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물고기 - 연어 이야기
고형렬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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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32



개울에 엎드려 입을 대고 물을 먹었다

― 은빛 물고기

 고형렬 글

 최측의농간 펴냄, 2016.2.4. 14000원



  예부터 모든 마을에는 샘터나 우물터나 빨래터가 있습니다. 마을이니까요. 예전에는 한집에 따로 물꼭지가 있지 않았어요. 어느 집에서건 물동이를 마련했고, 물을 길어다 썼어요. 집안에서 물꼭지를 틀어서 물을 쓰는 일이란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물을 써야 할 적에는 동이를 이고 두레박이나 바가지를 썼어요.


  마을을 이루는 사람들이 서로 물을 나누어서 쓰던 때에는 어느 곳에서나 맑고 싱그러우면서 단 물이었다고 느낍니다. 나 혼자 쓰는 물이라 나도 너도 쓰는 물이기에 이 물을 더럽히거나 어지럽히는 사람이 없어요. 다 함께 쓰는 물이니 서로 아끼고 보살피면서 살림을 지었어요.



넓지 않은 마당을 품고 있는, 진흙과 나무로 지은 자그마한 너와집. 빨랫줄이 그늘 속으로 들어가서 감나무 허리에 묶여 있다. 고향집에 들어가듯이 고 옹을 따라 문지방 안쪽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 문쪽에 앉는다. (20쪽)


10년 전까지만 해도 신기 사람들은 개울에 엎드려 입을 대고 물을 먹었다. 개울은 아래로 흘러내려가고 입에 닿은 물은 꿀꺽꿀꺽 목구멍을 넘어서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처럼 하천과 사람의 내장에 같은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물을 먹을 수가 없다. (27쪽)



  고형렬 시인이 쓴 《은빛 물고기》(최측의농간,2016)를 읽습니다. 이 책은 “은빛 물고기”를 다룹니다. “은빛 물고기”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연어’를 좇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깊은 멧골짜기 냇물에서 깨어난 작은 물고기가 바다로 흘러간 뒤에 다시 깊은 멧골짜기 냇물로 찾아가서 알을 낳은 뒤에 빈 껍데기 같은 몸뚱이를 내려놓는 한살이를 찬찬히 짚습니다.


  그런데 고형렬 시인이 은빛 물고기를 만나려고 깊은 멧골짜기를 찾아갈 즈음 이 물고기는 좀처럼 그 깊은 멧골짜기로 찾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을사람이 냇물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던 때에는 은빛 물고기가 이 냇물로 찾아왔다지만, 마을사람 누구도 냇물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지 못하는 때에는 은빛 물고기가 이 냇물로 찾아오지 못한다고 해요.



이제 그들은 물속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고 물속에서 밤이 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은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한다는 것도 알게 되고 강풍과 파도와 폭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68쪽)


먹이들이 떠다니는 북태평양의 수중 광경은 마치 눈 내리는 지상의 산속과 같다. 그것들이 해류를 따라 흐르고 연어들은 그들을 따라 흘러간다. (145쪽)



  물고기가 마시는 물이 바로 사람이 마시는 물입니다. 사람이 마시는 물이 언제나 물고기가 마시는 물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더 마실 수 없어서 목숨이 끊어진다면, 사람은 냇물을 더 마실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마음 놓고 마실 만한 냇물이 사라진다면, 냇물에서 물고기가 더 살 수 없습니다.


  깊은 멧골에서 졸졸 솟는 작은 물줄기는 내를 거치고 가람을 타면서 바다로 흐릅니다. 바닷물은 다시 뭍이나 하늘을 거쳐서 깊은 멧골로 돌아가서 샘물이나 냇물이 되지요. 똑같은 물이 이 지구별에서 흘러요. 똑같은 물을 사람이 마시고 물고기가 마셔요. 이 물줄기는 목숨줄기이면서 삶줄기입니다. 가느다른 물줄기는 삶줄기이면서 사랑줄기요 살림줄기입니다.


  그러니, 물 한 모금을 고이 여겨서 아낄 수 있을 때에 사람인 나는 내 목숨을 아끼고, 내 이웃인 물고기 목숨도 아낄 수 있습니다. 물 한 모금을 함부로 다루거나 더럽힌다면, 사람인 나는 내 목숨부터 함부로 다루거나 더럽히는 셈이요, 물고기까지 괴롭히듯이 다루거나 더럽히는 셈입니다.



모든 생명의 살과 생각은 마음의 열반과 함께 뒤섞여 있다. 모든 것은 마음의 반영이고, 마음의 작용은 몸의 작용이고, 그 작용은 만물 어떤 것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200쪽)



  고형렬 시인은 ‘자취가 끊어진 은빛 물고기’를 좇아서 곳곳을 누빕니다. 이 물고기를 따로 기르는 사람을 만나고, 예전에 이 물고기떼를 늘 마주하던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은빛 물고기가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이러는 동안 암컷하고 수컷은 저마다 어떤 헤엄짓으로 만나는지를 살핍니다. 두 물고기가 짝짓기를 하는 마지막 몸짓을 살핍니다. 짝짓기를 마치면서 낳는 알을 살핍니다. 온몸을 뒤틀면서 숨을 내려놓고 빈 껍데기 몸뚱이를 물살에 맡기면서 이승을 떠나는 흐름을 살핍니다.



그 광경을 쳐다본다면 아마 그 빛이 움직이는 하늘이 거대한 하나의 공간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을 넘어서는 공간의 하늘 속에 혹은 하늘벽에 찰나적으로 사라지고 나타나고 지워지는 빛의 신출귀몰은 인간 영혼에 하나의 강렬한 표상을 박아둘 것이다. (238쪽)



  사람은 한 번 짝짓기를 한 뒤에 목숨을 내려놓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물고기처럼 한 번 짝짓기를 한 뒤에 목숨을 내려놓는다면 아기가 태어나지도 자라지도 못할 테지요. 물고기는 제 알이 물속에서 스스로 깨어나서 자랄 수 있도록 모든 숨결을 불어넣은 뒤에 조용히 물길을 떠납니다. 사람은 제 숨결을 두 씨앗에 담아서 하나로 그러모은 뒤에 이 씨알에서 깨어날 새 목숨을 기다리면서 살림살이를 추스르고 보금자리를 가다듬습니다.


  물고기는 알에서 깨어난 뒤에 맞잡이한테 잡아먹히기도 하고, 거센 물살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사람은 아기로 태어난 뒤에 어버이한테서 온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하나씩 새롭게 배웁니다. 물고기는 모든 삶을 스스로 견디고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배우지요. 사람은 어버이한테서 말을 물려받고, 삶과 살림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요. 물고기는 제 어미한테서 ‘냇물과 바닷물에서 스스로 기운차게 살아남는 길’을 물려받습니다.



삼척으로 돌아온 모든 연어들이 한 번 쉬고 올라가던 그 못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 최적의 자연의 늪을 불도저와 삽을 동원해서 메워 버리고 그 위에 테니스장을 설치했다. (284쪽)


사랑하는 길은 자연 속에 저들을 가만히 두는 일뿐이다. 저 물빛들을 사랑하다가 오히려 생명을 다칠 것이다. (363쪽)



  《은빛 물고기》를 읽으면서 우리 마을 샘터랑 빨래터를 헤아립니다. 열 몇 해 앞서까지 이 샘터에서 물을 긷고 이 빨래터에서 빨래를 했다는데, 이제 이 샘터나 빨래터는 흙일을 마친 연장을 씻는 노릇을 합니다. 가문 날에는 물을 뽑아내는 노릇을 합니다. 농약을 칠 적에는 농약에 물을 섞으려고 호스를 길게 이어서 빨래터에 꽂습니다.


  빨래를 하지 않는 빨래터에는 물이끼가 낍니다. 물을 긷지 않는 샘터에도 물이끼가 낍니다. 그렇지만 이 샘터와 빨래터에는 다슬기가 살아요. 다슬기는 깨끗한 물살에 깃들어 살몃살몃 춤을 추듯 기어다닙니다. 개똥벌레는 이 다슬기를 먹이로 삼아서 살지요.


  나는 아이들하고 한 달에 두세 차례씩 마을 어귀 빨래터하고 샘터를 치웁니다. 이때에 다슬기는 고스란히 살립니다. 봄에 깨어날 개똥벌레 애벌레가 이 다슬기를 먹고 자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빨래터 둘레에는 흙이 없으니 개똥벌레가 살 수 없지만, 빨래터를 치우는 동안 다슬기가 물살을 따라 흘러가서 이웃 논도랑으로 가면, 그곳에서 깨어날 개똥벌레가 다슬기를 만나겠지요.



백자가 알의 배꼽으로 들어가면 입을 완벽하게 닫아 거는 알들은 그때부터 생기를 머금고 단단해지며 팽창하는 듯하다가 멈춰서 수정알처럼 빛난다. 수정란들이 붙은 돌은 반석의 든든하고 포근한 요람이다. (370쪽)


꿈이 되지 않는 것들은 죽지 못한다. 생명들은 생명을 낳고 죽는다. 생명을 낳는 것들은 그 전 생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물과 같은 부드러운 꿈들이었다. (399쪽)



  마을사람이 개울에 엎드려 입을 대고 물을 먹던 나날, 은빛 물고기는 은빛 춤을 추면서 냇물을 거슬러 올랐습니다. 마을사람이 개울에 엎드릴 수 없는 오늘날, 은빛 물고기가 은빛 춤을 추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더욱이 지난 몇 해 사이에 이 나라 거의 모든 냇물은 시멘트더미로 탈바꿈했습니다. 커다란 물줄기뿐 아니라 시골마을 작은 물줄기에다가 골짜기 물줄기까지 시멘트더미를 품에 안아야 했습니다.


  시멘트더미가 물줄기와 냇바닥을 뒤덮은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은빛 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시멘트를 찬양하거나 노래하는 글은 나올 테고, 시멘트길을 따라 자전거나 자동차를 달리다가 ‘인증 사진’ 찍는 놀이는 할 수 있을 테지만, 이제 《은빛 물고기》 같은 이야기를 써 내려 갈 만한 시인은 나오기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다람쥐 이야기를 누가 쓸 만할까요? 송사리 이야기를 누가 쓸 만할까요? 딱새나 제비 이야기를 누가 쓸 만할까요? 큰빗이끼벌레 이야기 말고 눈부신 모래밭을 밟으면서 반짝이는 물빛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누가 쓸 만할까요?


  모래밭도 맑은 냇물도 물고기도 숲도 나무도 들꽃도 사라지고 온통 시멘트더미와 커다란 시멘트집만 덩그러니 남은 온 나라 물줄기에서 어떤 이야기가 태어날 만할까요? 고형렬 시인이 쓴 《은빛 물고기》는 고운 손길을 받아서 새롭게 옷을 입고 우리 곁에 태어납니다. 살가운 이야기책은 언제라도 이렇게 다시 태어나는데, 살가운 우리 이웃은, 숲이웃은, 냇물이웃은, 바다이웃은, 언제쯤 우리 곁에 고운 눈망울과 숨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2016.2.2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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