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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라이트 밀스 - 실천적 지식인과 사회학적 상상력
데니얼 기어리 지음, 정연복 옮김 / 삼천리 / 2016년 8월
평점 :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68
빵을 손수 굽지 않는다고 동무를 나무란 사회학자
― C. 라이트 밀스
대니얼 기어리 글
정연복 옮김
삼천리 펴냄, 2016.8.28. 28000원
찰스 라이트 밀스, 또는 C. 라이트 밀스(1916∼1962)로 알려진 미국사람이 쓴 책으로 《들어라 양키들아》나 《제3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나 《사회학적 상상력》이나 《파워 엘리트》나 《화이트칼라》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한국에 나왔습니다. 《C. 라이트 밀스》(삼천리,2016)라는 책은 바로 이 사회학자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을 이녁이 남긴 글하고 책으로 돌아보면서 ‘왜 미국에서 사회학인가?’를 묻고, ‘지식인 한 사람이 글쓰기와 강연 말고 무엇으로 사회를 바꾸는 밑힘이 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밀스는) 오토바이를 직접 고쳤고, 자기가 살아온 집 가운데 두 채를 함께 지었으며, 자신이 먹을 빵을 스스로 굽지 않는다고 친구들을 몹시 나무랐다. (11쪽)
밀스가 보기에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사고 과정이라는 개념이 자신들이 처한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 나온다는 점, 그리고 어디에나 다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더욱이 생각이 사회 현실을 반영한다는 일반적 진술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실용주의자들은 특정 개인의 사고가 어떻게 특정한 사회구조 속에서 일어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지침을 제공하지 못했다. (44쪽)
사회학자는 사회를 읽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회를 읽기만 한대서 사회학자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사회를 읽으면서 이 사회가 나아갈 길을 새롭게 밝히는 슬기를 품거나 가꿀 때에 비로소 사회학자이지 싶습니다. 사회학 논문을 내거나 책을 쓰기에 사회학자가 아닐 테지요. 사회비평을 할 줄 알기에 사회학자가 아닐 테고요.
오늘날 사회가 어떤 모습인가를 읽고, 지난날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헤아리며, 앞으로 맞이할 사회는 어떤 모습일 때에 다 같이 아름다운 삶터를 이룰 수 있는가를 내다볼 때에 비로소 사회학자이지 싶습니다. 지식이 있기에 지식인이 아니라, 지식을 다룰 수 있기에 지식인이며, 지식을 새로 짓고 나누면서 이 지식으로 삶을 꿈꾸는 숨결이어야 비로소 지식인이라고 할까요.
밀스의 전쟁 반대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과 이후 미국 사회를 특징짓게 만들 중요한 경향들을 직시하게끔 했다. 이를테면 행정부 안에서의 정치권력 집중, 대기업과 연방정부의 협력, 미국의 군사주의화가 그러했다. (110쪽)
밀스가 보기에 지식인들은 남의 의지에 따라 뭔가 결정되는 ‘캐치-22’에 직면해 있었다. 통치 제도 안에서 권력의 자리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비판적 독립성과 그 결과 진리에 도달하는 길, 다시 말해 스스로 진정한 지식인으로 존재하는 길을 잃고 말 것이다. (120∼121쪽)
밀스라는 분은 집을 손수 지었다고 합니다. 밀스라는 분은 스스로 먹는 밥(빵)을 손수 구웠다고 합니다. 이밖에 또 무엇을 손수 했을까요? 아쉽게도 《C. 라이트 밀스》라는 책에서는 이 대목을 더 다루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밀스라는 분이 쓴 글하고 책에서 사회학이 삶을 살리는 실마리를 찾으려 합니다. 밀스라는 분이 손수 지은 삶이나 살림에서는 따로 사회학을 이루는 바탕을 찾지는 않아요.
책 첫머리에 짤막하게 나온 대목이지만, 이 책 《C. 라이트 밀스》를 읽으면서 이 대목을 퍽 눈여겨보아야겠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남자 사회학자’나 ‘남자 지식인’은 집안일이나 집살림을 어떻게 하는가 하고 맞대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깥일이 바쁜 나머지 집안일이나 집살림에는 데면데면하다면, 집 바깥에서 외치는 목소리에 얼마나 깊거나 큰 힘이 실릴 만할까 궁금해요. 평화도 평등도 민주도 언제나 여느 집살림에서 비롯해서 사회로 뻗을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해요.
집을 짓는 사회학자나 철학자가 되고, 밥(빵)을 짓는(굽는) 경제학자나 교육학자가 되며, 빨래를 하고 아이를 돌보는 국회의원이나 군수나 시장이 된다면, 우리 사회는 한 걸음 나아가거나 새롭게 거듭날 만하지 싶습니다. 책상맡에만 머물지 않고 밭자락하고 부엌에서 살림을 짓는 길을 걷는 지식인이 늘어날 적에 사회도 문화도 교육도 아름다워지지 싶어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자신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사람들한테서 “위신을 빌려온다”고 밀스는 주장했다 … 밀스한테 가장 큰 두려움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그 어떤 소외감도 경험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만일 인간의 본성에 무한히 융통성이 있다면,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어쩌면 현대의 억압적 관료 조직이 만들어낸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상징할 거라고 밀스는 생각했다. 그것은 곧 “명랑한 로봇”이었다. (221, 224쪽)
그러나 지식인만 집살림을 할 수 있어야 하지는 않겠지요. 여느 회사원이나 공무원도 집살림을 즐겁게 가꾸는 숨결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우리 누구나 아름다운 평화와 평등을 헤아리고, 즐거운 평화와 평등을 생각하며, 사랑스러운 평화와 평등을 꿈꾸는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할 테고요.
밀스라는 분은 사회학을 밑바탕으로 삼아서 여러 가지 책과 글을 썼습니다. 사회학을 밑바탕으로 두면서 ‘아름다운 미국’이 되기를 바라는 뜻을 펼쳤어요. 군사강대국 미국이 아닌 아름다운 미국을 바란 사회학입니다. 경제강국 미국보다는 아름다운 평화를 이루는 미국을 바란 사회학이에요.
한국 사회에는 어떤 사회학이 있을 때에 아름다울까요. 한국 사회는 군대와 전쟁무기를 어떻게 바라볼 때에 아름다울까요. 한국 사회는 아직도 경제발전에 너무 얽매이면서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삶이나 살림하고 자꾸 멀어지지 않을까요.
밀스는 진리를 말하고 불의한 권력에 맞서야 할 지식인들의 특별한 책임을 늘 강조했지만, 이제 간청의 범위를 넓혀 보다 큰 사회 계층에게 호소했다. 따라서 밀스는 〈어느 이교도의 설교〉에서 목사들에게 “왜 당신들 스스로를 중요 인물로 만들지 않습니까? 왜 당신들은 회중, 즉 도덕을 지향하며 도덕적으로 서 있는 신도들의 모임을 공개 토론장으로 만들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했다. (332쪽)
정치권력하고 가까운 사회학이 있을 때하고, 수수한 사람들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사회학이 있을 때를 생각해 봅니다. 정치권력을 비판할 줄 모르는 사회학이 있을 때하고, 수수한 사람들하고 길벗이 되는 사회학이 있을 때를 생각해 봅니다. 사회학뿐 아니라 교육학이나 인문학도 정치권력을 고분고분 따를 적에는 학문다운 학문이 되기는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옳은 길을 살피고, 바른 길을 북돋우며, 고운 길을 가꿀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학문다운 학문이 된다고 느껴요. 학문이 바로서면서 삶이 바로설 때에 사회가 나아지겠지요? 《C. 라이트 밀스》를 덮으면서 한국 사회에는 어떤 뜻있고 듬직하며 당찬 사회학자가 있었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앞으로 한국 사회에는 어떤 젊은이가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사회학자로 우뚝 설 만할까 하고 헤아립니다. 2016.9.18.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