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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속의 편지 ㅣ 창비시선 105
강은교 지음 / 창비 / 199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시를 노래하는 말 256
가을볕 같은 시를 읽고, 가을바람 같은 시를 쓰다
― 벽 속의 편지
강은교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2.11.5. 7000원
저는 ‘시 쓰는 공책’을 따로 둡니다. 시를 써서 잡지에 실은 일이 아직 없고, 새봄에 치르는 글잔치에 시를 보내어 뽑힌 적이 없습니다. 제가 시 공책을 따로 두는 까닭은, 우리 집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려는 뜻입니다. 아이들한테 한글을 가르치고, 한글에 담기는 말을 들려주려고 ‘시’를 써요. 아이들하고 주고받는 짧고 쉬우며 재미난 시골살이 이야기를 노래처럼 적다 보니 저절로 시가 된다고 느낍니다.
이를테면 〈시골〉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짧게 노래를 지어 봅니다. “사람도 자동차도 / 거의 없는 시골에서는 / 건널목이나 / 신호등이 / 쓸모없어 // 모든 곳이 / 길이면서 / 마당이면서 / 마을이면서 놀이터인 / 이 시골에서는 / 조용하고 홀가분하지.”처럼 이야기를 지어요.
아이들하고 들마실을 할 적마다 너른 논둑길을 신나게 걸어요.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 군내버스를 빼고 거의 아무런 자동차도 안 지나가니까 너른 논둑길은 참말로 길이면서 마당이에요. 이 가을에 이 논둑길은 깨나 콩을 바심하고서 말리는 마당이 되고, 또 나락을 베어 너는 마당도 되어요.
새벽길 / 어둠이 마악 일어서기 시작할 때 / 어린 고양이 한 마리 / 달려오는 자동차에 나동그라졌네 / 푸들 푸들 / 허공을 긁어대었네 (새벽길)
시를 어렵게 여긴다면 참으로 어려워요. 그러나 시가 우리들 수수한 살림살이에서 저절로 피어나는 조촐한 이야기라고 여긴다면, 여느 어머니나 아버지 누구나 수수한 노래로 지을 만하다고 생각해요.
강은교 님이 쓴 《벽 속의 편지》(창작과비평사,1992)라는 묵은 시집을 읽으면서 이 가을에 시를 새삼스레 헤아려 봅니다. 1945년에 태어난 강은교 님이니 이제는 어엿한 할머니입니다. 할머니 시인이지요. 이녁은 한창 젊던 스물일곱 나이에 아기를 밴 몸으로 그만 뇌출혈로 쓰러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죽음과 삶 사이를 허우적거리듯이 오가면서 몹시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아찔하고 끔찍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해요. 아기랑 함께 죽음 문턱을 넘나들면서 죽음보다 괴로웠을 텐데, 그 죽음 문턱에서 벗어나 삶이라는 자리로 돌아오고 나서 ‘글(시)’을 예전하고는 다르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 텔레비전을 켜면 / 우리 모두 지혜롭네 / 우리 모두 평화롭네 / 공룡이 가리키는 먹이 / 즐겁게 즐겁게 먹으며 / 공룡이 가리키는 벌판 / 평화롭게 평화롭게 걸으며 (공룡)
바람소리 두엇이 달려오기에 / 반갑게 맞이하네 / 바람소리 두엇을 방에 들이려니 / 바람소리 서넛이 따라 들어오네 / 바람소리 서넛을 방에 들이려니 / 바람소리 대여섯이 따라 들어오네 // 끝이 없네 // 너희들 여기 있었구나 / 수천 날 그리 울면서 / 여기. (벽 속의 편지, 바람소리)
아파 보지 않고서는 아픔을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다고 해요. 죽음 문턱을 넘나들어 보지 않고서는 죽음을 알거나 말하기는 어려우리라 느껴요. 어버이로서 ‘아이가 아플’ 적에는 ‘내가 이 아이들 아픔을 도맡아서 앓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마음이 되기 일쑤예요. 아픔이 얼마나 몸을 갉아먹는가를 알기에 아이들한테는 아픔이 없기를 바라지요. 이러면서 아이들 손을 잡거나 이마를 쓸어내리면서 얘기를 걸어요. “얘야, 아픔은 살짝 들렀다가 지나간단다. 네가 더욱 튼튼한 몸으로 거듭나서 신나게 놀라는 뜻으로 살짝 머물다가 떠나지. 다 괜찮아. 푹 자고 난 뒤에, 새로운 몸으로 벌떡 일어나서 신나게 뛰노는 생각을 하렴.”
끙끙 앓는 아이를 달래고 나서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를 땁니다. 아이더러 아픔을 훌훌 털고 일어나서 맛나게 먹으라고 이르다가 문득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노래로 지어 보자는 생각이 듭니다. “가지를 치면 / 무화과알이 더 많이 더 굵게 / 맺힌다는데 // 가지를 고이 두고 / 늘 살뜰히 어루만져도 / 무화과알은 / 달고 굵은 선물을 / 해마다 여름 가을에 / 실컷 / 베푸네.”
이제 오르자 / 그대들의 날개 끝으로 / 이 탁한 공기를 차올려라 / ‘페놀’의 공기를 걸러올려라 / 아, / 죽은 이들이여,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이들이야. (그대들은 새가 되었네, 젊은 죽음들을 위하여)
강은교 님이 1992년 언저리에 쓴 시에 나오는 텔레비전을 돌아봅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 우리 모두 지혜롭네”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켜면 ‘공룡’이 가리키거나 시키거나 보여주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면서 ‘평화롭게’ 살 만하다는 사회 모습을 다룹니다. 사회를 익살스럽게 다루는 시라고 할 만하지요. 이러한 모습은 1990년대뿐 아니라 2010년대에도 그리 안 달라졌다고 여길 수 있어요. 우리 둘레에는 ‘공룡’ 같은 거대자본이나 거대권력이 무시무시하게 있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시 한 줄로 담아내는 셈이에요.
2010년대를 사는 우리들은 ‘4대강 사업’이 남긴 아픈 자국을 맞닥뜨립니다. 지난날에는 새만금과 시화호에서 아픈 자국을 맞닥뜨려야 했고, 또 지난 어느 한때에는 낙동강에 페놀을 몰래 버린 아픈 자국을 맞닥뜨려야 했어요. 강은교 님은 시 한 줄로 페놀 이야기를 씁니다. 1992년을 살던 사람들이 맞닥뜨리던 아픔을 시로 달래면서 다독여요.
그리하여 / 보이게 하소서 // 지금 부는 바람은 / 봄으로 가는 바람이니 / 지금 반짝이는 별은 / 홀로 하늘을 끌고 가고 있으니 // 보이게 하소서 / 어둠 속의 / 속의 빛 / 차가운 눈이 품고 있는 저 탄생들 // 끝내는 흐르게 하소서 / 처음과 끝이 하나 되어 / 흐르게 하소서 / 일어서 / 흐르게 하소서. (지금 어두운 것들은)
시골 멧자락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이오덕 님은 지난날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어린이가 입으로 읊는 말은 언제나 모두 시가 되고, 어린이가 제 삶을 꾸밈없이 글로 적을 수 있으면 이 글은 늘 시가 된다는 이야기예요.
이런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긴다면 ‘어른도 모두 어린이로 자라며 뛰놀던 나날’이 있던 만큼, “어른도 모두 시인이다” 하고 말할 만하다고 느껴요. 어린이다운 마음을 잊거나 잃지 않고 즐겁게 살림을 짓는 어른이라면 어른도 모두 시인이 되리라 생각해요.
시쓰기란 우리 살림살이를 수수하게 쓰는 일이 될 수 있어요. 시쓰기란 어버이나 어른이 아이들한테 물려주거나 이어주거나 가르치고 싶은 즐거운 살림노래가 될 수 있어요. 시쓰기란 우리가 겪거나 바라보는 슬프거나 아프거나 괴로운 이야기를 달래는 손길이 될 수 있어요. 시쓰기를 하면서 우리 삶하고 살림을 새롭게 헤아릴 수 있고, 시쓰기를 하는 동안 우리가 늘 쓰는 말을 새삼스레 사랑할 수 있어요.
강은교 님 작은 시집 《벽 속의 편지》에 흐르는 바람을 그려 봅니다. “봄으로 가는 바람”을 그리고, 이 봄으로 가는 바람이 간질이는 “반짝이는 별”을 그립니다. “처음과 끝이 하나 되어” 흐르게 해 달라는 비손을 담은 봄으로 가는 바람은 어떤 기운이라고 할 만할까요.
나, 그이를 기다립니다. / 바람 속에서 바람의 범벅이 되며 / 어둠 속에서 어둠의 범벅이 되며 (벽 속의 편지, 언덕)
힘을 빼야 하네 / 어깨에서 어깨힘을 / 발목에서 발목힘을 / 그런 다음 / 헐거워진 그대 온몸 / 곧게곧게 펴야 하네 (물에 뜨는 법)
묵은 시집이든 갓 나온 시집이든 삶을 밝히는 이야기가 흐르면서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이름난 분이 쓴 시이든 우리가 스스로 써서 아이들이나 이웃하고 도란도란 나누려고 쓰는 시이든 모두 즐겁다고 느낍니다.
가을에 시집을 읽어요. 그리고 가을에 시를 써요. 가을에 스스로 노래를 불러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홀가분하게 노래로 불러요. 나락이 익게 하는 가을볕 같은 시를 읽고, 바심한 콩과 깨를 말리는 바람 같은 시를 써요. 2016.9.22.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