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의 물고기 독깨비 (책콩 어린이) 38
린다 멀랠리 헌트 지음, 강나은 옮김 / 책과콩나무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21



너와 나는 달라서 더없이 아름답다

― 나무 위의 물고기

 린다 멀랠리 헌트 글

 강나은 옮김

 책과콩나무 펴냄, 2015.10.30. 13000원



  학교나 사회를 보면, 언제나 ‘안 아픈 이’ 틀에 따라 맞춥니다. 그리고 언제나 ‘힘이 센 이’ 틀에 따라 맞추기 일쑤입니다. 이러면서 ‘아픈 이’나 ‘힘이 여린 이’를 돕는 틀을 살짝 곁들이려 합니다. ‘아픈 이’가 ‘안 아픈 이’한테 따라가야 하고, ‘힘이 여린 이’가 ‘힘이 센 이’한테 맞추어야 합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힘이 여린 이가 힘이 센 이한테 맞추어야 하는 사회’나 ‘아픈 이가 안 아픈 이한테 맞추어야 하는 사회’라는 말은, 말이 안 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말 이와 같지 않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아파서 집 바깥으로 나다니지 못하는 사람은 으레 ‘복지’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회입니다. 여느 삶자리에서 ‘똑같은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아요. 이를테면, 버스나 전철이나 배나 비행기 같은 데에서 어린이나 늙은 할매와 할배를 헤아리는 틀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버스나 전철에 경로석이나 어린이석이 있다고는 하지만, 자리에 이름표만 붙일 뿐, 버스를 타러 가기까지, 또 전철을 타러 오가는 길에, 어린이나 늙은 할매와 할배를 헤아리는 사회 얼거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만 살펴도 알 수 있지요. 지하도 계단은 언제나 ‘안 아픈 어른’ 키높이에 맞춥니다. ‘아픈 어른’ 키높이라든지 ‘어린이’ 키높이는 하나도 살피지 않아요. 여느 버스 계단도 ‘안 아픈 어른’ 키높이에 맞을 뿐, ‘아픈 어른’ 키높이라든지 ‘어린이’ 키높이에는 너무 높고 가파르며 좁습니다. 온 나라에 생기는 ‘자전거길’은 어른이 타는 자전거만 생각할 뿐, 어린이나 늙은 할매와 할배가 자전거를 타고 달릴 만하도록 생각해서 마련하지 않습니다.



난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입을 열지 말자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일곱 군데의 학교를 전전하면서 나는 아무 말 않는 편이 유리하다는 걸 배웠다. (23쪽)


나는 책을 한 권 꺼내 펼쳤지만 글자들이 꿈틀거리고 춤을 추었다. 움직이는 글자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는 걸까? (29쪽)



  린다 멀랠리 헌트 님이 쓴 어린이문학 《나무 위의 물고기》(책과콩나무,2015)를 읽다가 얼굴이 화끈해집니다. 내 어릴 적 일이 환하게 갑작스레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문학 《나무 위의 물고기》에 나오는 ‘앨리’라는 아이는 열세 살쯤 되는데 글을 제대로 못 읽습니다. 책을 펼치면 글씨가 마치 춤을 추는 듯이 날아가거나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를 가리켜 ‘난독증’이라고 한다는군요. 아마 글을 잘 읽는 사람이라든지, 글을 읽으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붙인 이름일 테지요.


  나한테 난독증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나는 혀짤배기이고, 말을 조금만 빨리 하려고 하면 혀가 꼬여서 소리가 샙니다. 어릴 적에는 학교에서 교사들이 언제나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윽박질렀고, 교과서 읽기를 시킨다든지 발표를 시킬 적에 하나라도 틀리면 어김없이 몽둥이가 춤을 추고 손찌검으로 불을 뿜었어요. 이런 학교 얼거리에서 교과서 읽기를 시키면 몹시 떨린 나머지 말소리가 샜습니다. 말소리가 새지 않도록 천천히 읽으려 하면 굼벵이가 기어가느냐 하면서 다그치니 동무들이 깔깔거리며 웃어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교과서 읽기를 시킬 적마다 웃음거리가 됩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하는 일이 언제나 두렵고 무섭도록 내몰던 예전 학교 모습이라고 할까요. 《나무 위의 물고기》를 읽는 내내 어릴 적 학교가 떠올라서 자꾸 소름이 돋았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엄마 목소리에 담긴 피곤함에, 졸라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터덜터덜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말이야, 사람들이 널 싫어한다는 소리는 하지 마!” 엄마가 외쳤다. “세상에 누가 너 같은 아이를 싫어하겠어?” (43쪽)


학교 선생님들은 대부분 학생들이 전부 똑같기를 바라는 것 같다. 모든 학생들이 완벽하고 얌전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런데 대니얼스 선생님은 모두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좋아하는 것 같다. (71쪽)



  어린이문학 《나무 위의 물고기》를 보면, 앨리 곁에 앨리를 돕는 동무가 둘 있습니다. 두 아이는 앨리한테 ‘다른 아이하고 참으로 다른 모습’이 있는 줄 압니다. 그리고 ‘다른 모습’은 그저 ‘다른 모습’일 뿐이라고 여기면서, 이 대목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는 앨리가 ‘다른 아이하고 참으로 다른 모습’을 놓고 끈질기게 꼬리를 잡으면서 놀리거나 괴롭히려고 하지만, 앨리 곁에서 동무로 함께 지내는 두 아이는, ‘서로서로 아름다운 동무’라고 여기는 마음으로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되어 줍니다.


  이리하여, 세 동무가 씩씩하게 학교를 다니면서 어려움을 헤치고 즐거운 삶을 찾는 이야기가 흐르는데,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새삼스레 또 한 가지 일이 떠오릅니다. 수업을 하며 무시무시한 교사들이 몽둥이를 들고 으르렁거리면서 나처럼 뭔가를 ‘잘 못 하’거나 ‘어설프게 하’는 아이를 다그치거나 놀림감이나 웃음거리로 삼는 짓을 하더라도, 이런 짓에 웃지 않는 동무들이 있어요. 그리고, 이 동무들은 제가 여느 때에 함께 걷거나 놀거나 어울리다가 ‘말소리가 샐’ 적에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냅니다. 이러면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 알아차립니다. 이 동무들은 나한테 “너 혀짤배기네!” 하면서 놀린 적도 없고,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무렵에 그 모습을 제대로 못 느꼈습니다. 내가 또 말소리가 샜구나 하고 느껴서 얼굴이 발개지고 창피하다고 느꼈을 뿐, 내 동무들은 내 말소리 샌 모습을 하나도 놀리지 않고 따지지 않는데, 이렇게 고맙고 훌륭한 동무들이 있는데, 이 동무들한테 고맙다는 마음을 그때에는 미처 밝히지 못했어요. 내 창피를 감추느라 바빴습니다. 이제서야 그 마음을 깨닫습니다.



“깜깜한 방이 어째서 너에 대한 그림이야, 앨리?” 선생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무척이나.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깜깜한 방에 있으면 아무도 날 못 볼 테니까요.” (76쪽)


‘글 읽기가 서툴다’는 표현 하나로, 사람들은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를테면, 내가 깡통에 담긴 수프인데, 깡통에 쓰인 재료를 읽기만 하면 나에 대해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것처럼. (122쪽)



  누군가는 학교에서 시험성적이 잘 나올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운동을 잘 할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책을 잘 읽을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글씨를 잘 쓸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동무들을 잘 이끌거나 타이르거나 다독일 줄 알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새로운 놀이를 끝없이 빚어서 다 함께 웃고 떠들면서 놀도록 선보일 줄 알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잘 지어내면서 따스한 바람이 불도록 할 테지요. 누군가는 어린 나이에도 밥을 잘 짓고 집일도 알뜰히 거들 테지요.


  참말 모두 다릅니다. 참으로 모두 다른 마음이요 생각이며 넋입니다. 그러니, 이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사랑하는 삶길을 걸을 수 있도록 북돋우거나 가르칠 때에 아름다운 학교라고 여겨요. 성적에 따라 등수를 매겨서 줄을 세우려는 학교가 아니라,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꿈을 키워서 모두 새롭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이끌 학교여야지 싶습니다.



나비들이 나에게 날아왔다. 나비들의 색과 무늬를 보며 왜 지금껏 한 번도 나비를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비들이 나는 방식은 새들과 달랐다. 온갖 방향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날았다. 나도 일부는 나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148쪽)


“앨리, 넌 남달라. 나도 남달라. 앨버트도 남달라. 그리고 속하고 말고를 누가 결정하는데? 셰이 같은 애들이? 걔는 못돼 먹은 애야. 걔가 뭐라고 하든 신경 쓸 필요 없어.” (175쪽)



  《나무 위의 물고기》에 나오는 아이를 둘러싸고 여러 교사가 나옵니다. 여러 교사를 살피면, 앨리라는 아이뿐 아니라 ‘다 다른 아이’를 다 다르게 바라볼 줄 아는 교사도 있고, 다 다른 아이를 그저 ‘다 똑같은 아이’로 맞추어서 줄을 짓거나 판에 박도록 이끌려는 교사도 있습니다. 학교에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미처 모든 아이를 제대로 못 살피는 교사도 있어요.


  어느 모로 보면, 앨리라는 아이는 동무와 교사를 잘 만났다고 할 만합니다. 참말 이렇게 좋은 동무와 교사를 만나기도 쉽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다른 자리에서 살피면, 앨리라는 아이는 제 마음자리에 아프고 괴로운 앙금이 있는 터라, 다른 동무들이 힘들거나 아파할 적에 살며시 다가가서 어깨를 쓰다듬어 줄 줄 압니다. 앨리라는 아이 곁에 좋은 동무가 있을 뿐 아니라, 앨리도 다른 동무한테 좋은 벗님이에요.



“학교에 오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알면서도 매일 학교에 오잖니. 학교에서의 하루가 힘들 거란 걸 알고 다른 아이들이 놀릴 거란 걸 알면서도, 너는 매일 학교에 와서 다시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하잖아.” (196쪽)


나는 반장이 되고 싶어지는 내 마음이 두렵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내가 교실 앞에 서 있고 선생님이 나를 축하해 주는 영화가 상영되었고, 그게 현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연필을 집어 들고 최선을 다해 집중했다. 최선을 다해. (248쪽)



  나는 어릴 적에 내 좋은 동무들한테 어떤 벗님이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내 혀짤배기 말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한 번도 나를 놀리지 않던 그 동무들한테, 나는 얼마나 사랑스럽고 재미나며 아름다운 벗님으로 함께 지냈을까 하고 되새겨 봅니다. 짓궂은 장난도 꽤 많이 쳤고, 우스꽝스러운 장난도 자꾸 치던 개구쟁이였는데, 그래도 나는 내 좋은 동무들한테 착하면서 맑은 몸짓과 웃음을 보여주었는가 하고 참말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어쩌면, 나도 내 동무들한테 좋은 벗님이 될 만했기에 나를 따스히 아낀 동무들이 있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내 동무들도 그 아이들대로 누구한테나 좋은 벗님이 될 만한 아름다운 넋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 다른 동무가, 키도 다르고 몸집도 힘도 모두 다른 동무가, 씩씩하게 손을 맞잡고 걷습니다. 키가 좀 어긋나도 어깨동무를 합니다. 걸음걸이가 좀 달라도 깔깔깔 웃고 노래하면서 걷습니다. 내가 아플 적에는 동무가 나를 보살피고, 동무가 아플 적에는 내가 동무를 보살핍니다. 내가 힘들 적에는 동무가 나를 돕고, 동무가 힘들 적에는 내가 동무를 돕습니다.


  책을 잘 못 읽으면, 책은 안 읽어도 됩니다. 글을 잘 못 쓰면, 글은 안 써도 됩니다. 힘이 여리면 힘을 써야 하는 일은 안 해도 됩니다. 스스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스스로 아름답게 걸을 수 있는 길을 걸으면 돼요. 학교에서 교사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빌어요. 그리고, 학교를 다니는 모든 아이들이 스스로 ‘너와 나는 다르지만, 너와 내가 다르기에 서로 아름답지’ 하는 마음으로 삶을 사랑하는 길을 배울 수 있기를 빌어요. 4348.11.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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