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바퀴, 언어 - 유라시아 초원의 청동기 기마인은 어떻게 근대 세계를 형성했나
데이비드 W. 앤서니 지음, 공원국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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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5000년 뒤를 생각해 본다면

― 말, 바퀴, 언어

 데이비드 W. 앤서니 글

 공원국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2015.11.20. 4만 원



  데이비드 앤서니 님이 빚은 인문책 《말, 바퀴, 언어》는 오천 해라는 발자국을 가로지르면서 이야기를 엮으려고 하는 땀방울을 알뜰히 보여줍니다. 지난 오천 해에 걸쳐서 이 지구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어떠한 살림을 가꾸고 어떠한 삶을 지으면서 ‘살림·삶’을 ‘문화’로 일구었는가 하는 대목을 알아내려고 합니다.


  쉬운 일일까요? 조금도 안 쉽다고 할 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2000년대를 사는 사람들한테 기원전 3000년대 살림살이나 삶이란 너무 먼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무렵에는 숲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고, 그무렵에는 햇볕이나 바람이 오늘날하고 어떻게 달랐는지 알 수 없으며, 그무렵에는 어떤 생각을 어떤 말로 나타냈는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말들이 정말로 약 5000년 전 사람들이 쓰던 어휘의 화석일까? (14쪽)


음의 변화가 규칙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마도 모든 인간이 본능적으로 언어 안에서 질서를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의 뇌에 내장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41쪽)



  《말, 바퀴, 언어》라는 책이 아니더라도, 오늘 2000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한 가지를 헤아려 볼 만합니다. 앞으로 오천 해가 지난 7000년대라고 하는 때를 살아갈 먼 뒷날 사람들한테는 오늘 우리가 여기에서 일구는 2000년대 ‘문화’는 그야말로 동떨어지거나 아스라한 옛날 옛적 이야기가 될 테지요. 앞으로 오천 해쯤 뒤에 이 지구별에 태어나서 살아갈 사람들은 아주 다른 말을 쓸 테고, 아주 다른 살림살이와 삶이 되겠지요.


  오천 해 뒤가 아닌 오백 해 뒤만 헤아리더라도, 앞으로 오백 해 뒤에 이 지구별에 태어나서 살 사람들은 ‘석유 문명’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오백 해 뒤만 되더라도 ‘원자력 발전’은 안 쓰리라 생각합니다. 오백 해 뒤만 되더라도 전쟁무기와 군대하고 얽힌 실타래도 무척 다르게 풀리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현대 문명이나 문화는 거의 하루가 다르다 할 만큼 빠르게 바뀌거나 거듭나거나 새로워지니까요.



바퀴가 끼친 충격파의 명백한 증거는 네 바퀴 수레 기술의 전파 속도였다. 사실 너무나 빨리 전파되어 우리는 어디서 바퀴-축의 원리를 발명했는지조차 말할 수 없다. (112쪽)


길들인 소와 양은 인간이 흑해-카스피해 초원의 환경을 이용하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소와 양은 사람처럼 길러졌기 때문에 야생 동물을 대할 때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상의 노동 및 걱정거리의 일부가 되었다. (206쪽)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앞으로 한두 세대 뒤만 되더라도 오늘날하고 아주 달라질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대목을 엿볼 수 있습니다. 2010년대 한국 사회를 보면 ‘도시 거주민’이 90퍼센트를 웃돌고 ‘농업 인구’는 5퍼센트가 될 동 말 동합니다. 고작 5퍼센트 ‘농업 인구’가 95퍼센트를 먹여살리는 얼거리입니다. 이러니 한국에서 웬만한 곡식이나 열매는 이웃나라에서 사들일 수밖에 없지요.


  이런 ‘식량 수입 문명’은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까요? 영화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참말로 머잖아 ‘국가 계획 통제 정책’이 생겨서 ‘강제 농업 종사 인구’가 늘어나지는 않을까요? 머잖아 ‘식량 수입’은 꿈도 꿀 수 없는 사회가 되고 말아 지구별 모든 나라는 다른 어느 대목보다 ‘농업 인구’를 다시 늘리려는 길로 돌아서지 않을까요? 석유를 태워서 쓰는 문명이 저물 즈음에는 이러한 흐름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오천 해 뒤 역사나 문화라든지, 오백 해 뒤 역사나 문화뿐 아니라, 고작 쉰 해 뒤에 찾아올 역사나 문화마저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2010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2060년대에 어떤 일이 생길는지조차 도무지 내다보지 못하니까요.



장거리 교역, 선물 교환 그리고 대중적 희생제와 연희를 요구하는 새로운 숭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권력의 기반이 되었다. (282쪽)


우리는 네 바퀴 수레가 정확히 언제 처음 유라시아 초원으로 굴러들어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폴란드 남부 브로노치체에서 나온 점토 잔 위에 찍힌 네 바퀴 수레 이미지의 연도는 확실히 서기전 3500∼서기전 3300년으로 정해졌다. (451쪽)



  1960년대를 살던 사람으로서는 2010년대에 이렇게 ‘스마트폰과 인터넷 문화’가 퍼질 줄 알기 어려웠겠지요. 게다가 2010년대를 사는 우리가 쓰는 ‘말·글’은 1960년대 사람들이 쓰던 ‘말·글’하고 무척 달라요. 인문책 《말, 바퀴, 언어》는 오천 해라는 흐름을 가로지르면서 ‘인도·유럽 공통조어’가 어떻게 퍼지거나 태어나거나 바뀌었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합니다. 이런 고고학 연구나 언어학 연구를 하면서 되살린 ‘오랜 인도·유럽 공통조어’ 말소리(옛 음운)는 1500 가지 즈음 된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과 인도와 터키와 몽골 언저리에서 태어난 문화와 문명을 살피지요.


  그런데 실타래를 풀고 실마리를 찾으려고 해도 안개에 갇힌 대목이 훨씬 많습니다. 1500 가지에 이르는 말소리는 되살렸어도 오천 해 앞서 살던 사람들이 쓰던 말은 ‘천오백 가지’가 아닙니다. 오천 해 앞서 살던 사람들이 ‘뜯거나 다룬 풀이나 나무’만 하더라도 수백 가지가 넘을 테고, 그무렵 사람들이 집을 짓고 옷을 지으며 밥을 지으며 쓰던 말만 하더라도 수백 가지뿐 아니라 수천 가지가 될 테지요. 생각을 나누고 사랑을 북돋우며 꿈을 키우면서 주고받은 말을 헤아리면 얼마나 많은 말을 널리 썼을까요?



학자들은 초원의 전차가 훌륭한 전쟁 수단이었는지, 혹은 단지 행진이나 의례에서 쓰는 상징적 수레로서 우수한 근동의 진품을 조잡하게 모방한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서로 다르다. (571쪽)


말은 값싼 겨울용 고기 공급원이었다. 왜냐하면 소나 양은 겨울 동안 꼴과 물을 제공해야 하지만 말은 겨울 초원을 돌아다니며 스스로 먹고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650쪽)



  땅속에 파묻힌 유물을 캐내면서 오천 해 발자취를 돌아보는 일은 아주 작은 조각을 매만지면서 아주 조그마한 그림을 그리는 몸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수레’를 누가 먼저 지어냈는지 알 길이 없고, ‘말’은 누가 먼저 썼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들판을 달리는 짐승을 누가 먼저 길들였는지도 알 길조차 없으며, 말고기이든 양고기이든 소고기이든 누가 먼저 먹었는지마저도 밝힐 길이 없어요. 이런 대목을 놓고 역사나 문화로 이야기하자면 ‘여러 곳에서 한꺼번에(동시다발)’라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말, 바퀴, 언어》를 쓴 데이비드 앤서니 님은 고고학 유물자료를 꼼꼼히 살피고 유럽 학자들이 갈무리한 언어학 보고서를 찬찬히 헤아리면서 ‘유럽을 둘러싼 문화와 문명’이 오천 해 앞서 어떤 모습이었는가 하는 그림을 그리려고 합니다. ‘여러 곳에서 한꺼번에’ 생긴 낱말(말소리)이요 수레요 말고기였다고 하더라도, 한꺼번에 생긴 ‘여러 곳’이 어디인가를 밝히려 합니다. 마냥 수수께끼로만 남길 수 없다고 여기는 지구별 문화와 문명을 새롭게 읽으려고 합니다.



목조 구조물은 불에 탐으로써 보존되고, 쓰레기 구덩이는 신전이나 궁전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금속의 부식은 함께 묻힌 섬유를 보존한다. 그러나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것은 바로 보이지도 않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우리 말의 음성 속에다 우리는 미래 세대 언어학자를 위해 현재 세계의 수많은 세부 정보를 간직해 놓는다는 사실이다. (660쪽)



  오천 해를 가로지르는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기는 무척 어렵다고 합니다. 아마 오만 해에 이르는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연구나 학문을 하려고 든다고 여길 수 있을 테지요. 어느 모로 본다면 부질없는 몸짓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 바퀴, 언어》를 쓴 데이비드 앤서니 님은 이렇게 오천 해 발자취를 오래도록 돌아보면서 시나브로 깨달은 한 가지 이야기를 차분히 들려줍니다.


  먼저, 고고학은 ‘신전이나 궁전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쓰레기 구덩이’를 다칠세라 깨질세라 알뜰살뜰 캐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어학은 ‘옛말 자취는 오늘날 말에서 몽땅 사라졌어도, 아스라히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주고받은 정보(삶과 살림)는 고요히 깃든다’고 해요.


  2000년대에 오늘 우리가 쓰는 살림살이는 ‘쓰레기 매립지’에 파묻힐 텐데, 오천 해 뒤에는 어쩌면 ‘대단한 유물 구덩이’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2000년대 오늘 우리가 쓰는 말(낱말, 말소리)은 뿌리를 잊거나 잃은 채 흔들린다고 할 만하지만, 바로 이러한 말에도 한식구와 이웃과 동무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돌보는 살림살이와 삶을 고스란히 담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말마디를 물려받으면서 새로운 삶을 짓습니다.


  까마득한 일이라고 할 테지만, 오천 해 뒤인 ‘칠천년대를 살 뒷사람’이 오늘(2000년대) 우리한테서 아름다운 꿈·삶·넋을 ‘쓰레기 매립지(유물 구덩이)’하고 ‘말(낱말, 말소리)’ 사이에서 기쁘게 캐낼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4349.1.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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