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의 시대 1 - 나쓰메 소세키 편 세미콜론 코믹스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카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 / 세미콜론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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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40



너울치는 사회에서 흔들리는 ‘지식인’

― ‘도련님’의 시대 1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가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 2012.10.26. 11000원



  세키가와 나쓰오 님이 글을 쓰고, 다니구치 지로 님이 그림을 그린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세미콜론)는 일본 정치와 사회와 문화에서 크게 너울을 치던 무렵을 그립니다. 다만, 이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는 일본 정치와 사회와 문화가 크게 너울치던 때에 ‘글 쓰는 사람’으로 살던 여러 사람 이야기를 빌어서 ‘일본에 어떤 너울이 쳤는가’ 하는 실마리를 풉니다. ‘메이지’라고 하는 물결이 잠들면서 서양 문화와 문명으로 일본이 크게 달라지는 모습을 나쓰메 소세키나 모리 오가이나 이시카와 다쿠보쿠 같은 사람을 빌어서 그립니다.


  아마 한국에서도 ‘한국 사회 개화기’를 그무렵 ‘글 쓰는 사람’을 빌어서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국 사회 개화기에는 어떤 ‘글 쓰는 사람’을 빌어서 이야기를 빚을 수 있을까요? 최남선이나 이광수나 서정주 같은 사람을 빌어서 이야기를 빚을 만할까요? 심훈이나 윤동주나 김유정 같은 사람을 빌어서 이야기를 빚을 만할까요? 주시경이나 김두봉은? 이효석이나 김동인은? 모윤숙이나 나혜석은? 홍명희나 김교신은?



“무턱대고 서양 흉내를 내려고 해도 그게 그리 쉬운가. 흉내를 낸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13쪽)


‘일본인은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술을 좋아한다. 그 전통은 메이지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진다.’ (21쪽)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를 이끄는 일본 작가는 아무래도 ‘나쓰메 소세키’입니다. 〈도련님〉이라는 작품을 빚은 사람이 바로 나쓰메 소세키이고, 이 만화책을 이끄는 이름도 ‘도련님’입니다. 이제껏 일본은 도련님(메이지 시대) 같은 나라요 사회요 문화였으면, 앞으로는 도련님은 저만치 뒤로 물러서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앞으로는 샌님 같은 도련님이 아닌, 씩씩하고 밝으며 다부진 새로운 젊은이가 일어선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는 일본 사회에서 ‘저무는 메이지 시대’를 마지막으로 기리면서 고이 떠나 보내려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하면서도 떠나 보내야 하는 옛 시대를 아쉽게 그리워하는 책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메이지’나 ‘근대’나 ‘개화’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한국에서는 고려 시대라든지 조선 시대라고도 어느 한때를 나누곤 합니다만, 이렇게 ‘시대를 가르는 잣대’는 어떤 사람 눈길일는지 생각해 봅니다.


  집에 ‘하인’을 두면서 지내는 사람들로서는 ‘천황’이 바뀌거나 정치·사회 얼거리가 바뀔 적마다 여러모로 소용돌이를 겪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인 자리에서 사는 사람’은 천황이 바뀌든 서양 군인이 들어오든 식민지 사회가 되든 언제나 똑같이 ‘하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소작농은 조선 사회에서도 소작농이었고, 개화기에도 소작농이었으며, 식민지 사회에서도 소작농이었어요.


  바깥에서는 정치나 사회나 문화가 너울을 친다지만, 막상 ‘나라를 버티거나 받치는 바탕’이 되는 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한테는 어떠한 너울도 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는 ‘도련님’이 흔들거리는 모습을 살며시 보여준다고 할 텐데, 이와 달리 《오싱》 같은 이야기를 떠올린다면, 깊은 멧골에서 살다가 읍내로 식모살이를 나온 ‘오싱’한테는 ‘너울치는 사회’는 아무것도 아니며 느낄 수조차 없는 대목입니다.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기저귀를 빨아야 하는 어린 오싱한테 근대나 개화란 무엇일까요?



“소설은 말이야. 체념했던 일에 거창하게 미련을 부리거나, 머리로 뀌는 방귀 같은 거야.” “머리로 뀌는 방귀. 음,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피가 끓는 성격이라곤 하지만 교사니까 다소 지식은 갖추고 있고, 결말에선 악당을 던져버려야 속이 후련하겠지.” (46쪽)


‘소세키의 병은 근대사회에서 비로소 자아에 눈뜨게 된 일본인의 고민, 또는 서구를 증오하면서도 서구를 배워야 했던 일본 지식인의 딜레마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52쪽)




  너울치는 사회에서 흔들리는 ‘지식인’을 재미나게 보여준다고 할 만한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입니다. ‘도련님(지식인)’ 눈높이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도련님 자리에서 사회를 맞이하며, 도련님 걸음걸이로 새로운 사회로 접어듭니다.


  이리하여, 도련님은 늘 도련님으로 있습니다. 도련님은 하인이 어떤 삶을 꾸리는가를 하나도 모르고 조금도 알려 하지 않습니다. 도련님은 인력거꾼이 어떤 살림을 꾸리는가를 하나도 모르고 조금도 알려 하지 않습니다. 도련님은 소작농이나 시골 농사꾼이 어떤 마을을 꾸리는가를 하나도 모르고 조금도 알려 하지 않습니다.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에서 ‘소세키 마음’을 들어서 말하는 대목처럼, 너울치는 사회에서 일본 지식인은 “근대사회에서 비로소 자아에 눈뜨게 된 일본인의 고민, 또는 서구를 증오하면서도 서구를 배워야 했던 일본 지식인의 딜레마(52쪽)”를 품습니다. 너울치는 사회에 발맞추어 제자리(지식인 자리, 또는 도련님 자리)를 지키는 데에는 마음을 쓸 줄 알지만, 이웃이나 둘레를 살피는 눈길은 매우 얕습니다.



“보기 드문 권총을 소지하고 계신데 그 총은 매우 부정확한 물건입니다.” “네?” “회전식으로 하시죠. 아이버 존슨 사의 총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표적도 잘 골라야죠.” “뭐가요?” “작년에 조선국을 보호화, 대놓고 말해 속국화하려고 애쓴 건, 야마가타 님이 아니라 이토 님입니다. 착오 없으시길.” (174쪽)



  《‘도련님’의 시대》를 보면 ‘안중근’이라는 사람이 살몃살몃 나옵니다. 일본사람은 안중근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한국에서 바라보는 안중근 ‘의사’와 달리, 일본에서는 ‘암살자’나 ‘살인자’로 바라볼 수 있겠지요. 일본 사회에서 수많은 지식인은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며 군국주의로 뻗는 일을 기뻐했을 수 있고, 전쟁으로 얻어들인 재산(그러니까 이웃나라한테서 빼앗은 재산)으로 일본 사회를 북돋운다면서 반길 수 있습니다.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는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듯이 여러 목소리를 골고루 들려주지도 않습니다. 처음부터 ‘이웃(남)’ 일에는 마음을 쓸 겨를이 없습니다. 너울치는 사회에서 스스로(도련님 스스로) 살아남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스스로 어떤 몸짓을 해야 하는가를 놓고 끙끙 앓을 뿐입니다.



‘소세키뿐만 아니라 메이지의 지식인들에게 아시아는 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구를 규범으로 삼은 근대화의 파란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요동치는 자아의 확보에 매달렸다.’ (176쪽)




  도련님은 못 이깁니다. 도련님은 시대에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너울치는 사회에서 지식인은 아무것도 못 이기고 아무것도 못 하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저 너울에 따라 흔들리면서도 안 넘어지려고 용을 쓸 뿐입니다.


  그러면, 도련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너울치는 사회에서 어떻게 안 넘어질 수 있을까요? 바로 도련님 둘레에서 도련님을 지켜 주는 수많은 하인과 소작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로 치자면 수많은 노동자가 사회와 나라와 정치와 경제를 떠받칩니다. 수많은 비정규직이 이 나라를 지켜 줍니다.


  커다란 기업이나 재벌이 이 나라를 버티거나 먹여살리지 않습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이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와 농사꾼’이 이 나라를 버티거나 먹여살리지요. 다국적기업이 한국에서 잇속만 챙기고 빠져나간들, 몇몇 재벌기업이 수출을 못한들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회와 공장과 회사와 식량을 버티도록 밑바탕에서 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다만, ‘밑바탕 사람들 목소리’를 귀여겨듣거나 눈여겨보는 도련님(지식인)이 매우 드물거나 거의 없을 뿐입니다. 너울치는 사회에서 도련님은 흔들리지만, 밑바탕 사람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제몫을 씩씩하게 합니다. 전쟁이 터지든 식민지가 되든 농사꾼은 봄이면 씨앗을 심습니다. 농사꾼이 씨앗을 심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굶어서 죽어요. 전쟁이 터지든 식민지가 되든 어머니는 아기한테 젖을 물립니다. 어머니가 아기한테 젖을 물리지 않으면 새로운 어린이가 자라지 못하고, 새로운 어린이가 자라지 못하면 한 나라나 사회는 곧바로 무너져서 사라지겠지요.



“어차피 도련님은 못 이겨. 시대라는 것에 질 수밖에.” (224쪽)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지식인 자리에만 머물지 않고서 ‘밑바탕’을 볼 줄 알았다면, 또 이녁 스스로 밑바탕이 되는 삶을 조금이라도 가꾸어 보았다면, 그리고 이녁 스스로 손에 호미나 낫이나 기저귀를 쥐고서 ‘살림 가꾸기’를 해 보았다면, 사회가 아무리 너울치더라도 스스로 튼튼하게 서거나 씩씩하게 살아가는 길을 한결 슬기로이 헤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넘쳐나는 새 지식을 마주하면서 넘쳐나는 새 지식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놓고 망설이기만 하니까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넘쳐나는 새 문명을 맞닥뜨리면서 옛 문명을 차마 놓기 어려우니까 몸이 고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아기는 늘 아기이니, 어머니는 언제 어디에서나 아기를 살뜰히 보살핍니다.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가 바뀌어도 농사꾼은 늘 봄에 씨앗을 심고 가을에 열매를 거둡니다. 고이 흐르는 삶을 바라보는 사람은 흔들릴 일이 없습니다. 고이 흐르는 삶과 사람과 사랑을 바라보지 않는 ‘도련님(지식인)’ 자리에만 머문다면 언제나 흔들리면서 휩쓸리는 가랑잎 같은 모습이 됩니다. 4348.9.18.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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