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85 내가 짓는 삶이다
사회의식에서는 ‘네가 한 일은 네가 책임을 지라’라든지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처럼 말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맞구나 싶은데, 그렇다고 옳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럽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뿌린 대로 거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리사랑 치사랑’이라든지 ‘낳은 사랑 기른 사랑’을 함께 말합니다.
내가 한 일이니 내가 맡아서 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한 일은 내가 스스로 끌어들인 삶이요 일(경험)입니다. 내가 짊어질 굴레는 아닙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서로 도와요. 두레도 하고 품앗이도 합니다. 요샛말로는 ‘이웃돕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을 하느냐 하면, 함께 짓는 삶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짓고 너는 너대로 네 삶을 짓습니다. 우리는 모두 따로따로 살아요. 한집에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따로따로 밥을 먹습니다. 내가 밥을 먹을 적에 네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네가 숨을 쉴 적에 나는 숨을 안 쉬어도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맞는 짝꿍이라 하더라도, 밥을 따로 먹고 똥을 따로 눕니다. 잠도 따로 자야 하고, 몸도 따로 씻어야 합니다. 참말 그래요. 내가 밥을 먹었으니 내가 똥을 누지, 네가 내 똥을 누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힘들어서 내가 쉬지, 네가 내 몫을 쉬어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다 다른 삶을 짓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은 삶’은 ‘우리가 함께 누리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내가 지은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내 이웃이 바라보면서 기쁨을 느낍니다. 내가 지은 어설픈 보금자리를 내 이웃이 바라보면서 혀를 끌끌 찹니다. 내 이웃이 기쁨을 느끼면 내 이웃은 새로운 기운을 얻고, 내 이웃이 혀를 끌끌 차면 이녁은 내 보금자리에 일손을 거들러 옵니다.
그런데, ‘내가 지은 삶’이 있어야, 내 이웃이 나를 바라보면서 기쁨을 느끼든 도와주러 오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은 삶’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도 안 나타납니다.
좋거나 싫거나 나쁘다고 따지는 삶이 아닙니다. 그저 삶입니다. 내가 너보다 기운이 조금 세니까 내가 너보다 일을 많이 합니다. 어른이 아이보다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세니까 어른이 일을 도맡아서 하고, 아이는 신나게 뛰놀도록 합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내가 너보다 돈이 조금 넉넉하니까 내 돈을 너한테 줍니다. 네가 나보다 돈이 훨씬 넉넉하니까 네가 나한테 꽤 많은 돈을 나누어 줍니다.
고요히 흐릅니다. 물은 언제나 고요히 흐릅니다. 가파른 자리라면 거칠게 흐르면서 우렁찬 소리를 내는데, 아무리 가파르더라도 물이 다 쏟아지고 나면 비알은 사라집니다. 물은 다시 반반하게 멈추면서 고요하게 있지요.
삶이 흐릅니다. 삶은 언제나 고요히 흐릅니다. 오르락내리락 고빗사위도 있어 보이는 삶이지만, 가만히 보면 어떤 고빗사위가 물결을 치더라도 우리 삶은 늘 차분하면서 고요한 자리로 갑니다.
내가 짓는 삶은 거룩한 일(업적)을 쌓아올리려는 몸짓이 아닙니다. 내가 짓는 삶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즐겁게 웃고 기쁘게 노래하려는 몸짓입니다. 내가 짓는 삶에서 돈을 벌 수도 있고 이름을 얻을 수도 있으며 힘(권력)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름·힘을 거머쥐려고 오늘 이곳에서 살지 않습니다. 나는 늘 언제 어디에서나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이 되어서 씨앗을 바람에 날리려는 뜻으로 오늘 이곳에서 삶을 짓습니다.
내가 지은 씨앗을 내가 뿌립니다. 내가 심은 씨앗으로 내가 꽃이 되어 새롭게 태어납니다. 내가 지은 삶을 내가 노래합니다. 내가 이루는 꿈을 내 온 사랑을 기울여 아낌없이 노래합니다.
우리는 ‘책임을 질 만한 일을 스스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기쁘게 웃고 노래할 사랑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짓는 삶은, 내가 짓는 사랑이요 꿈이요 웃음이요 노래요 글이요 춤이요 이야기입니다. 4348.3.24.불.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숲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