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맛을 아는 책읽기
물맛을 아는 사람하고 물맛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물맛을 아는 사람하고는 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데, 물맛을 모르는 사람하고는 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물맛을 아는 사람은 물맛에 따라 살림맛이랑 삶맛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데, 물맛을 모르는 사람하고는 살림맛도 삶맛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
흙을 아는 사람하고 흙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흙을 아는 사람하고는 흙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데, 흙을 모르는 사람하고는 흙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자동차를 아는 사람하고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자동차를 모르는 사람하고 자동차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테지. 나는 자동차를 모르고 경운기나 콤바인을 모른다. 나는 대규모 농사를 모르고, 비닐집 농사를 모른다. 그래서 나로서는 자동차나 콤바인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대규모 농사나 비닐집 농사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우리 집 뒤꼍에 무화과나무가 우거진다. 그래서 아이들하고 날마다 무화과알을 따서 먹는다. 우리 집 무화과는 하늘바라기 나무이다. 억지로 쇠줄로 잡아당기거나 가지치기를 함부로 하며 괴롭힌 끝에 얻는 열매가 아니라, 나무결이 그대로 살아서 맺는 열매이다. 그래서, 여느 가게나 저잣거리에 나온 무화과랑 우리 집 무화과는 크기도 맛도 달콤함도 사뭇 다르다. 나무를 고이 자라도록 하면서 얻는 열매가 베푸는 맛하고, 시달리고 들볶인 나무에서 가로채는 듯한 열매가 베푸는 맛이 얼마나 다른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실컷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열매 맛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이야기를 못 나눈다.
우리는 어떤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책을 알까? 우리는 어떤 책을 읽는가? 우리는 책을 읽어서 삶과 사람과 사랑을 얼마만큼 헤아리거나 알아채는가?
사랑스러운 이웃님이 물맛을 알 수 있기를 빈다. 싱그러우며 맑고 상큼한 물맛을 아는 이웃님이 늘어나기를 빈다. 짙푸르고 새파란 바람맛을 아는 이웃님이 늘어나기를 빈다. 무지개와 뭉게구름을 알고, 버들잎과 시골꽃을 아는 이웃님이 늘어나기를 빈다. 인문 지식이 아니라 슬기로운 삶을 깨달으면서 철드는 이웃님이 늘어나기를 빈다. 4348.9.2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