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자전거 삶노래 2015.11.9.

 : 우중충 하늘과 빈들



길이 좁은 가을이 끝나고, 길이 넓은 가을이 된다. 가실(가을걷이)도 다 끝났고, 길에 나락을 널어 말리던 일도 끝났다. 새삼스레 널찍한 시골길을 달린다. 하늘은 구름이 가득하다. 시월 한 달에는 비가 이틀만 살짝 내렸고, 십일월로 접어든 뒤에도 비가 며칠 안 내렸다. 가을 가뭄이라 할 수도 있고, 가을일을 다 마치도록 빗줄기가 들지 않아서 고마운 하늘이라 할 수도 있다.


이제 겨울이 코앞이다. 볕이 드는 날은 포근하지만, 볕이 들지 않거나 구름이 짙거나 바람이 불면 쌀쌀하다. 샛자전거에 앉는 큰아이는 장갑을 낀다. 수레에 앉는 작은아이는 턱 밑까지 겉옷을 뒤집어씌운다.


발판을 천천히 굴린다. 차갑지만 싱그러운 늦가을 바람을 쐬면서 들길을 달린다. 까마귀떼가 꽤 우렁찬 소리로 운다. 여느 때에도 까마귀를 보지만 겨울을 앞둔 늦가을이면 까마귀가 무리를 지어서 다닌다. 까마귀가 무리를 짓는 이즈음에는 까치도 무리를 짓는다. 까마귀떼와 까치떼는 곧잘 맞붙는데 어느 쪽이 이기거나 지는지는 잘 모른다. 두 새떼가 맞붙어 뒤엉킬 적에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시끄러우면서 하늘이 까맣다.


이 까마귀는 그동안 어디에서 살다가 이렇게 무리를 지을까. 무리를 짓는 까마귀는 밤에 잘 적에도 함께 모일까. 까마귀는 숲에서 밤을 지새운 뒤 아침이면 온 마을을 두루 돌면서 먹이를 찾을까. 전깃줄에 무리지어 앉은 까마귀는 자전거가 지나가자 하나둘 날아서 다른 곳으로 간다.


면소재지로 접어들어 우체국에 닿을 무렵 군내버스가 우리 뒤에서 지나간다.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 버스를 만났다.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 버스이니, 이 버스를 만나는 날은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군내버스 꽁무니를 사진으로 한 번 찍는다.


우체국에 자전거를 대려는데, 이런저런 자동차가 아무렇게나 선 바람에 자전거를 대기 쉽지 않다. 시골 우체국이라 도시와 달리 손님이 드물다지만, 자동차를 세울 적에는 한쪽에 알맞게 댈 노릇이 아닐는지. 고작 자동차 두어 대라 하더라도 우체국 마당에 아무렇게나 세우면 자전거가 들어설 자리가 안 생기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시골은 도시보다 ‘아무렇게 세우기(무단주차)’가 아주 흔하다. 읍내를 보면 그야말로 엉터리라고 할 만하다. 고작 두찻길(이차선)인 읍내인데, 이쪽과 저쪽 모두 차를 대는 사람들이 많다. 이리하여, 두찻길밖에 안 되는 읍내 찻길은 버스도 다른 자동차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기 일쑤이다. 자동차를 모는 이들은 1미터 걷기도 싫어하거나 두려운 듯하다.


우체국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호덕마을 앞에 있는 자작나무를 새삼스레 바라본다. 읍내로 가면서 바라보는 빛결하고 읍내에서 나오며 바라보는 빛결이 사뭇 다르다. 이쪽에서 보는 모습하고 저쪽에서 보는 모습이 새롭다. 여덟 살 큰아이한테 저 나무는 이름이 ‘자작나무’라 한다고 알려주지만, 큰아이는 그냥 ‘하얀나무’라고만 한다. 오늘도 “아버지 저기 봐요! 하얀나무가 더 하얘졌어!” 하고 외친다.


줄기가 하얗게 보이니 ‘하얀나무’라고도 할 만하다. 아이 나름대로 재미나게 지은 이름이다. 게다가 늘푸른나무와 떨잎나무 사이에 오직 한 그루만 있는 하얀 빛깔 나무이니 더욱 도드라진다. 봄이며 여름에는 푸른 잎사귀에 가려서 하얀 빛깔이 잘 안 드러나지만, 잎이 모두 떨어진 늦가을에는 나뭇줄기가 멀리에서도 잘 보인다.


작은아이는 수레에서 잠든다. 바람이 세기에 자전거를 멈춘다. 작은아이가 바람을 맞지 않도록 옷깃을 여미기로 한다. 큰아이가 이 일을 해 준다. 잠든 동생한테 “보라야, 잠들면 추우니까 옷을 제대로 덮어야지.” 하고 타이른다. 작은아이는 누나가 여느 때에 이처럼 알뜰히 챙겨 주는 줄 알까. 알 테지.


오늘 따라 바람이 세지만 큰아이가 샛자전거에서 함께 발판을 굴러 주니 씩씩하게 나아간다. 그래도 제법 힘에 부친다. 원산마을 앞에서 자전거를 멈춘다. 조금 걷기로 한다. 큰아이도 바람이 차서 춥다고 한다. 저쪽 신기마을까지 걷거나 달리면 몸이 다시 따스해지겠지.


바람에 눕듯이 춤추는 억새를 보고, 찬바람을 맞으면서 싹이 트고 꽃대를 올리는 유채를 본다. 옛날 같은 이렇게 잎이 펑퍼짐하게 퍼진 유채를 그냥 두지 않으리라. 이제 시골에는 이 펑퍼짐한 유채를 뜯어서 건사할 젊은 손이 없으니, 논둑이나 밭둑에서 잘 자라는 유채잎을 나물로 뜯지 않고 그대로 둔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이 우중충하면서도 몽실거리는 하늘을 본다. 오늘이 지나면 비가 올까. 오늘 밤부터 비가 올까. 마을마다 나락을 모두 거두어서 빈들이 된 시골마을에 늦가을 비가 내려서 이 땅을 다시금 촉촉하게 적시고 못물도 채워 줄까. 신기마을 어귀에서 다시 자전거를 달려서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고, 큰아이는 얼른 집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뒤집어쓴다.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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