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꽃이 불편하다 창비시선 221
박영근 지음 / 창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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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62



대궁밥 먹고 자라며 꽃이 된 시인

― 저 꽃이 불편하다

 박영근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2002.11.15.



  낫을 쥐어 억새를 끊습니다. 큰아이 손에 억새를 한 다발 안깁니다. 나도 억새를 한 다발 안습니다. 가을이 깊으면서 억새는 눈부시도록 하얀 꽃씨를 터뜨립니다. 바람 따라 한들거리는 억새는 부드러우면서 해맑은 빛깔로 고개를 까딱여요.


  억새꽃씨를 쓰다듬고, 억새줄기를 만집니다. 끊은 억새를 들고 논둑길을 걷습니다. 밭자락 한쪽 흙으로 된 거님길에 억새를 곱게 깔아 놓습니다. 요새는 시골에서도 흙길이나 논둑길에 으레 시멘트를 덮지만, 나는 우리 보금자리에 시멘트를 덮고 싶지 않습니다. 애써 낫으로 억새를 끊어서 흙바닥에 깔아 놓습니다. 시멘트를 덮은 길에서는 아이들이 뛰놀다 넘어지면 무릎이나 낯이나 팔꿈치가 쉬 까지는데, 짚을 깔아 놓은 흙바닥에서는 아이들이 뛰놀다 넘어져서 살짝 긁히거나 까질 뿐, 또는 멀쩡하지요.


  가을 억새를 끊어 흙바닥을 덮고서 시집 한 권을 손에 쥡니다. 이제 이 땅에 없고 저 흙에 몸을 맡긴 옛 시인 한 사람을 그려 봅니다. 어느새 흙으로 돌아가서 온누리를 홀가분하게 지켜볼, 또는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풀씨가 되어 온누리를 나긋나긋 바라볼 숨결을 헤아려 봅니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길)


이제 고개를 숙인다 온통 쇼핑몰이 되어 흘러가는 길 / 인파와 소란 속 / 무스탕을 걸치고 웃고 있는 네거리 현대백화점 / 마네킹 앞에서 // 맨주먹의 이력서를 쓰는 마음으로 / 그러나 몇번이고 고쳐써도 지워낼 것은 / 나밖에 없다는 듯이 / 그것을 똑똑히 확인하는 자세로 (고개를 숙인다)



  1958년에 태어난 박영근 님은 1984년에 첫 시집을 선보였고, 2002년에 다섯째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를 선보입니다. 이녁은 2006년에 흙으로 돌아갔고, 2007년에 유고시집이 나옵니다. 첫 시집부터 다섯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또 유고시집에서도, 박영근 님이 노래하는 이야기에는 ‘취업공고판’하고 ‘공장’이라는 말마디가 곧잘 흐릅니다. 그리고 ‘꽃’이라는 말마디가 ‘어머니’하고 ‘나’ 사이에서 가만히 어우러져요.


  전북 부안이라는 시골에서 나고 자란 뒤, 인천이나 서울 같은 도시에서 공장 어귀에서 땀을 흘린 한 사람은 기름때와 땀과 일옷 사이에서 꽃을 그립니다. 어릴 적부터 늘 곁에 있던 꽃을 되새깁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기름밥을 먹던 나날에는 도무지 만날 길이 없던 꽃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 꽃을 문득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으면서 어쩐지 “저 꽃이 불편하다”고 한 마디 내뱉습니다.



그러나 집이 어디 있느냐고 성급하게 묻지 마라 / 길에 제가 가닿을 길을 모르듯이 / 풀씨들이 제가 날아갈 바람 속을 모르듯이 / 아무도 그 집 있는 곳을 가르쳐줄 수 없을 테니까 / 믿어야 할 것은 바람과 / 우리가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침묵 / 그리고 그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 (흰 빛)



  날마다 먹는 밥 한 그릇에 담긴 쌀알은 나락이 맺은 열매입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꽃이 핍니다. 그냥 손쉽게 사다 먹는 쌀이 아니라, 이 땅 저 너른 들에서 자란 나락을 시골지기가 손으로든 기계로든 벤 뒤에 햇볕이나 건조기에 말리기에 비로소 먹을 수 있는 쌀입니다. 꽃이 지고서 맺는 열매인 쌀이요, 그러니까 열매를 먹는다고 할 적에는 꽃을 먹는다는 소리도 되고, 꽃으로 피어나는 씨앗을 먹는다는 소리도 되어요.


  시인 박영근 님은 흙을 짓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기름밥을 먹는 어른으로 살림을 지었습니다. 이른바 ‘노동자 시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녁은 노동자 시인이면서도 이녁이 어릴 적에 언제나 곁에서 누리던 시골집을, 논밭을, 들을, 바다를 멧자락을 되새깁니다. 공장 담벼락만 바라보지 않고, 공장 담벼락 한쪽 귀퉁이에서 조그맣게 고개를 내미는 들꽃을 함께 바라봅니다. 골목에서도, 아파트 꽃밭에서도,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아무리 도시가 커지고 높은 건물이 올라서더라도 어디에선가 반드시 고개를 내미는 들꽃을 으레 바라봅니다.



때로 어떤 시간은 아무것도 떠나보내지 않는다 / 그곳을 떠나서도 내 안에서 / 봄이면 어김없이 판자울타리 개굴창에 개나리꽃들 피어올랐고, / 먼 데서 샛강물이 밤새 흘려보내던 뜨개기 같은 소식들 (문장수업)



  흙으로 돌아간 시인 한 분은 왜 “저 꽃이 불편하다”고 노래해야 했을까요. 그냥 저 꽃하고 함께 흙에 뿌리를 내리면서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굳이 도시에 남아서 도시 노동자로 있기보다는, 이녁이 나고 자란 어린 날 너르고 따사로운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서 흙을 사랑하고 “저 꽃이 사랑스럽다”고 노래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 / 녹슨 철조망에 / 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뜨리다 / 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 흐르는 바람에 / 햇살 속에 (꽃들)



  참으로 많은 시골사람이 도시로 와서 도시사람으로 바뀝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90퍼센트가 훨씬 웃도는 숫자가 도시에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오늘 도시사람이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만 거슬러 올라가도, 또 할아버지나 할머니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모두 ‘시골사람’ 뿌리이기 마련입니다. 몸은 도시에 있되 마음은 아직 시골하고 이어진 삶이라고 할까요. 몸은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에 있어도, 마음은 꽃이나 풀이나 나무 곁에 있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시인 한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 시인 한 사람은, 꽃을 바라보면서 마냥 꽃내음을 누리거나 즐기지 못합니다. 자꾸만 “저 꽃이 불편하다”는 마음이고 맙니다. 이녁 뿌리인 흙을 밟거나 만지지 못하는 삶으로 공장 담벼락에 서서, 이녁 몸통이던 흙을 가꾸거나 일구지 못하는 살림으로 아파트 꽃밭 앞에 서서, “저 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는지 망설이면서 가슴이 아픕니다.



돌아보면 / 옛집 마당가엔 지금인 듯 싸락눈이 붐벼 / 개오동나무는 하얗게 머리를 풀고, / 애비의 대궁밥을 기다리던 소년이 / 애써 고개를 들어 / 아잇적 어머니 얼굴을 더듬는다 // 문득 세월이 잿더미 속에 묻어둔 불씨를 찾아 / 엄동에 샙겨밥을 짓고, / 집강아지 한 마리 / 정짓간 환한 아궁이 불 곁에서 / 잠이 든다 (문득 세월이 잿더미 속에서)



  애비가 물려줄 ‘대궁밥’을 기다리던 앳되고 가녀린 아이를 그려 봅니다. 노동자 시인으로 숨을 거둔 어른이 아닌, 아버지 대궁밥을 침을 꼴깍 삼키면서 말없이 가디리던 그 앳되고 가녀린 아이를 그려 봅니다.


  그 아이네 그 시골 아버지는 이녁 아이가 ‘대궁밥을 기다리는’ 줄, ‘침을 삼키면서 바라는’ 줄 뻔히 알았을 테지요. 그 시골 아버지는 이녁 배가 차지 못하는 밥을 먹으면서도 일부러 ‘밥맛 없다’면서 밥그릇을 물리며 대궁밥을 잔뜩 남겼을 테지요.


  대궁밥을 먹고 자란 가녀린 아이가 이웃을 따사로이 품는 마음을 시 한 줄로 노래하는 씩씩한 일꾼으로 살아냈습니다. 대궁밥을 기다리던 작은 아이가 이웃을 넉넉히 보듬으려는 사랑을 시 한 줄로 빚어내는 고운 숨결로 살아냈습니다.


  입으로는, 글로는 “저 꽃이 불편하다”고 읊었을지라도, 속으로는, 마음으로는, 또 깊게 우러나는 사랑으로는 “저 꽃이 곱다”고 웃음지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꽃이 어머니 같다”라고 웃기도 하고, “저 꽃이 누이 같다”라며 웃기도 하고, “저 꽃이 울 아버지 같다”라며 웃기도 했겠지요. 2016.10.22.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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