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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잘한 일
박금선 지음,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성매매방지중앙지원센터 / 샨티 / 2015년 9월
평점 :
책읽기 삶읽기 207
“넌 잘못한 일 없어. 넌 늘 아름답거든.”
― 내가 제일 잘한 일
박금선 글
샨티 펴냄, 2015.9.18. 15000원
이틀 동안 가을비가 꽤 세게 내립니다. 올해에는 거센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고, 비를 이끈 드센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았습니다. 올해에는 시월이 되도록 큰바람이 없었기에 들마다 나락은 샛노랗게 잘 익기만 했습니다. 이러다가 벼베기를 얼마 앞둔 막바지에 바람이 제법 세게 부는 비가 내리니 들녘에 드문드문 벼가 눕습니다. “나락이 다 눕겠소잉. 세워서 묶어야 하나.” “일없어. 기양 둬도 돼.” 군내버스에서 마을 할매 한 분이 걱정하는 말씀을 하고, 다른 마을 할매는 일없다면서 그냥 둬도 된다고 말씀을 합니다. 비가 그친 들을 살피니 군데군데 조금 벼가 눕기는 했지만 거의 다 멀쩡합니다. 알차게 맺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는 씩씩하게 섭니다.
“나는 하루에 골백번도 더 사과하며 지낸 적도 있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제발 때리지만 마세요.’ 하면서 이렇게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싹싹 빌면서.” (16쪽)
해가 따사롭게 비추는 아침에 평상 장판을 걸상에 걸쳐서 말립니다. 마당이 다 마를 즈음 빨래를 널 생각입니다. 비바람이 그친 아침부터 아이들은 마당에서 맨발로 뛰어놉니다. 이러다가 마루로 들어와서 유리문으로 해바라기를 하고, 느긋하게 하루를 엽니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다가 마루로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당에 새로운 손님이자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 ‘다른 아이’ 셋이 찾아듭니다. ‘다른 아이’ 셋은 섬돌에 앉기도 하고, 종이상자를 벅벅 긁기도 하고, 자전거 밑에 벌렁 드러눕기도 합니다. ‘다른 아이’ 셋은 우리 집 광에서 태어난 새끼 고양이입니다.
‘다른 아이’ 셋은 우리가 마당에 물기를 말리려고 걸상에 걸친 장판도 긁고, 장판 밑으로 들어가서 숨바꼭질도 하며 평상을 오르내리거나 평상 밑으로 들어가서 놀기도 합니다. 사람 손을 타려고 하지는 않으나 늘 우리 집에서 가까이 지내는 ‘다른 아이’들은 쥐도 잡고 개구리도 잡으면서 이 집에서 저희 삶을 짓습니다.
“가끔은 자랑스러운데, 자랑할 수 없다는 게 흠이에요. 내가 성매매업소를 그만두었다고 길거리에서 자랑하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요? 자랑스럽지만 자랑할 수는 없지.” (32쪽)
박금선 님이 빚은 《내가 제일 잘한 일》(샨티,2015)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비바람 몰아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읽었고, 한가위 동안 시골집에 조용히 머물면서 읽었습니다. 다친 오른무릎이 다 낫지 않아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 나들이도 다니지 못하는 몸이기에 한가위에도 비바람 몰아치는 날에도 우리 시골집에서 조용히 해바라기를 하거나 비바라기를 하면서 읽었습니다.
아침에 ‘우리 집 마을고양이’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은 지난 이틀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비바람이 몰아치니 광에 깃들어 조용히 숨을 죽이면서 빗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었을까요. 비바람이 몰아쳐도 비바람을 맞으면서 먹이가 있는가 하고 살폈을까요.
잔소리쟁이 여자 2가 내게 말했지. 독립해야 한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나 혼자 밥벌이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그럼 나의 과거를,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홀딱 다 보여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까? 날 비웃고 손가락질할 텐데? 더럽다고 할 텐데? 위안거리를 찾자면 ‘오늘, 현재를 다르게 살면, 과거도 달라진다’는 뒷부분의 말이다. (93쪽)
우리 곁에는 ‘눈에 드러나게 보이는 자리’에 있는 이웃이나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둘레에는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있는 이웃이나 동무가 있습니다. 눈에 드러나게 보이는 자리에 있는 이웃이나 동무도 아름답고 반갑습니다.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있는 이웃이나 동무도 아름답고 반갑지요. 그런데,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있는 이웃이나 동무를 생각하기는 어려워요. 눈에 드러나지도 않고 잘 보이지도 않으니까요.
커다란 집에서 사는 사람은 작은 집에서 사는 사람을 못 보기 일쑤입니다. 높다른 집에서 사는 사람은 나즈막한 집이나 땅속으로 파고든 집에서 사는 사람을 못 보기 일쑤입니다. 커다란 도시에서는 자그마한 도시나 시골에서 사는 사람을 못 보기 일쑤입니다. 고속도로나 고속철도를 싱싱 달리면 창밖으로 스치는 시골마을 시골사람을 거의 쳐다볼 수도 없고 어떻게 지내는지 헤아릴 길도 없습니다.
내가 어릴 때 본 엄마 모습 가운데, 가장 많이 기억나는 건 아빠한테 매 맞는 모습이야. 그런데 이제는 나 때문에 애태우는 엄마도 보이고, 새로 일군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평범한 여자로서의 엄마도 보여. 엄마, 그런데 요즘 엄마가 나하고 동생한테, 너무 돈으로만 많은 걸 채워 주려고 하는 거 알아? 오래 떨어져 있었던데다가, 내가 이렇게 된 게 다 엄마 탓이라고 생각하고 미안해서 그러는 건 아는데, 나는 돈보다 대화가 필요해. (150쪽)
이야기책 《내가 제일 잘한 일》은 성매매 여성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낳아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집’을 보금자리로 느끼지 못해 집을 뛰쳐나와야 했을 적에, 갈 곳도 머물 곳도 깃들 곳도 지낼 곳도 없어서, 또 이 아이들을 따스히 보듬거나 어루만지는 손길도 찾을 길이 없어서, ‘어떤 어른들’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잠을 자고 밥을 먹기는 하지만 ‘빚은 끝없이 늘어나’서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에서 쳇바퀴질만 하다가 가까스로 쳇바퀴질에서 빠져나온 여성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빠가 조금 불쌍하기도 해. 좋은 남편이 되는 법이나 좋은 아빠가 되는 법, 술 말고 다른 것으로 마음 푸는 법을 배울 기회가 아빠에게 있었다면, 우리 집이 달라질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아빠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없었던 거야. (153쪽)
어느 한때 성매매 여성으로 지내야 한 사람들은 모두 처음에는 ‘사랑받아 태어난 아이’입니다. 성매매 일을 해야 하는 동안 ‘사랑받는 삶’하고는 동떨어졌습니다. 보금자리가 없는 채 잠만 자고 밥만 먹으며 ‘누군가 시키는 일’을 해야만 하는 곳에 머물 뿐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마음대로 나올 수 없을 뿐더러, 으레 ‘사내들 손찌검’에 휘둘려야 합니다.
곰곰이 돌아볼 노릇입니다. 왜 ‘아이를 낳는 사내(아버지)’는 ‘아이를 낳은 가시내(어머니)’를 때리거나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까요? 왜 아이를 낳은 사내는 이녁 아이를 사랑으로 보살피지 못할까요? 왜 사내라고 하는 사람은 가시내를 ‘성매매 욕구해소’를 하는 노리개로 바라볼까요? 왜 이 나라 사회 지도자나 정치 지도자나 교육 지도자는 이 같은 실타래와 굴레를 풀려고 하는 데에는 마음도 몸도 돈도 슬기도 안 쓸까요?
내가 실장님에게 이런 일 하기 싫다고 하니 ‘빚 갚고 꺼져!’ 하고 소리치며 나를 때렸다. 그래도 실장님이 좋았다. 실장님 아이를 임신했다. 또 맞았다. 얼굴에는 멍이 많이 들고 머리에서 피가 콸콸 났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여자를 이렇게 때리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 했다. (179쪽)
아이들은 잘못하지 않습니다. 잘못한 아이들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잘못을 모릅니다. 언제나 사랑을 오롯이 받는 아이들은 잘못할 일이 없고, 어떤 일을 ‘잘 하지 못하’더라도 다 괜찮습니다. ‘잘 하지 못했’으면 앞으로 잘 하면 되고, 앞으로도 또 ‘잘 하지 못하’면 다음에 잘 하면 되며, 다음에도 ‘잘 하지 못한다’면, 새롭게 다음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미운 아이하고 고운 아이가 따로 없이, 아이는 모두 곱습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고 싶습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거나 배운 사랑을 온몸에 곱게 품고서 이웃하고 동무를 따스하고 넉넉하게 얼싸안으면서 손을 맞잡는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야기책 《내가 제일 잘한 일》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아직 사랑받지 못한 나날을 보냈다고 할 만합니다. 이제부터 즐거이 사랑받는 길을 걸어갈 사람들이라고 할 만합니다. 스스로 나를 사랑하고, 스스로 이웃을 사랑하며, 스스로 누구나 사랑하는 삶을 새롭게 지을 사람들이지 싶습니다.
귀여운 아이들. 나는 모든 여성이 다 성매매를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성매매를 하지 않도록 사회가 지켜 주어야 한다. 갈 곳 없는 어린 소녀라면, 그 소녀가 성매매를 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219쪽)
넘어진 아이를 바라보는 어버이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구나 한 마디를 합니다. “괜찮아. 일어서렴. 아프지 않아. 피가 나니? 괜찮아. 피는 곧 멎어. 조금 지나면 하나도 안 아파. 즐겁게 일어나서 다시 달리렴. 웃고 노래하면서 마음껏 뛰놀렴.”
넘어졌으면 일어나면 됩니다. 또 넘어졌으면 또 일어나면 됩니다. 자꾸 넘어진다면 거듭거듭 일어나면 됩니다. 우리는 일어서면서 웃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씩씩하게 일어서면서 내 온 사랑을 이웃하고 나누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너는 그야말로 아름답고, 너랑 동무인 나도 참말 아름답습니다.
이야기책 《내가 제일 잘한 일》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두려워할 까닭도 없습니다. 한국 사회에 아직 바보스러운 어른, 이 가운데 바보스러운 ‘사내’가 퍽 많다고 할 만합니다만, 씩씩하게 한 걸음씩 내딛으면 됩니다. 나를 기다리면서 언제든지 따스히 품어 줄 이웃이 있으니 당차게 한 걸음씩 새로 내딛으면 됩니다. 나를 아름다운 눈길로 바라보고, 나한네 “너 참 아름답네.” 하고 속삭일 이웃이 있으니, 아름다운 이웃을 생각하고 꿈꾸면서 내 마음속에 깃든 아름다운 숨결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가장 잘한 일’이란 나를 꾸밈없이 바라보며 사랑하는 일입니다. ‘내가 가장 잘한 일’이란 우리 아이와 이웃 아이 모두 티없이 마주하며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 가슴속에 기쁜 사랑을 담아서 ‘내가 나중에 어른이 된 뒤’에 이 땅에 새롭게 태어날 아이들한테 ‘내가 물려받고 배운 사랑’을 새로우면서 즐겁게 물려주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4348.10.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