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숙의 자연 치유 - 치유를 위한 비움과 알아차림 명상, 요가, 그리고 자연식
문숙 지음 / 샨티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책 읽기 85



스스로 자연인 줄 알 적에 스스로 아름답다

― 문숙의 자연 치유

 문숙 글

 샨티 펴냄, 2015.9.25. 16000원



  아침에 빨래를 합니다. 겨울을 앞두고 옷장에서 두꺼운 옷을 꺼내어 마당에 넙니다. 엊저녁에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 바깥마실을 하면서 모자를 씌우고 장갑을 끼웠더니 냄새가 난다고 해서 오늘은 아침부터 겨울옷이랑 모자랑 장갑을 마당에 내놓아 해바라기를 시킵니다.


  가을볕은 시골자락 들녘을 따뜻하게 어루만집니다. 벼베기를 마치고 길가에 말리는 나락한테도 따순 볕이 내리쬐고, 벼베기를 앞둔 들판에도 따순 볕이 내리쬡니다. 그리고 겨울옷을 미리 말리려는 마당에도 따순 볕이 내리쬐어요.


  빨래를 하고 옷가지를 널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늘 손으로 빨래를 하는데, 손빨래가 힘들다고 여기는 사람은 언제나 힘듭니다. 그리고 손이 아닌 기계로 빨래를 할 적에도 힘들다고 여기는 사람은 언제나 힘들어요. 손을 쓰든 기계를 쓰든, 우리 마음에 따라 살림하고 삶이 바뀝니다.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 기쁨이 가득한 마음으로 지낸다면 손빨래를 하든 기계빨래를 하든 언제나 기쁨이 넘쳐서 살림살이를 아기자기하게 가꿀 만합니다.



멀리 바다가 내다보이는 언덕배기에 허름하게 서 있는 작은 농가를 대강 수리해 ‘내 집이다’ 하고 눌러앉으니, 우주가 나를 가운데 둔 채 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곳이 바로 지구 표면의 중심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15쪽)


꽃의 얼굴에서 천국을 본다. 그리고 신의 모습을 본다. 풀숲에 피어 있는 작은 꽃의 얼굴에서 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것에서도 신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잔디 위에 피어 있는 작은 꽃에서 환희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신의 찬양은 들리지 않을 것이다. (24쪽)



  문숙 님이 쓴 《문숙의 자연 치유》(샨티,2015)를 읽습니다. 문숙 님은 어느덧 예순이라는 나이를 넘었습니다. 예순 고개로 오기까지 영화배우로도 일했고, 화가도 되었고, 요리사 자격증도 땄다고 해요. 그런데, ‘남 앞에 서서 남한테 얼굴과 몸짓과 열매(성과물)’를 보여주는 삶이었을 적에는 늘 아픈 곳투성이에 근심이나 걱정이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넘치도록 돈을 벌고, 넘치도록 옷이며 가방이며 신이며 잔뜩 꾸미면서 ‘예쁜 얼굴이나 몸’을 남 앞에서 드러내는 동안 기쁨이나 즐거움이 샘솟던 적은 아주 드물었다고 해요.


  그러면, 문숙 님은 언제 기쁨이나 즐거움이 샘솟았을까요? 우리는 언제 기쁨이나 즐거움을 스스로 길어올려서 누릴 만할까요? 넘치도록 돈을 벌어야 기쁠까요? 예뻐 보이거나 멋져 보이는 옷차림에 자가용에 아파트를 거느려야 즐거울까요?



‘습관’이나 ‘병의 의지’로부터 오는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순수하게 지켜보는 마음의 눈’이 필요하다.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려고 애쓰지 않으면서 조용히 내면을 지켜보는 것이다. (87쪽)


요가를 연습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지켜야 할 중요한 마음의 상태가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초보자의 마음’이다 … “무엇인가로 꽉 차 있는 전문가적인 마음에는 새로운 가능성이란 없다. 그러나 초보자의 마음에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요가를 연습하는 사람들은 이 법칙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미 배워서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그것을 비워 가능성으로 가득 찬 공간을 마련하는 작업에 전념해야 한다. (120, 121쪽)



  한국말사전에 ‘자연 치유’라는 말은 없으나, 오늘날 ‘자연 치유’는 아주 널리 쓰는 낱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병원이나 약국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제 몸을 살펴서 다스리도록 이끄는 몸짓인 ‘자연 치유’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연이라고 하는 대목을 이야기합니다.


  아마 학교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얼핏 이야기할 테지요. 그러나 학교에서는 병원이나 약국에 가야 한다고 힘주어 이야기해요. 학교에서는 병원이나 약국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몸을 다스리고 스스로 마음을 아끼는 길은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의사나 약사가 되는 길을 걸어가기는 하되, 의사와 약사가 없을 적에 스스로 몸이랑 마음을 살뜰히 가꾸는 길은 배우지 못해요.


  곰곰이 돌아보면, 사람들이 학교를 따로 다니지 않던 지난날에는 병원이나 약국을 찾는 일이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지난날에는 병원이나 약국도 없었으니까요. 지난날에는 마을에서 마을사람 스스로 몸하고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지난날에는 시골사람 스스로 풀을 살피고 헤아리면서 스스로 밥을 짓고 약을 지었습니다.


  어느 모로 생각하면, 학교가 생기고 병원하고 약국이 생기면서 ‘아픈 사람’이 자꾸 생긴다고 할 만합니다. 아픔을 없애는 병원이나 약국이 아니라 아픔을 키우면서 장사가 되는 병원이나 약국이라고 할까요. 오늘날 학교는 배움을 베풀기는 하지만, 입시지옥으로 모든 아이들을 내몰거나 밀어댑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즐겁게 배우기도 할 테지만, 입시교육과 시험문제에 짓눌리거나 시달리면서 시름시름 앓아요. 병원이나 약국에서 아픈 곳을 다스려 주기는 하되 돈을 지나치게 많이 받고, 또 항생제를 지나치게 많이 쓰면서 ‘사람들 스스로 몸을 다스리는 길’을 잊거나 잃게 하기 일쑤입니다.



대형 식품점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장바구니를 들여다보면 더욱 재미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자신의 생긴 모습이나 건강 상태를 그대로 말해 주는 듯한 식품들로 바구니를 채우고 있다. (138쪽)


(어릴 적에) 아직 흙냄새도 가시지 않은 촌스런 풀과 채소, 밭에서 뒹구는 과일들만 먹던 나보다는 깡통을 따서 빵과 함께 먹고 예쁜 그림이 붙어 있는 야릇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먹는 그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나는 늘 부러워했다. (145쪽)



  아이들이 뛰놀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집니다. 피가 흐르기도 하고 때때로 살갗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때에 아이들은 약을 발라서 무릎을 다스릴 수 있으나, 그냥 두면서 무릎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풀잎이나 풀줄기를 갈아서 무릎을 다스릴 수도 있고요.


  지난날에는 어디나 흙길이었고 풀밭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날 아이들은 뛰놀다가 넘어져도 무릎이 깨지거나 피가 철철 나도록 다치는 일이 드물었어요. 돌에 찧지 않고서야 무릎이 깨지지는 않지요. 오늘날에는 어디나 시멘트나 아스팔트 바닥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아이들은 살짝 넘어져도 무릎이 깨지기 마련이에요. 지난날에는 피를 아물게 하는 풀이 무엇인지 누구나 알았고, 어디나 풀밭이었으니, 피가 나도 아이고 어른이고 쉽게 다스렸어요. 오늘날에는 풀밭을 보기 어렵고, 시골에서는 농약이나 풀약을 너무 쳐대기 때문에 풀을 뜯어서 다친 곳을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문숙의 자연 치유》를 조용히 읽습니다. 문숙 님은 이 책에서 요가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자연식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문숙 님이 살던 하와이 섬마을에서 사탕수수 산업을 어떻게 하는가 같은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사탕수수밭에서는 농약을 엄청나게 쓰고, 이 농약은 바다로 흘러든다지요. 한국에서도 농약은 엄청나게 씁니다. 한국에서 쓰는 농약도 모두 흙으로 스미고 바다로 스밀 테지요.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바닷가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으니 일본 미나마타병하고 한국 온산병에 이어서 ‘원자력병’이나 ‘핵병’이 생길 수 있어요.



진정으로 치유를 원한다면 몸을 해치고 학대하는 행위를 멈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화를 원하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절실한 마음이 필요하다. (166쪽)


전갈도 강한 독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이긴 하지만 그건 그냥 그들의 상황일 뿐 일부러 우리를 괴롭히려고 들이대지는 않는다. 단지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만 하지 않으면 된다. 그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러면 다들 알아서 거리를 두고 피해 가기 마련이다. (189쪽)



  ‘자연식’ 이야기에 이어 ‘자연 치유’ 이야기를 들려주는 문숙 님은 누구보다 문숙 님 스스로 이녁 몸이 바로 자연인 줄 깨닫는 길을 걸었습니다. 스스로 자연인 줄 모르던 때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뽐내는 길을 걸었다면, 스스로 자연인 줄 알아차리면서 배우는 요즈막에는 ‘내가 나를 스스로 바라보는’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식이나 자연 치유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농약이나 항생제나 비료에 젖어들지 않은 밥을 먹거나 요가만 익히면 될까요? 돈을 넉넉히 벌어서 자연 식단을 짜거나 요가 학원을 다니면 될까요?


  스스로 자연인 줄 알려면 스스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일 때에 스스로 자연, 바로 ‘숲’이 됩니다. 남이 나를 사랑해 주어야 사랑이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때에 사랑입니다. 남이 나한테 뭔가를 선물로 주어야 사랑이지 않습니다. 스스로 기쁨을 짓고, 스스로 노래를 지으며, 스스로 삶을 지을 때에, 언제나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자연 치유는 바로 스스로 짓는 기쁨이요 스스로 짓는 노래이며 스스로 짓는 삶입니다.



사탕수수밭에 뿌려진 대량의 농약들은 얼마 가지 않아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천국인 양 평화롭게 내다보이는 새파란 남태평양의 바닷물도 실제로는 벌써 오래전부터 농약으로 오염되고 죽어 가는 바닷물일 뿐이다. (197∼198쪽)


이곳에서 우리를 구하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나 하나가 알아차리는 것이 주변의 변화를 초래하며, 나 하나가 빛을 발하면 어두운 주위가 같이 밝아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05쪽)



  ‘자연 치유’라는 말에서 ‘자연(自然)’은 한국말로 ‘숲’을 가리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사람이 건드리지 않고 스스로 생겼다고 하는 멧자락이나 바다나 냇물이나 풀이나 짐승이나 나무는 모두 ‘숲’ 품에서 태어나거든요. 숲이 있을 때에 뭍이랑 바다가 함께 있습니다. 숲이 없으면 뭍도 바다도 있지 못합니다. 풀과 나무가 돋고, 벌레와 짐승이 살며, 싱그러운 바람과 흙과 햇볕이 어우러지는 기운이 바다로 흘러들기에 바닷속도 싱그러운 터전이 됩니다.


  오늘날 도시문명이 죽음으로 치닫는 까닭은 도시 스스로 숲을 밀어내면서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플라스틱과 쇠붙이만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도시를 둘러싼 시골에 공장과 발전소와 쓰레기터와 골프장과 고속도로와 군대 따위를 엄청나게 때려지으면서 시골자락 숲을 함께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도시에도 숲이 있어야 하고, 시골에도 숲이 있어야 합니다. 수목원이나 공원이 아닌 숲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보금자리에 마당을 건사하면서 텃밭도 일구고 해바라기를 할 수 있어야 숲노래를 부르는 숲사람이 됩니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숲바람을 마시고 숲살이를 할 수 있을 때에 튼튼합니다.


  병원이나 약국이 늘어야 사람들이 튼튼하지 않아요. 사람들 스스로 튼튼할 때에 비로소 튼튼합니다. 사랑을 다루는 영화나 문학이나 연속극을 보기에 ‘사랑을 알거나 나누’지 않습니다. 스스로 마음속에서 사랑을 길어올려서 기쁘게 웃고 노래할 때에 비로소 ‘사랑을 알거나 나누’는 삶이 되어요.


  자연 치유란 스스로 숲이 되려는 몸짓입니다. 자연 치유를 하려는 마음이란 스스로 숲으로 거듭나려는 사랑짓입니다. 자연 치유를 하면서 기쁘게 웃으려는 삶이란 스스로 숲노래를 부르면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려는 생각짓기입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 숲(자연)인 줄 깨달으면서 스스로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길을 꿈꿉니다. 4348.10.1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