 제대로 안 쓸 적에는 그만 목숨을 앗길 수 있다면?


  언제나 꿈나라 생각이 철철 흘러넘치는 이야기를 만화로 빚는 다카하시 루미코 님 단편만화책 《거울이 왔다》(학산문화사,2016)를 읽으면서 ‘손바닥 거울’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단편만화책 《거울이 왔다》에는 손바닥 거울 이야기도 있고, ‘앙갚음하는 돌’ 이야기도 있으며, ‘넋으로 사람 몸에 깃든 고양이’ 이야기도 있으며, ‘나한테만 안 귀여운 꽃’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별은 수많은 얼굴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이 모든 이야기는 짤막하게 끝맺는데, 하나같이 삶하고 죽음이 맞물립니다.



‘7월 27일, 오늘은 중요한 모의고사 날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만, 알았으면서도 그냥 넘기고 말았다. 모의고사만 보고 처리하면 되겠지, 하고. 하지만, 딱 한 번 그냥 지나쳤을 뿐인데, 죽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6∼7쪽)


“네 장례식에 갔었어. 거기서 네 이름과 학교를 알았거든. 7월 27일 모의고사 날, 육교에서 살해당했지?” ‘어, 꿈이 아니었던 말이야?’ “하지만 오늘은 아직 여름방학 전, 이잖아?” “왠지 몰라도 돌아온 것 같아.” “그러니까 시간이 말이야? 죽기 전으로?” (13쪽)



  우리는 다들 바쁘다고 할 만해요. 저마다 무슨 일이든 해야 해서 바빠요. 학생은 학교공부로 바쁘고, 여느 어버이는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느라 바빠요.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바쁘고, 정치인이나 경제인은 이녁대로 바쁘며, 교사도 운동선수도 모조리 바빠요. 이러다 보니 서로 저마다 바쁜 탓에 ‘스스로 즐겁게 할 일’을 놓치기도 하고, ‘함께 마음을 기울일 일’을 내려놓기도 합니다.


  《거울이 왔다》에 실린 첫 이야기 ‘거울이 왔다’는 바로 이 대목을 건드리는구나 싶어요. 고등학생이라 해서 모의고사 때문에 바쁜데, 이 모의고사는 고등학생한테 목숨하고 바꾸어도 될 만큼 크거나 아름답거나 대수로운 일이었을까요? 고등학생일 적에는 모의고사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른 핑계를 대다가, 그만 어느 결엔가 늘 바쁘다는 핑계를 입에 달고 살지는 않을까요?



‘나를 발판삼아 내 불행을 이용해 자리를 꿰찬 카자미란 놈. 이걸로 저주하면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뭘 하는 거지? 남을 질투하고 미워하고, 누군가를 죽여 봤자, 내가 내 일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63쪽)


‘드라마 스태프 여러분, 매니저 사쿠타 씨, 미안해요. 저는 죽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어제, 사람을 죽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살짝 밀었을 뿐인데, 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제 끝났어. 어쩌다 이렇게 돼 버린 걸까.’ (80∼81쪽)



  이웃을 시샘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할까요. 내가 스스로 내 일을 즐겁고 아름답게 잘 한다면, 내가 굳이 이웃을 시샘할 까닭이 있을까요? ‘앙갚음하는 돌’ 이야기는 이 대목을 가만히 짚어 줍니다.


  살짝 밀쳤을 뿐인데 계단 앞에서 밀쳤대요. 한 사람은 가파른 계단 앞에서 살짝 밀쳐졌을 뿐이지만 크게 나뒹굴었대요. 다만 이렇게 굴러떨어진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노릇이에요. 살짝 밀친 사람은 ‘고작 살짝 밀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막상 계단 밑으로 내려가서 ‘나뒹군 사람이 다쳤는지 살았는지’ 살피지 않아요. 계단에서 바로 굴러떨어졌으니 이른바 응급처치라도 할 만하지만, 이마저도 두려움 때문에 못해요. 이러면서 ‘나는 다른 사람을 죽였으니 스스로 죽어야겠다’고 생각해요.



“토라치요. 내가 울면 얹제나, 이렇게 눈물을 닦아 줬지. 토라치요는 여기 살아 있어.” (157쪽)


‘나는 생각했다. 토라치요가 내게 쐰 것은, 나와 미야가 화해할 때까지 지켜보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170쪽)



  두려움이 큰 탓에 아무 일을 못 할 수 있습니다. 미움을 키우는 탓에 아무 일도 못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생채기가 크다고 여기면서 아무 일을 못 할 수 있어요. 하나하나 생각하고 차근차근 돌아본다면 달라질 만하지만, 두려움이나 미움이나 생채기가 앞을 가로막고 말아요.


  만화책 한 권이 우리 삶하고 죽음이랑 얽힌 모든 실타래를 풀지는 않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이 작은 만화책에 실린 자그마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 살림살이나 매무새나 몸짓이나 눈길을 어떻게 다스리는가 하는 대목을 살며시 되돌아보도록 북돋운다고 느껴요.


  안 바쁠 적에는 핑계를 안 대면서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안 바쁠 적에도 어쩌면 자꾸 핑계를 대면서 안 아름다운 일을 하지는 않는가요? 바쁘든 안 바쁘든 마음자리에 꿈을 키우지 않는다면 핑계라고 하는 씨앗이 싹을 트고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면서 어느새 핑계나무가 우거져 버리지는 않을까요? 만화 한 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저 ‘만화책에만 나오는 이야기’ 같지 않습니다. 2016.12.10.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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