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온 아이 담푸스 그림책 16
에밀리 휴즈 글.그림, 유소영 옮김 / 담푸스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34



새한테서 말을 배운 ‘숲아이’가 도시에서는?

― 숲에서 온 아이

 에밀리 휴즈 글·그림

 유소영 옮김

 담푸스 펴냄, 2015.5.15. 10800원



  에밀리 휴즈 님이 빚은 그림책 《숲에서 온 아이》(담푸스,2015)를 읽다가 문득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날이 갈수록 ‘숲’을 다루는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이 부쩍 늡니다. 어른책 가운데에서도 숲을 다루는 책이 꽤 늡니다.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에서는 ‘아이가 숲에서 나거나 자라는 이야기’를 흔히 다룹니다. 어른책에서는 숲으로 나들이를 가거나 숲에서 깃들며 살림을 가꾸는 이야기를 으레 다룹니다. 도시 살림을 다루는 책도 무척 많지만, 숲에서 빚는 살림을 노래하는 책도 제법 많아요.


  한국 인구 통계를 살피면 도시 인구는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90퍼센트에 이르렀어요. 머잖아 95퍼센트가 될 수 있고, ‘시골’이라 하더라도 읍내나 면내에 사는 사람들 숫자까지 더하면 도시 인구는 99퍼센트라고까지도 할 만하다고 느껴요. 왜 그러한가 하면, 전남 고흥에서 사는 우리 식구가 읍내나 면내로 나들이를 가서 ‘읍내 아이’나 ‘면내 아이’를 만나면, 읍내나 면내에 있는 아이들은 스스로 ‘시골에 산다’고 여기지 않아요. 서울에서 고흥을 바라보면 ‘고흥은 시골’이라 할 테지만, 고흥읍이나 도양읍 같은 데에 있는 아이(어른도 마찬가지일 테지요)는 ‘도시내기’로 여긴다고 할까요.



저 멀리 숲 속에 사는 아이가 있어요. 어떻게 숲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숲이 아이 집인 건 모두 알아요. 숲에 사는 동물들은 아이를 보살폈어요. (2쪽)




  《숲에서 온 아이》는 숲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를 다룹니다. 그림책 첫머리를 보면 이 아이가 왜 숲에서 사는가를 아무도 모른다고 밝힙니다. 어쩌면 ‘숲어른’이 아기를 낳고 그만 숲을 떠났거나 이 별을 떠났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도시내기 어른’이 아기를 숲에 조용히 내려놓고 떠났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숲아이’는 숲짐승이 한마음으로 돌보면서 씩씩하게 자라요. 숲짐승은 저마다 어버이 노릇을 하고 스승 구실을 하며 동무 자리에 서서 이 아이가 숲아이로서 즐겁게 삶을 누리고 살림을 짓도록 북돋웁니다.


  숲아이인 만큼, 이 아이는 ‘숲말’을 익힙니다. 숲말이란 숲에서 쓰는 말입니다. 숲에 사는 짐승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숲말입니다. 숲에 있는 풀·꽃·나무하고 마음을 속삭일 수 있는 숲말이지요.


  숲아이인 터라, 이 아이는 ‘숲놀이’를 즐깁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숲에서 놀고, 숲에서 밥을 먹으며, 숲짐승 어느 누구도 옷을 입지 않는 만큼 숲아이도 맨몸으로 마음껏 뛰놀면서 여름이든 겨울이든 기운차게 보냅니다.



새는 아이에게는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곰은 먹는 법을 가르쳐 주었지요. (5∼6쪽)




  숲아이가 숲살이를 마음껏 누리던 어느 날, 그만 ‘숲 아닌 도시에 있는 누구’인가 이 아이를 보았대요. 그리고 이때 일이 하나 생깁니다. ‘숲 아닌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아이가 혼자 숲에 있으니 큰 잘못이나 말썽이라고 여겼대요. 이 아이를 얼른 도시로 데려가서 ‘문화와 예절과 교육과 복지’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여겼다는군요.


  이제껏 숲에서 숱한 숲짐승하고 숲동무가 되어 살아온 숲아이는 앞으로도 숲에서 살면 안 될 일이었을까요? 이제껏 도시내기 어른들 어느 누구도 숲아이를 몰랐어도 숲아이는 맑고 밝은 숨결로 잘 살았을 텐데요?


  아무래도 도시내기 어른들은 숲아이한테 ‘사회성이 없다’고 여겼겠지요. 숲아이가 ‘몇 살’인지 따지려 할 테고, 이 숲아이가 다른 어른들처럼 ‘도시에서 주고받는 사람들 말’을 써야 한다고 여겼을 테지요. 이 숲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살피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이 숲아이가 무엇을 잘하고 어떤 꿈을 키워서 어떤 살림을 지을 때에 아름다울까 하는 대목도 헤아리지 않으면서 말이에요.



어느 날, 숲에서 놀던 아이는 새로운 동물과 마주쳤어요. 바로 사람들이었죠. 사람들은 아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아이도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13∼15쪽)




  오늘날 우리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서 ‘사회성 훈련’을 시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도록 하면서 ‘사회화 교육’을 시킵니다.


  사회 훈련이나 사회 교육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는 짚어 보아야지 싶어요. 학교를 오래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밥을 짓거나 옷을 짓거나 집을 짓는 길을 배우지 못합니다. 학교를 잘 마치고 나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 일꾼이나 가게 일꾼이 되는 사람은 매우 많지만, 스스로 ‘삶짓기’나 ‘살림짓기’를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학교를 오래 다녔어도 아이를 어떻게 사랑으로 돌보고 아낄 때에 삶·살림이 즐거운가 하는 대목도 학교에서 배우지 못해요. 그리고 학교에서는 ‘서울 표준말’만 배워요. 부산에서 부산말을 가르치는 학교는 없고, 광주에서 광주말을 가르치는 학교도 없어요.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삶터에서 태어나지만, 저마다 다른 삶터에 걸맞게 새로우면서 아름다운 삶짓기를 좀처럼 못 배우는 나날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이를 낳아서 돌보는 어버이도 아이한테 ‘저마다 다르면서 아름다운 숨결로 살림을 짓는 사랑’을 좀처럼 물려주지 못한다고 할 만하지 싶기도 해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아이는 절대로 길들일 수 없거든요. (33쪽)




  그림책 《숲에서 온 아이》에 나오는 숲아이는 도시살이가 몹시 벅찹니다.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길이 없고, 아무도 숲아이 마음에 맞추어 다가서려 하지 않습니다. 도시내기 어른들이 하는 몸짓은 오직 하나, ‘숲아이가 도시아이가 되도록 길들이기’입니다.


  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숲아이는 도시에서 어떤 삶을 지을 만할까요? 숲말과 숲놀이와 숲살림과 숲노래와 숲꿈과 숲이웃은 모두 부질없을 뿐일까요?


  그림책에 나오는 숲아이뿐 아니라, 여느 도시에서 수수하게 태어나서 자라는 ‘도시아이’도 도시에서 아이들 나름대로 즐겁게 꿈을 키워서 새롭게 살림을 짓는 조촐하면서 예쁜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 꽁꽁 틀어막히힌 우리 모습이지는 않을까요? 도시아이는 얼마나 홀가분하려나요? 도시아이는 얼마나 아늑하려나요? 도시아이는 얼마나 웃음꽃을 터뜨리려나요?


  아이들 마음자리에 꿈씨 한 톨이 자랄 수 있기를 빕니다. 어른들 마음밭에 사랑씨 한 톨이 뿌리내릴 수 있기를 빕니다. 틀에 가두려는 몸짓이 아니라, 새로운 살림을 짓는 보드라운 손길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도시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도 숲내음이 싱그러운 어여쁜 숨결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모두 ‘숲에서 난 것’을 먹고, ‘숲에서 비롯한 바람’을 들이켜며, ‘숲에서 흐르는 냇물’을 마시는 지구별 한지붕 이웃이에요. 2016.3.4.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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