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시선 394
송경동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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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12



노래 한 가락에 이빨 넉 대 나간 시인은

―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송경동 글

 창비 펴냄, 2016.2.22. 8000원



  바야흐로 봄볕이 무르익습니다.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우리 집이 깃든 전남 고흥은 봄볕이 무척 따사롭기에 어른도 아이도 신나게 일하거나 놀 만합니다. 나는 뒤꼍에 어떤 씨앗이나 나무를 심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땅을 밟습니다. 아이들은 두껍고 긴 옷가지가 덥다면서 개구지게 뛰어놉니다. 어느덧 트랙터를 몰고 논을 갈아엎는 이웃 할배가 있습니다.


  봄은 달력이 아닌 햇볕으로 찾아듭니다. 봄은 날씨를 알려주는 방송이 아니라 바람으로 찾아듭니다. 봄은 숫자로 ‘3’월이 아니라 쏙쏙 돋는 쑥내음으로 찾아듭니다. 어제 처음으로 쑥국을 끓였더니 큰아이는 쑥부침개를 먹고 싶다고 밥상맡에서 노래합니다. “얘야, 쑥부침개를 먹으려면 쑥이 얼마나 자라야 할까?” “몰라.” “모르니? 그러면 뒤꼍에 가서 쑥이 얼마나 돋았는지 보렴. 쑥부침개를 먹으려면 소쿠리 가득 쑥을 뜯을 수 있어야 한단다.”



내가 죽어서라도 세상이 바뀌면 좋겠다며 / 내어줄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 노동자들이 목숨을 놓을 때마다 // 죽음을 이용하지 말라고 / 보수언론들이 이야기한다 (고귀한 유산)


어디선가 빌려와 / 언젠간 돌려보내줘야 할 / 딴 나라 사람 같던 / 어머니 // 가장 가깝고도 머나먼 / 소라와 조개가 많이 난다는 나라 / 어머니의 그 나라말을 / 우리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어머니의 나라말)



  노동자하고 벗님이 되는 시인 송경동 님이 새로 선보인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창비,2016)를 읽습니다. 전남 벌교에서 나고 자란 송경동 님을 가리킬 적에는 ‘그냥 시인’이 아닌 ‘노동자하고 벗님하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쓰곤 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참말 송경동 님은 그냥 시만 쓰는 시인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를 읽으면 이녁 곁님 이야기가 살짝 나옵니다. 집안일하고 아이키우기는 곁님이 도맡는다고 해요. 집에서 곁님이 집살림하고 아이를 알뜰히 돌보는 힘을 바탕으로 송경동 님은 집 바깥에서 숱한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살림을 지을 수 있습니다. 든든한 보금자리가 있기에 언제나 씩씩하게 기운을 내어 ‘여린 이웃’한테 손을 내밀 수 있고, ‘아픈 동무’하고 어깨를 겯을 수 있어요.



탈근대, 탈영토, 탈식민지, 탈구조화…… / 탈이라면 이런 것들만 생각해왔는데 / 오늘은 탈곡기로 콩 터는 일을 돕는다 (다른 서사)


비 피하러 들어간 자재창고 후미진 구석에 박혀 / 쓸쓸한 노래 한곡을 부르는데 / 창고장이 웬 청승이냐고 나가라 했다 / 너무 야박하지 않으냐고 돌아서는데 뒷골이 띵 / 쓰러졌다 일어나는데 다시 앞에서 풀스윙 / 코 옆에서 입술까지 너덜너덜 찢어지고 / 이빨 넉대가 산산조각이 났다 / 노래 한곡 값이었다 (그 노래들이 잊히지 않는다)



  ‘시인 송경동’이 아닌 ‘노동자 송경동’으로 살던 무렵, 송경동 님은 온몸으로 아프면서 고된 일을 으레 겪었다고 합니다. 비가 오는 날 노래 한 가락을 뽑았다가 드센 주먹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이빨 넉 대가 나갔다고 합니다. ‘노동자 송경동’에서 ‘시인 송경동’으로 거듭난 뒤에, ‘노동자하고 벗님하는 시인’으로 살아가니, 한꺼번에 여섯 가지 소환장이 집으로 날아오기도 한다고 합니다.


  노동자 송경동은 노래 한 가락 뽑았다고 이빨이 넉 대가 나가야 했고, 시인 송경동은 노동자하고 벗님하는 살림을 지었다고 법원에서 벌금 삼백만 원을 내야 했다고 합니다. 〈시인과 죄수〉라는 시를 보면, 어느 날 서울중앙법원 재판정에 서야 했는데, 집시법이나 여러 법으로 얽혀 벌금 삼백만 원 선고를 받았고, 그날 낮에는 천상병시문학상을 받으면서 덤으로 상금을 오백만 원 받아서 겨우 벌금을 메우면서 살림에 보탤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시를 더 보면, 신동엽문학상을 받는다는 얘기를 들은 날 낮에는 체포영장이 나왔다는 “벅찬 소식”까지 함께 들었다고 합니다.



“○○씨랑은 어떤 관계죠?” / “진술하지 않겠습니다” / 나의 청춘을 / 나의 거리를 / 나의 고뇌를 / 결코 말하지 않겠습니다 (진술을 거부하겠습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 중국과 인도네시아로 공장을 이전하며 위장폐업한 / 기타 만드는 콜트-콜텍 노동자들 복직을 요구하는 /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시인 송경동은 그악스럽거나 무시무시한 사람이라도 될까 궁금합니다. 왜 시인 한 사람은 재판정에 서서 선고를 받아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왜 시인 한 사람은 자꾸 경찰서로 불려 가서 진술서를 써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왜 시인 한 사람한테 자꾸 벌금을 물리고, 이녁을 감옥에 가두려 하는지 궁금합니다.

  이 궁금함은 아주 쉽게 풀 만하다고 느낍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요즈막 정부는 ‘테러방지법’을 세우겠다면서 온힘을 쏟기 때문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살림 걱정을 하지 않도록 북돋우는 정책이 아니라, 테러방지법 같은 정책에 온힘을 쏟겠다는 정부 권력이에요.


  시인 한 사람은, 노동자였던 시인 한 사람은, 노동자하고 벗님하는 시인 한 사람은, 곁님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시인 한 사람은, 시골바람을 마시면서 투박하게 자란 시인 한 사람은, 대단하거나 놀라운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작고 작은 시인 한 사람은 오직 하나를 조그맣게 바랍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한국저작권위원회에서 / 저작권 관련 글을 한편 써달라는데 / 나는 누구의 삶을 팔아 얼마를 챙긴 것일까 / 가사와 육아를 전담해온 / 아내의 저작권은 몇 퍼센트일까 (저작권)



  사랑이 흐를 수 있는 삶터가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이 흐를 수 있는 삶터일 때에 평화롭습니다. 사랑이 흘러서 평화로울 수 있는 삶터일 때에 평등합니다. 사랑이 흘러 평화롭고 평등한 삶터일 수 있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사랑이 흘러 평화롭고 평등하여 아름다운 삶터일 수 있을 때에 서로 어깨동무하는 기쁜 살림을 지을 만합니다.


  논갈이를 하는 시골 할배나 아재는 방송이나 신문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봄볕을 읽고 봄바람을 읽을 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고작 5퍼센트가 될랑 말랑 하는 시골지기는 서울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잘 모르고, 알 길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시골지기는 이 새로운 봄에 새롭게 흙을 일구어 봄맞이를 합니다.


  삶을 사랑하기에 흙을 만지면서 씨앗을 심습니다. 이 씨앗에 싹이 트고 줄기가 올라 꽃이 피면, 온누리에 아름다운 숨결이 퍼져요. 씨앗 한 톨에서 핀 꽃이 지고 열매가 익을 무렵이면, 온누리에 사랑스러운 바람이 불지요. 씨앗 한 톨에서 맺은 꽃이 지고 열매가 맺은 뒤에 갈무리를 할 즈음이면, 온누리에 넉넉한 이야기가 흐릅니다. 가을걷이는 고된 일이면서 기쁨이 가득한 노래이거든요.



국회에서 맺은 합의서도 종잇조각 / 천억대 회사를 육천만원짜리로 빼돌린 배임도 무혐의 / 노동자를 버리고 떠난 야반도주는 합법 / 백주대낮 회장 집 방문은 주거침입 (기륭과 보낸 십년)



  노래 한 가락에 이빨 넉 대 나간 시인은 사랑을 노래하려는 꿈으로 시를 짓습니다. 작은 시가 모여서 작은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가 태어납니다. 이 작은 시집에서 송경동 님은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하는 말을 자꾸 읊습니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 송경동 님 같은 사람은 ‘한국사람이 아니다’라는 딱지가 붙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송경동 님이 벗님으로 삼는 노동자는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나 공무원까지, 이런 분들은 모두 ‘권력자’가 아니라 ‘심부름꾼’이어야 옳지 싶습니다. 정치와 행정을 맡는 분들은 ‘수수한 사람들 살림살이’를 북돋우고 돌보며 아낄 수 있는 사랑스러운 손길로 일을 하는 마음일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수수한 사람들한테 참다운 평화를 북돋우는 정책을 마련해서 이끌 적에 비로소 ‘정치 심부름꾼’이지 싶습니다. 집시법이 아니라 헌법을 헤아리면서 나라살림을 바라볼 적에 비로소 ‘행정 심부름꾼’이지 싶습니다.


  새봄에 서울 국회나 청와대 언저리에 계신 분들을 시골로 부르고 싶습니다. 바쁘고 어수선한 서울을 이 봄에 살짝 벗어나서 시골로 와 보셔요. 시골에는 군대도 탱크도 없어도 평화로워요. 시골에는 전쟁무기도 전투경찰도 그냥 경찰도 없어도 사건이나 사고가 없어요. 시골에는 이 봄에 흙을 만지면서 새하고 노래하고 쑥이랑 나물을 뜯는 기쁨을 누려요.


  노동자와 벗님하는 시인 한 사람이 이녁 고향인 벌교 시골마을에서 탈곡기로 콩을 탈탈 털면서 사랑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아늑하게 지을 수 있는 꿈을 부디 기쁘게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를 고요히 덮습니다. 모든 사랑스러운 꿈은 머잖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랑스러운 꿈이기에 이룰 수 있어요. 2016.2.28.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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