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바다 - 칼 슈미트의 세계사적 고찰
칼 슈미트 지음, 김남시 옮김 / 꾸리에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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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을 ‘빈 곳’으로 보며 ‘땅 취득’을 하려던 문명

― 땅과 바다

 칼 슈미트 글

 김남시 옮김

 꾸리에 펴냄, 2016.4.30. 17000원



  독일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칼 슈미트 님은 1942년에 《땅과 대지》라는 책을 선보였다고 합니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말로 나옵니다. 칼 슈미트 님은 이 책에서 “우리는 땅의 자식들일까, 아니면 대양의 자식들일까(12쪽)?” 하고 묻는데, 나치당에 들어가서 일하기도 했던 이녁은 ‘독일이 영국처럼 드넓은 바다를 누비면서 식민지를 늘리지 못한 일’을 아쉽게 여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세계의 역사는 땅 취득의 역사야. 땅의 취득이 있을 때마다 그들이 서로 협약을 맺기만 했던 것은 아니야. 그들은 매우 자주 서로 대립했고 종종 피를 부르는 형제전쟁을 치르기도 했어. (91∼92쪽)


비행기들이 바다와 대륙 위의 영공을 횡단할 뿐 아니라, 모든 나라의 송신소에서 나오는 무선전파들이 눈을 깜빡이는 속도로 대기공간을 통과해 지구 전체를 맴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인간은 이제 새로운 제3의 차원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세 번째 원소, 즉 인간실존의 새로운 원소 영역인 공기를 정복했다고 결론 짓고 싶을 거야. (128쪽)



  군대를 앞세운 전쟁무기로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식민지’를 삼는 일을 “땅 취득”이라고 바라본 일은 오직 칼 슈미트 한 사람뿐이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땅과 대지》를 읽다 보면, ‘식민지가 된 나라’는 ‘유럽한테 식민지가 된 때부터 비로소 역사가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합니다. 바다를 가로질러서 유럽에서 북미 중미 남미로 쳐들어갔기에, 이때부터 북·중·남미는 ‘새로운 역사’가 생겼다고 이야기합니다.


  유럽 사람들 눈으로 본다면 이 같은 이야기는 ‘틀리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렇지만 북·중·남미 사람들 눈으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섬나라’로서 바다만 끼고 살다가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이웃나라 일본’은 한국으로 쳐들어오면서 ‘대륙(땅)으로 나아간다’고 외쳤어요. 일본이라는 나라한테도 한국이라는 식민지는 “땅 취득”이었을 뿐일 테고, 그들 나라가 ‘새로운 역사’를 펼치는 일만 헤아렸으리라 느껴요.


  그리고 독일이 ‘바다 권력’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지만, ‘하늘 권력’을 누리려고 하는 모습은 새로운 ‘정복’으로 느끼면서 무척 반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늘을 ‘정복’한 독일은 어마어마한 비행기를 이끌고 이웃 여러 나라에 폭탄을 떨어뜨렸어요. 하늘을 아름답게 날면서 새로운 바람을 쐬는 몸짓이 아니라, 끝없이 전쟁을 일으켜서 “땅 취득”을 하려는 ‘형제전쟁’에 매달렸습니다.



아가미를 통해 호흡하는 거대한 육지동물을 말이야! 북극에서 남극까지 세계의 바다를 헤엄쳐 횡단하는 가장 크고, 가장 강하며, 가장 힘이 센 바다동물이 바다의 서식 조건에서 폐로 숨을 쉬고, 포유류로서 살아 있는 새끼들을 낳는다는 것! 양서류도 아닌 온전한 포유류이면서도 동시에 그 생명의 원소에 의하면 물고기라는 것이지. (37쪽)


고래물고기가 없었더라면 어부들은 언제까지고 해안에만 들붙어 있었을 거야. 고래가 그들을 유혹해 해양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해안에서 해방시켰던 것이지. (42쪽)



  《땅과 대지》를 쓴 칼 슈미트 님은 이 지구라는 별에서 ‘뭍(땅)’은 좁고 ‘바다(물)’는 훨씬 넓은데, 사람들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역사’만 바라볼 뿐,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역사는 볼 줄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바닷가에만 겨우 붙들린 채 드넓은 곳을 바라볼 줄 몰랐다고 이야기해요.


  고래잡이가 나타난 일이란, 사람들이 고래를 잡으려고 먼 바다로 나간 일이란, 비로소 ‘좁은 땅’에서 스스로 해방되어 넓은 새터(신세계)를 깨달은 일이라고 밝힙니다. 그런데 칼 슈미트 님이 이야기하는 ‘넓은 새터’는 “땅 취득”처럼 “바다 취득”을 할 때에만 뜻이 있는 셈인가 싶어서 살짝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서로 이웃이 되어 아름답게 지내는 살림이 아니라, 이웃이 조용히 일구면서 지내는 땅을 가로채거나 빼앗을 적에 비로소 ‘넓은 새터’가 나타나면서 ‘새 역사’를 쓴다고 할 만한지 아리송하기도 해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사람들은 비어 있는 공간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어. 그 이전에 일부 철학자들이 ‘비어 있음’에 대해 이야기한 바는 있어도, 비어 있는 공간을 떠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던 일이란다. (83쪽)



  ‘식민지 개척’이라는 눈길로 바라본다면, 유럽 사람들한테 유럽 아닌 곳은 ‘빈 곳(빈 공간)’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유럽 사람들한테는 유럽 역사와 문화만 있을 뿐이고, 유럽 사람들한테 빈 곳이던 아시아나 북·중·남미는 그저 ‘빈 곳’이면서 ‘아무 역사가 없는 곳’이 될 만합니다.


  북미를 식민지로 삼아서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룬 유럽 사람들한테 ‘미국사’란 북미 토박이를 밀어내어 “땅 취득”을 한 역사입니다.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그 터에서 조용히 살아온 사람들이 지은 살림을 ‘미국사’로 여기지 않겠지요.


  우리가 말하는 ‘빈 곳’은 참말로 비었다고 할 만한가 적잖이 궁금합니다. 빈 땅이나 빈 밭이라 하더라도, 그곳에는 수많은 풀과 나무가 자라고 수많은 벌레와 작은 짐승이 깃들어 삽니다. ‘빈 곳’이라고 여기지만 정작 비지 않고 수많은 다른 숨결이 있어요.


  유럽 문명이나 문화는 ‘유럽 아닌 곳’을 ‘빈 곳’으로 바라보면서, 유럽 아닌 곳을 하나씩 “땅 취득·바다 취득·하늘 취득”이라는 얼거리로 차지하려고 하면서 차츰 거듭났다고 할는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이나 문화는 이렇게 발돋움했다고 할 수도 있을 테고요. 다만, 서로 아끼거나 어깨동무하려는 몸짓이 없다면, 바로 저곳은 텅 빈 곳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숨결(사람)’이 살림을 짓는 삶터인 줄 바라보려는 눈길이 없다면, 이는 제국주의나 나치나 군국주의처럼 전쟁무기로 이웃을 짓밟고 마는 일이 되지 않으랴 싶어요.


  문명에 앞서 평화를 생각하고, 문화에 앞서 살림을 생각하며, 식민지(땅 취득)에 앞서 사랑을 생각할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2016.5.18.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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