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아직 그 달이다 창비시선 398
이상국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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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25



농성장을 꽃밭으로 바꾸어 주는 ‘사랑’

―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이상국 글

 창비 펴냄, 2016.5.9. 8000원



  시인 이상국 님은 마흔 해라는 나날을 두고 시를 써서 일곱째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창비,2016)를 선보입니다. 마흔 해에 걸친 시쓰기는 마흔 해에 걸친 노래라고 느낍니다. 마흔 해를 한결같이 시처럼 삶을 바라보며 읊는 노래이지 싶습니다.


  시라고 하는 한길을 차근차근 걸어온 발자취를 헤아립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쌀을 씻어서 불리고, 부엌을 갈무리하고,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고, 마당을 쓸고, 밭자락을 돌아보고 난 뒤에 시 한 줄을 가만히 읽어 봅니다.



봄이 되어도 마당의 철쭉이 피지 않는다 / 집을 팔고 이사 가자는 말을 들은 모양이다 / 꽃의 그늘을 내가 흔든 것이다 (그늘)


내가 아는 유월은 오월과 칠월 사이에 숨어 지내는데 사람들은 잘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유월에는 보라색 칡꽃이 손톱만 하게 피고 은어들도 강물에 집을 짓는다. (유월)



  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새 유월에 새롭게 들일을 합니다. 바야흐로 한낮 햇볕이 따가운 철인 터라 새벽 일찍 하루를 엽니다. 일흔 해나 여든 해를 살아온 이 시골자락에서 언제나처럼 시골일을 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문득 생각해 봅니다. 찔레꽃이 지면서 찔레알이 천천히 여무는 이 유월에, 붓꽃도 차츰 시들고 옥수숫대는 무럭무럭 오르는 이 유월에, ‘시 할아버지’와 ‘시골 할아버지’ 사이에 흐르는 기운을 생각해 봅니다. 일흔 고개로 접어든 ‘시 할아버지’는 이녁 어릴 적 이야기를 자꾸 시로 적바림합니다. 어린 나날 마주한 시골 모습을 그리고, 어린 나날 먹던 밥을 그리며, 어린 나날 하던 시골일을 그립니다.


  일흔 살 시 할아버지는 천천히 흙내음 쪽으로 몸이 기울어질는지 모릅니다. 어린 날 마음에 새겨진 흙내음을 떠올리고, 오늘날 새롭게 마주하는 유월 바람을 가만히 되새깁니다. 지난날 유월에 만난 칡꽃을 되새기면서, 오늘날 새삼스레 맞이하는 유월 땡볕에 땀을 흘립니다.



아카시아꽃을 씻어 / 밥 잦을 때 안치면 // 이밥보다 하얀 / 꽃밥이 되었다 (꽃밥 멧밥)


친구 어머니 문상을 했다. // 그 나이 되도록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니 얼마나 고마웠을까. (신발을 찾아 신다)



  시 할아버지는 아카시아꽃을 씻어 꽃밥을 지어 먹었다고 합니다. 나는 오늘 내 보금자리에서 모시잎을 훑어 모시밥을 지어 먹습니다. 이른 봄에는 여린 쑥을 뜯어서 쑥밥을 지어 먹었고, 오뉴월에는 모시잎을 뜯어서 모시밥을 지어 먹어요. 가을에는 감자밥을 지어 먹고, 겨울에는 고구마밥을 지어 먹어요. 때로는 무밥을 지어 먹고, 당근을 넣은 당근밥도 지어 먹습니다. 감꽃을 주워서 감꽃밥을 지어 먹기도 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시골일은 하나같이 ‘먹는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땅을 만지는 일이란, 내 입으로 들어올 밥을 정갈히 다스리는 일인가 하고 돌아봅니다.


  살림을 짓는 일이라면 아이들을 건사하면서 보살피고 사랑하는 일이 될 테지요. 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시 한 줄이란, 시로 지은 꿈을 이야기로 들려주는 일이 될 테고요. 아이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뛰노는 하루란 그야말로 재미난 놀이를 짓는 일이라 할 터입니다.



얼마 전 한국의 중구청 공무원들이 / 쌍용차 대한문 농성장을 철거하고 / 화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 꽃들이 얼마나 좋아했을까 // 노동자들의 자비다 (자비에 대하여)



  투박한 말투로 꽃을 말하고 사랑(자비)을 말합니다. 농성장이 사라지고 꽃밭이 생겨난 일을 지켜본 시 할아버지는 ‘꽃사랑’을 넌지시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나라에는 너른터(광장)가 수없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이 넉넉히 모여서 뭔가를 꾀할 만한 자리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나저나 “한국의 (중구청) 공무원”들이 꽃밭(화단)을 좋아한다면, 꽃을 그토록 사랑한다면, 광화문도 청와대도 국회의사당도 모두 조용히 헐고서 꽃밭으로 바꾸어 줄 수 있을까요? 모든 시멘트덩이를 걷어내고 꽃밭이나 꽃숲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요? 고속도로도 골프장도 축구장도 말끔히 걷어내고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요? 농성장만 꽃밭으로 바꾸지 말고 온 나라에 고운 꽃내음이 퍼지는 사랑스러운 마을로 바꾸어 볼 수 있을까요?



예닐곱살쯤 돼 보이는 계집아이에게 / 아빠는 뭐 하시냐니까 //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환해지며 /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쫄딱)



  착한 사랑을 그리고 싶습니다. 고운 사랑을 그리고 싶습니다. 농성장을 꽃밭으로 바꾸어 주는 사랑보다는, 아프게 외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랑을 그리고 싶습니다. 오월꽃과 유월꽃이 베푸는 보드라운 냄새에 몸을 맡길 줄 아는 사랑을 그리고 싶습니다. 흙내음을 아끼고, 나무 한 그루를 돌볼 줄 아는 사랑을 그리고 싶습니다.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를 덮고 아침밥을 지으려 합니다. 부엌에 들어온 파리 한 마리를 손으로 살살 쫓으면서 문 밖으로 내보냅니다. 굳이 파리채를 들지 않고도 파리를 밖으로 내보낼 만합니다. 파리더러 거름자리로 가서 네 몫을 즐겁게 맡아 달라고 속삭입니다.


  환해지는 골목처럼 환해지는 마을을 그려 봅니다. 이웃이 서로 아끼는 살림을 그려 봅니다. 환해지는 나라와 환해지는 시 할아버지 마음을 그려 봅니다. 유월볕을 받는 논자락 볏포기가 싱그러이 빛나는 나날입니다. 2016.6.1.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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