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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담그는 아버지 - 한국사 속 두 사람 이야기 ㅣ 10살부터 읽는 어린이 교양 역사
윤희진 지음, 이강훈 그림 / 책과함께어린이 / 2009년 10월
평점 :
어린이책 읽는 삶 138
밥하고 빨래하며 노래하는 아버지
―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
윤희진 글
이강훈 그림
책과함께어린이 펴냄, 2009.10.9. 9500원
아직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쓰던 1980년대를 떠올립니다. 그무렵에 국민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 해마다 ‘장래희망’을 물었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장래희망을 종이에 적어서 내야 했는데, 교사가 나누어 주는 종이에는 숫자가 적혀서 1번부터 5번까지 하나하나 적으라 했어요. 1980년대는 2010년대하고 사뭇 다르다 할 테니까 요새 어린이하고 무척 다른 장래희망을 적었을 테지요. 그때에 내가 적은 장래희망 가운데 하나는 ‘가정주부’였습니다. 1번에 가정주부를 적지는 않았지만,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도 2번이나 3번에는 으레 가정주부를 적었어요.
가시내 아닌 사내가 가정주부를 적는다고 해서 놀린다거나 비웃는 교사나 동무가 제법 있었는데,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내 ‘앞으로 이룰 꿈’ 가운데 하나를 ‘가정주부’로 적었습니다. 이 꿈은 서른 살을 지날 무렵 ‘살림꾼’으로 바꾸었어요. 집일만 하는 돌쇠가 아니라 살림을 가꾸는 슬기로운 어른이 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이들 먹으라고 고추장을 직접 담가서 보내는 아버지는 요즘에도 드물 거야. 겉으로는 엄하게 대해도 자식들을 생각하는 아버지 박지원의 마음이 특별하구나. (16쪽)
봄바람, 달, 술의 즐거움도 놓칠 수 없는데 어떻게 책에만 빠져 있느냐며 책의 즐거움도 중요하지만 거기에만 빠지지는 말라는 뜻이지. 부인의 마음이 웬만한 남자들보다 커 보이지 않니? (27쪽)
윤희진 님이 글을 쓰고, 이강훈 님이 그림을 그린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책과함께어린이,2009)라는 책을 읽습니다. 어린이 역사책입니다. 책이름은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입니다만, 이 책은 조선 무렵 역사를 어린이한테 들려줍니다.
어느 모로 보면 좀 뜬금없다 싶은 책이름일까요? 틀림없이 뜬금없다고 여길 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 보면 왜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 알 만하리라 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는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놓칠 만한 역사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사임당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작은 생명들에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그렸어. 수박밭에서 수박을 갉아먹는 들쥐, 가지 옆을 날아다니는 나비와 방아깨비, 오이 덩굴 옆의 개구리 같은 것들을 생동감 있게 표현해 냈지. 그렇게 그린 그림을 친척들이 얻어 가곤 했어. (41쪽)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재산이 넉넉할 리 없었지. 하지만 이익은 이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어. 오히려 양반입네 하고 일하지 않는 자들을 나무라며 스스로 농사를 지었고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지. (131쪽)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는 박지원 님이라고 합니다. 박지원 님은 글이나 학문으로 오늘날 우리한테 뜻깊은 옛사람으로 돌아볼 만한 어른이 되지만, 이런 모습뿐 아니라 아이들을 알뜰히 아끼고 사랑하는 몸짓이 대단했다고 해요.
손수 고추장을 담글 줄 아는 아버지 박지원이라면 틀림없이 밥도 손수 지을 줄 알 테고, 나무를 할 줄도 알 테며, 아궁이에 불을 지필 줄도 알 테지요. 빨래를 할 줄도 알 테고, 씨앗을 심어서 돌보고 거두어 갈무리할 줄도 알 테고요.
박지원이라고 하는 분이 우리한테 슬기로운 숨결을 베풀 수 있던 바탕에는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 같은 살림넋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기쁨을 아는 몸짓으로 마을과 나라를 살림하는 보람을 헤아리는 이야기를 글과 책으로 여밀 수 있었겠지요.
이를테면 정치하는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정치만 잘 하는 정치 전문가가 정치를 얼마나 잘 할는지 생각해 볼 만해요. 전문가가 정치를 해야 정치가 훌륭할까요? 틀림없이 그러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정치 전문가이지만 집안일을 하나도 모른다거나 서민 삶을 하나도 모른다면? 정치나 행정이나 서류는 잘 만질 줄 알지만, 밥짓기나 옷짓기나 집짓기는 하나도 모른다면? 아이키우기나 집안일은 하나도 모르면서 전문가로 있다면?
고문의 후유증일까. 낯선 곳에서 느끼는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정약용은 귀양 온 직후 크게 앓은 적이 있었어. 그는 의학 책을 보고 스스로 약초를 달여 병을 치료했지. 그런 그를 보고 마을 사람이 부탁했어. (88쪽)
정약용은 단순히 유학의 경전들을 읽고 해석한 게 아니라, 현실을 개혁할 방법들을 연구했지. 유배지에서 만난 백성들의 삶이 너무나 고단했거든 … 정약용이 유배 생활 동안 학문에 집중했던 반면, 정약전은 백성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어. 어부들과 술도 마시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함께 살아갔지. (90쪽)
어린이 인문책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는 아주 수수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우리 어린이가 인문 지식을 더 많이 갖추기를 바라기보다는, 우리 어린이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에 서는 바탕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책이라고 느낍니다. 이런 훌륭한 역사 인물이 있었다는 지식보다는, 이런 옛사람이 어떤 숨결로 삶을 사랑하는 살림을 지었는가 하는 대목을 돌아보자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해요.
우리 집 아이들이 아버지한테 묻습니다.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를 읽는 아버지한테 “아버지 그 책 재미있어? 어떤 사람들이 나와?” 하고 묻습니다. 나는 아직 우리 집 아이들한테 ‘역사 인물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습니다. 아홉 살 어린이한테는 좀 먼 이야기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는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살림살이를 아이들한테 몸으로 보여주자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처럼 나는 “김치 담그는 아버지”로 지냅니다. “함께 노는 아버지”로 지내고,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서 마실 다니는 아버지”로 지냅니다. “함께 나무와 흙을 만지는 아버지”로 지내고, “밥을 아침저녁으로 지어서 밥상맡에 나란히 앉아서 수저를 드는 아버지”로 지냅니다.
정도전은 재상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꿈꿨어. 현명한 임금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임금도 있을 수 있으니, 임금이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뛰어난 재상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지. (122∼123쪽)
천문학에 밝은 사람들을 뽑아 중국 유학을 보내기로 했는데, 거기에 관노 출신 장영실이 들어간 거야. 세종 초기 이미 장영실의 기술은 당대 최고라는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겠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관노를 불러 학문에 대해 묻고 유학까지 보내 준 세종 또한 대단한 임금이지? (149쪽)
오늘 나는 ‘살림꾼’이 되자는 다짐으로 “밥하고 빨래하며 노래하는 아버지”로 하루를 누립니다. 다만, 이 일만 하지는 않습니다. 집안일도 하고 집밖일도 합니다. 이 일 저 일을 몽땅 도맡느라 때때로 등허리가 휩니다. 그런데 등허리가 휠 즈음 아이들은 사랑스럽고 멋진 모습을 아버지한테 보여주면서 웃도록 해 줍니다. 누나는 동생을 아끼고, 동생은 누나를 아끼면서 어버이한테 기쁨을 나누어 줍니다. 멋진 소꿉놀이를 아버지한테 보여주고, 고운 글이나 그림을 아이들 나름대로 빚어서 선물로 아버지한테 건넵니다.
어린이 인문책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옛사람은 저마다 “삶을 노래하는” 어른이었겠구나 싶습니다. 저마다 고단한 일을 겪어야 했든 아픈 일을 맞닥뜨려야 했든 참으로 삶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한길을 걸어간 어른이었지 싶어요.
노비 신분이었어도 과학자로 살림을 꾸린 분도 삶을 노래했을 테지요. 모든 권력이 임금한테 쏠리지 않도록 행정을 세우려 했던 분도 삶을 노래했을 테지요. 유배지에서 마을 사람들한테 꿈을 보여준 분도 삶을 노래했을 테고요.
역사책에 이름이 남든 안 남든 우리는 늘 어른이거나 어버이로서 기나긴 삶을 보냅니다. 내가 낳은 아이가 있든 없든 우리는 언제나 어른이거나 어버이로서 아이들 앞에 서요. 이때에 우리는 어떤 마음이 되거나 어떤 몸짓이 될까요?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물려주면서 오늘 하루를 새롭게 지을까요?
“된장 담그는 대통령”이나 “간장 담그는 국회의원”이나 “빨래하는 의사”나 “자장노래 부르는 대학교수” 같은 어른이 하나둘 나타날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한 가지 일만 잘 하는 전문가이기보다는 아이들하고 삶과 살림과 사랑을 함께 나누는 슬기로운 어른이자 살림꾼이 차츰 늘어날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2016.3.2.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어린이책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