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한 자루



  나는 연필 한 자루로 글을 쓴다. 아이들은 연필 한 자루로 그림을 그린다. 헌책방지기는 연필 한 자루로 책마다 책값을 매기고, 장부에 팔림새를 적는다. 연필도 숲에서 왔고, 종이도 숲에서 왔으며, 책도 숲에서 왔다. 숲에서 자란 나무를 사람이 사랑하고, 사람이 가꾸며, 사람이 베고, 사람이 다루어, 사람이 연필이며 종이에다가 책을 짓는다.


  연필 한 자루를 손에 쥐면 문득 숲바람이 살풋 분다. 어디에서 비롯한 숲바람일까? 내가 쥔 연필 한 자루는 어느 두멧자락 숲에서 살던 나무가 새롭게 태어난 숨결일까? 내가 연필로 글을 쓰는 종이는 어느 시골자락 숲에서 자라던 나무가 새롭게 거듭난 숨결일까? 헌책방지기가 건사해서 책꽂이에 곱게 둔 책 한 권은 어느 나라 어느 마을 깊은 숲에서 깃들던 나무로 새롭게 이룬 이야기일까?


  연필 한 자루를 마주하면서 늘 숲을 그린다. 연필 한 자루를 손에 쥐어 칼로 석석 깎으면서 늘 숲을 헤아린다. 연필 한 자루를 아이한테 건네면서 늘 숲을 떠올린다. 연필 한 자루를 주머니에 넣고 나들이를 다니면서 늘 숲을 가슴에 품는다. 연필 한 자루가 있는 헌책방에서 책시렁을 살피면서 늘 숲을 만난다. 4348.10.26.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헌책방 언저리/책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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