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 (반양장) - 박노해 사진 에세이,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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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13



커피잔 들고 웃음짓는 이웃을 그리는 ‘새로운 노동’

― 다른 길

 박노해 사진·글

 느린걸음 펴냄, 2014.2.1. 19500원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라오스, 버마, 인디아, 티벳, 이렇게 여섯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다른 길》(느린걸음,2014)을 읽습니다. 글책이 아닌 사진책이지만 나는 이 사진책을 가만히 읽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눈으로 훑고 지나가는 어떤 모습’이 아니라 ‘어떤 모습에 깃든 숨결과 바람과 이야기’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에는 자연이 길러준 것들을 거두어 채취경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약 1만 년 전 농경정착을 시작하기 전까지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수렵채취로 살아왔다. 우리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다 공짜다. 나무 열매도 산나물도 아침의 신선한 공기도 눈부신 태양도 샘물도 아름다운 자연 풍경도. (31쪽)



  사진책 《다른 길》을 빚은 박노해 님은 한동안 노동자였고, 한때 시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박노해 님은 ‘일을 하는 사람’이고 ‘노래를 하는 사람’입니다. 노동자 시인이라는 길을 지나오면서 ‘일하는 기쁨을 노래하는 사람’으로 탈바꿈합니다. 기계처럼 똑같이 되풀이하는 하루를 쳇바퀴처럼 보내야 하는 나날이 아닌, 날마다 새롭게 삶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이야기를 짓는 길을 걷는다고 할 만해요.


  박노해 님은 아시아 여러 나라를 돌면서 수많은 사람들한테서도 이와 같은 일을 느끼고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이와 같은 모습을 만납니다. 사진책 《다른 길》에 실린 ‘일하는 사람들’은 고된 몸짓이 아니에요. 쳇바퀴처럼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아닙니다. 날마다 똑같이 뒹굴면서 고달파야 하는 살림도 아닙니다.



마르야나(20)와 세 남매는 엄마 아빠를 따라 ‘리아르 가요’ 커피 농사를 이어가겠단다. “증조할머니가 심은 이 나무는 백 살이 넘었어요. 하얀 커피꽃이 피고 꿀벌이 날고 꽃잎이 떨어지면 빨간 커피 체리 안에 녹색 커피 생두가 반짝여요. 제 손으로 커피 체리를 딸 때마다 저 안개 너머에 지금 커피잔을 들고 미소짓는 누군가를 떠올리곤 해요.” (37쪽)



  스무 살 젊은이가 커피밭을 물려받아서 즐겁게 커피꽃을 바라보겠노라 이야기합니다. 스무 살 젊은이는 커피밭에서 ‘할머니가 낳은 어머니’가 심은 커피나무를 떠올립니다. 어쩌면 백 해 앞서 심었다는 그 커피나무는 인도네시아가 유럽 어느 나라에 식민지살이를 해야 하던 무렵 ‘슬픔하고 눈물’로 심은 나무일 수 있어요. 그러나 ‘할머니를 낳은 어머니’를 거치고 ‘할머니’를 거치며 ‘어머니’를 거치는 동안 이 커피나무 한 그루에 따사로운 사랑이 깃듭니다.


  어머니와 어머니와 어머니와 어머니, 또 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버지는 커피나무를 늘 사랑으로 돌보았을 테지요. 이러한 사랑은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랄 테고요.



축구의 꽃은 동네축구에 있다. 펠레도 마라도나도 메시도 호날두도 박지성도 다 골목축구에서 탄생한 별들이 아닌가. (65쪽)


수확을 마친 농부 아빠가 아들과 놀아 주고 있다. “이 의자는 아이가 처음 말하던 날 만든 것이구요, 이 목나는 아이가 첫걸음마 하던 날 만든 것이구요, 오늘은 대나무를 깎아 새장을 만들어 줄 거예요.” 아빠가 아이에게 주었던 것은 ‘시간의 선물’. 사랑은,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69쪽)



  아이한테 놀잇감을 마련해 주자면 품을 들여야 합니다. 어버이는 ‘내 하루’를 틈틈이 쪼개고 나누어서 놀잇감을 짓는 일을 합니다. 아이는 아직 ‘어버이가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잘 몰라요. 그래서 어떤 아이는 어버이한테 ‘왜 장난감을 빨리 장만해 주지 않느냐’고 조르거나 닦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아이는 어렴풋하게나마 ‘어버이가 늘 하는 수많은 일’을 느낄 수 있어요. 어버이가 날마다 조금씩 짬을 내어 제(아이) 놀잇감을 짓는 몸짓을 알아챌 수 있어요.


  ‘어버이가 제 시간을 내어주는 선물’을 아이가 느껴요. 놀잇감 하나에서뿐 아니라, 밥 한 그릇에서도 느껴요. 옷 한 벌에서도 느끼고, 이부자리에서도 느껴요. 처마 밑 그늘에서도 평상에서도 마루에서도 마당에서도 물씬 느끼지요.



“제가 제일 닮고 싶은 사람은 울 아빠예요. 제 동생들도 절 닮고 싶다고 하면 좋겠어요. 하하.” 학교를 그만둬도 아이는 비참해하지 않는다. 공부는 학교에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느냐며 씨익, 앳된 얼굴에 맺힌 구슬땀을 닦는다. (129쪽)



  사진책 《다른 길》을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박노해 님은 아시아 여러 나라 아이들하고 어른들 말을 귀여겨들은 뒤 조곤조곤 옮겨적습니다. ‘커피잔을 손에 쥐고 웃음짓는 이웃’을 그리는 젊은이 말을 옮겨적고, ‘아버지를 닮고 싶은 아이’ 말을 옮겨적습니다. 아이가 자라는 결에 맞추어 새로운 놀잇감을 손수 깎아서 마련하는 어버이 말을 옮겨적어요. 꽃밭을 가꾸어서 꽃을 저잣거리로 가지고 가서 내다 파는 젊은이 말을 옮겨적고, 손수 짠 돗자리를 멧골부터 짊어지고 저잣거리로 와서 내다 파는 젊은이 말을 옮겨적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새롭게 일하는’ 이웃들을 만나서 박노해 님 스스로 삶을 새롭게 바라본다고 합니다. ‘저임금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바라보면서, 박노해 님부터 스스로 새로운 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꽃을 기르는 마 모에 쉐(21)가 꽃 한 송이를 건넨다. “쭌묘에서 꽃밭을 가꾸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아름다운 꽃들은 제 손에 향기를 남기지요. 꽃을 든 사람들의 미소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리고 부처님께도 가장 멋진 선물이 될 거예요.” (213쪽)



  너랑 내가 같은 길을 걷지 않으니 너랑 나는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시골에서 살고 너는 도시에서 살기에 너랑 나는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너는 연봉 높은 일자리를 얻고 나는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살기에 너랑 나는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저마다 새로운 길을 걷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나 파키스탄에도 커다란 도시가 있고, 공무원이 있으며, 부자가 있어요.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에도 시골지기가 있고, 수수한 살림을 조촐하게 가꾸는 작은 사람들이 있어요.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도 있으나, 아주 적은 돈을 벌면서도 늘 웃음짓는 살림으로 기쁜 사람도 있어요.


  어떤 길이 길다운 길일까요? 더 좋은 길이나 더 나쁜 길이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길을 가야 할까요? 우리는 서로서로 다른 길을 가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 우리는 저마다 제 나름대로 ‘새로운 길’을 갈고닦으면서 스스로 즐거울 이야기를 지을 수 있으면 아름다운 살림이 될 만하지 않을까요?


  구름을 등에 지고 해님을 마주보며 바람을 맑게 마시는 아시아 여러 나라 이웃들을 사진으로 마주합니다. 이 사진책이 아니더라도 이 지구별 곳곳에는 수수하면서 아름다운 살림을 가꾸는 이웃이 즐겁게 웃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곁에도 수수하면서 정갈한 삶을 짓는 동무가 기쁘게 노래하리라 생각해요.


  길을 생각합니다. 다른 길, 새로운 길, 즐거운 길, 기쁜 길, 웃음짓는 길, 노래하는 길, 꿈꾸는 길, 아름다운 길, 무지개 같은 길, 바람 같은 길, 푸른 길, 파란 길, 하얀 길, 금빛으로 출렁이는 가을논 같은 길, 숲내음이 물씬 흐르는 상냥한 산들바람이 부는 길, 수많은 길을 헤아려 봅니다. 우리가 선 이 길은 어떤 길인가요? 2016.8.9.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이 글에 붙인 사진은 '느린걸음 출판사'에서 고맙게 보내 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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