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소와 작은 유산들 - 김지연 사진집
김지연 사진 / 눈빛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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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빈 방에 서다>는 서울과 대구에 있는 작은 마을책방에서만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이라는 책에 이 느낌글(사진비평)을 붙입니다. <빈 방에 서다>뿐 아니라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도 널리 사랑받을 수 있기를 빌어요.


서울 : 책방 치읓(ㅊ) + 테이크아웃드로잉, 유어마인드, 더북소사이어티, 스토리지북앤필름, 비엥북스, 땡스북스
대구 : 더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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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03



‘보금자리’하고 ‘낡고 빈 집’ 사이

― 빈 방에 서다

 김지연 사진

 사월의눈 펴냄, 2015.10.16. 29000원



  제가 큰아이를 낳은 곳은 인천이고, 이무렵 우리 식구가 살던 집은 4층 건물 옥탑이었는데, 1955년에 지었다고 했습니다. 이 4층 건물은 아직 그곳에 그대로 있습니다. 용케 안 헐렸다고 할 수 있지만, 제법 튼튼하게 지었으니 버티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집은 기찻길하고 맞닿은 터라, 인천하고 서울 사이를 오가는 전철이 지나갈 때면 덜덜 떨려요. 전철이 서너 대(여느 전철과 빠른 전철)가 겹쳐서 지나갈 때면 떨림과 소리가 대단했습니다.


  오늘 우리 식구가 사는 집은 전남 고흥 시골에 있습니다. 이 집은 언제 지었는 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른 시골집도 이와 비슷한데, 시골에서는 집을 짓고도 면내나 읍내에 신고를 안 하기 일쑤라 건축대장에 없습니다. 전기를 쓸 적에는 한국전력에 신고해야 하기에 전기를 처음 쓴 때는 알 수 있으니, 우리 식구가 사는 이 시골집은 1986년 7월부터 전기를 썼다고 나와요. 마을 어르신들 말씀을 들으면 이 집에서 살았다는 분이 여럿 계십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꽤 오래된 집이로구나 싶습니다.



사람이 모두 떠나버리고 없는 빈집, 빈방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흡사 관에 들어가는 것 같은 서늘함을 느껴야 했다. (작가 이야기)



  “낡은 방”하고 “빈 방에 서다”가 어우러진 사진책 《빈 방에 서다》(사월의눈,2015)를 읽으면서 집이란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헤아립니다. 이 사진책을 선보인 김지연 님은 전북 전주에서 서학동사진관을 꾸립니다. 《빈 방에 서다》에 나오는 ‘집’은 두 가지로, 하나는 그저 낡고 작은 방이 있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더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집입니다.


  아직 멀쩡하거나 깨끗해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차츰 스러집니다. 빈집이 되면 이 집에는 따스한 기운이 사라지는 터라, 아무도 없으나 천장이 주저앉고 비도 새기 마련입니다. 빈집을 따로 돌보는 사람도 없고, 빈집에 불을 때는 사람도 없으니, 이 빈집은 쓸쓸하게 남다가 어느새 흙으로 돌아갑니다. 시골에서는 집을 흙이랑 나무랑 돌로 지으니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지요.


  도시에서는 아직 멀쩡하거나 깨끗한 집이어도 재개발을 한다면서 허뭅니다. 더 오래 살고 싶어도, 따스한 보금자리로 여기면서 알뜰살뜰 아끼고 싶어도, 이러한 집이요 보금자리요 삶터를 하루 아침에 빼앗기기 일쑤입니다. 도시에서는 돈을 앞에 내세우면 그 어느 것도 이 돈을 이기거나 견디지 못해요. 재개발을 하면 돈이 떨어진다 하고, 재개발을 해야 돈이 된다 하며, 재개발을 하기에 돈을 잘 번다고 하지요.



어느 날 산꼭대기 빈집에 들어섰다. 들어서는 현관에 빈 소주병이 뒹굴고 있었다. (작가 이야기)






  사진책 《빈 방에 서다》는 낡거나 빈 집에 선 사진가 눈길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낡거나 빈 집은 참말 말 그대로 ‘낡’거나 ‘빈’ 집입니다. 그러나, 낡은 집이든 빈 집이든, 오랫동안 사람 살던 곳이요, 사람 살던 자국이 흐르는 곳이요, 사람 살던 이야기가 머물던 곳입니다.


  어린이가 그린 그림이 한쪽 벽에 있습니다. 달력과 사진이 한쪽 벽에 있습니다. 때로는 편지가 벽에 붙고, 때로는 무언가를 적은 쪽종이가 벽에 붙어요. 빈틈이 하나도 없이 벽종이를 바른 낡은 방이 있고, 오랜 나날 묵은 때가 깃든 방이 있습니다. 발신자번호 따위는 뜨지 않는 낡은 전화기가 방 한켠에 얌전히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진책 《빈 방에 서다》에 나오는 집은 문을 살그마니 열면 들이나 숲이 보이는 자리에 있구나 싶습니다. 방에서 문만 빼꼼 열어도 바람이 훅 불지요. 여름에는 더운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요. 여름에는 빗물 묻은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눈송이 날리는 바람이 불어요.


  텃밭에 심은 남새에서 풀내음이 흐릅니다. 마당에 선 나무에서 잎내음이 흐르다가, 바람 따라 춤을 추는 잎노래가 흐릅니다. 젊은 날 낳아서 돌본 딸아들은 훌쩍 자라서 도시로 떠났습니다. 도시로 떠난 딸아들은 설이나 한가위가 아니면 고개를 내밀지 않습니다. 한 해 거의 모두 조그맣고 조용한 집에서 늙은 할매와 할배가 온 하루를 보냅니다. 방에 홀로 있기보다는 밭에라도 가고, 아니 방에 홀로 있지 않고 밭으로 가며, 옷을 정갈히 차려입고 읍내 저잣거리로 마실을 갑니다.



어제 사진 찍고 간 빈집이 오늘 헐리는 것을 보는 일은 충격이었다. 건물을 제거하는 것은 사람의 기억과 인격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작가 이야기)



  예부터 집을 지을 적에는 먼저 숲을 가꾸었습니다. 예부터 어느 집이건 나무를 기둥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우람하게 잘 자라서 튼튼한 줄기가 멋스러운 나무가 있어야 기둥으로 삼아서 집을 지어요.


  이백 해를 자란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면, 이 집은 이백 해를 간다고 합니다. 사백 해를 자란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면, 이 집은 사백 해를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 해를 자란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면, 천 해도 가고 다시 천 해를 더 갈 수 있다고도 해요.


  오늘은 그저 ‘낡은 집’이거나 ‘빈 집’으로 보일는지 모르나, 이 모든 낡거나 빈 집은 하루 아침에 지은 집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백 해는 자란 나무를 베어서 지은 집입니다. 못해도 백 해는 더 자란 나무를 베어서 지은 집이요, 웬만하면 삼백 해나 사백 해는 너끈히 자라던 나무를 베어서 지은 집이에요.


  삼백 해를 자라던 나무를 베어서 지은 집이라면, 이 집은 삼백 해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이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만한 집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오늘은 낡은 집이 되어 헐리더라도, 비록 오늘은 빈 집이 되어 조용히 스러지더라도, 비록 오늘은 아무도 안 찾는 외딴 집 쓸쓸한 자리가 되더라도, 이 집에 깃든 노래와 숨결과 웃음과 눈물과 이야기는 애틋하면서 사랑스럽습니다. 이리하여, 사진책 《빈 방에 서다》를 선보인 김지연 님은 바로 이 애틋하면서 사랑스러운 눈길로 마음을 달래면서 한 장 두 장 사진을 찍고, 책으로 꾸려서, 우리한테 다소곳하게 내밉니다.



어느 초여름, 그 빈집 앞에는 유채꽃과 황매화가 만발하고 있었다. (작가 이야기)








  하루 아침(은 아니고 한두 해)에 우지끈 뚝딱 시멘트로 때려집은 집이라고 해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멘트로 이루어진 아파트숲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곳이든 모두 집이요 보금자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시골집이든 도시 아파트이든, 사랑이 흐르고 이야기가 흐를 때에 집이 되고 보금자리가 되리라 느낍니다.


  천 해 된 나무를 베어서 지은 시골집이어도 사랑이 흐르지 않으면 ‘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멋쩍습니다. 오백 해가 된 나무를 베어서 지은 멋스러운 기와집이어도 이야기가 노래처럼 흐르지 않으면 ‘보금자리’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려워요.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집살림을 곱게 건사하면서 알뜰살뜰 사랑스러운 손길로 돌보는 사람들은 이곳을 아름다운 보금자리로 거듭나도록 북돋웁니다. 오늘은 비고 만 집이어도 유채꽃이 피고 냉이꽃이 핍니다. 어제도 비고 오늘뿐 아니라 모레도 비고 말 집이어도 민들레꽃이 피고 쑥꽃이 핍니다.


  텅텅 비어 사람 그림자가 안 보이는 집이기에 ‘낡거나 빈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사람 발자국이 없을 뿐, 이곳은 ‘꽃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마다 새로운 꽃이 흐드러지니 꽃집이에요. 마당에 감나무가 있으면 감나무집이라 할 수 있고, 마당에 배나무가 있으면 배나무집이라 할 수 있어요. 바다를 내다보는 ‘바닷집’이라든지, 멧골에 깃든 ‘멧집’이 될 수 있습니다.


  빈 방 앞에 선, 또 낡은 방 앞에 선 김지연 님은 무엇을 보았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빈 곳과 낡은 곳 앞에 선 김지연 님은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둘러보면서 사진 한 장 찍었을까 하고 되새깁니다. 오늘 언뜻 보기에 낡았기에 빨리 허물어서 번듯한 시멘트집이나 아파트로 바꾸어야 하지 않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보아하니 텅 빈 집이기에 얼른 치우거나 밀어내야 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곳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새롭게 살도록 할 집이요 보금자리입니다. 집을 짓는 마음은 삶을 사랑하는 마음일 때에 아름답고, 보금자리를 가꾸는 마음은 사람을 사랑하는 숨결일 때에 싱그럽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집살림을 물려받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어른으로 자랄 아이들은 이 집을 물려받아 한결 이쁘장한 보금자리로 가꿀 수 있고, 다른 터에 새로운 집을 지어 그야말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집자리가 보금자리인 까닭은, 집을 지어서 살림을 이룰 적에 사랑을 꽃피우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곧, 집자리는 보금자리이면서 사랑자리요, 이야기자리이고, 노래자리이자 꿈자리입니다. 웃음자리이고, 꽃이 피는 자리이며, 삶이 기쁘게 흐르는 자리, 바로 삶자리입니다. 사진은 언제나 삶자리에서 태어나고, 사랑자리에서 자랍니다. 사진책 한 권은 이 삶자리에서 사랑을 가꾸며 웃음과 꿈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하면서 빚습니다. 4348.11.15.해.ㅅㄴㄹ


(글에 붙인 사진은 사진가 김지연 님한테서 고맙게 받았습니다.)

(최종규/숲노래 . 2016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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