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72 제철, 제맛, 제삶



  ‘제철’에 나는 밥을 먹을 줄 알아야 철이 든 사람입니다. 제철에 나지 않는 밥을 먹을 때에는 철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사람은 거의 모두 철이 없이 삽니다. 한겨울에 수박을 먹고, 이른봄에 딸기를 먹습니다. 말이 안 되는 노릇이지만, 참말 오늘날 사람은 거의 모두 스스로 철을 잊거나 잃거나 버리거나 팽개치거나 망가뜨리면서 지냅니다. 철을 잊으니 삶이라 하기 어렵고, 철을 잃으니 삶과 동떨어지며, 철을 버리니 삶과 등질 뿐 아니라, 철을 팽개치니 삶하고 멀어지기만 하는데, 철을 망가뜨리니 철이 들 수 없습니다.


  제철에 나는 밥을 먹지 않으니 ‘제맛’을 알기 어렵습니다. 쑥은 봄에 뜯어서 먹을 때에 제맛입니다. 그런데, 쑥떡이나 쑥부침개를 가게에서 사다 먹기만 한다면, 손수 쑥을 뜯어 보지 않으면, 쑥내음이 무엇이고 쑥밭이 어떠하며 쑥이 돋는 봄이 어떠한 철인지 알 수 없습니다. 능금꽃과 배꽃이 피고 나서 천천히 꽃이 지고 천천히 열매가 무르익는 결을 살피지 않은 채, 저온창고에 있던 열매를 한겨울이나 봄에 가게에서 사다 먹기만 한다면, ‘아무리 좋다고 말하는 과일을 먹는다’ 하더라도 제맛을 알 수 없습니다.


  제철을 모르고 제맛을 모른다면 ‘제삶’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제길’이 아니요, ‘제자리’하고 멉니다. 제자리를 모르기에 어느 곳으로 나아가는 삶인지 모르고, 제자리를 모르니 ‘새걸음’으로 가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만 합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않기에 제대로 모르는 셈입니다. 제대로 살려고 하지 않으니 제대로 사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제대로 알 길조차 없습니다. 이리하여, ‘제결’을 잃은 채 맴돌고, 주머니에 돈이 많을는지 모르나 삶은 조금도 넉넉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습니다.


  겨울에는 찬바람을 마십니다. 봄에는 포근한 기운이 가득한 바람을 마십니다. 여름에는 무더우면서도 시원한 바람을 마십니다. 가을에는 따사로우면서도 살짝 서늘한 바람을 마십니다. 철마다 바람이 다릅니다. 철바람입니다. 바다에서는 바닷바람이고 숲에서는 숲바람입니다. 그러니, 철을 아는 사람은 밥을 알 뿐 아니라, 바람을 압니다. 바람을 살펴 어느 때에 씨앗을 심어야 하는가를 알고, 바람을 살펴 열매를 언제 거두어야 하는가를 알며, 바람을 살펴 보금자리를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가를 압니다.


  밥과 바람을 알기에 흙을 알고, 밥과 바람과 흙을 알기에 풀과 나무를 알며, 밥과 바람과 흙과 풀과 나무를 알기에 해와 별과 달을 알아요. 앎은 차츰 넓고 깊게 퍼집니다. 차츰 넓고 깊게 퍼지는 앎에 따라 삶이 거듭납니다.


  그런데, 사람은 철만 든다고 해서 삶을 이루지 않습니다. 철은 들되 사랑이 없으면 삶이 메마릅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사회에서도 ‘철없는 밥’을 먹는다 하더라도, 기쁜 웃음으로 고맙게 맞아들일 수 있다면, ‘아름다운 밥’으로 몸에 받아들입니다. 이는 곧 ‘아이 마음’입니다. 아이는 따로 씨를 뿌리거나 돌보거나 거두거나 갈무리하지 않아요. 아이는 어른이나 어버이가 차려서 주는 밥을 먹고, 아이는 어른이나 어버이가 지은 집에서 살며, 아이는 어른이나 어버이가 마련한 옷을 입어요. 아이는 아직 철이 들지 않은 목숨인데, 철이 안 들었어도 늘 기쁘게 웃으면서 고맙게 모두 받아들입니다.


  철이 들지 않았다면 ‘아이다운 웃음과 노래’를 누리면서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아이다운 웃음과 노래를 ‘어른이 되어도 그대로 잇는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숨결로 다시 태어나는 하루를 맞이합니다.


  씨앗을 뿌릴 줄 알아도, 웃고 노래하면서 기쁘게 뿌리는 마음이어야 제대로 자라도록 북돋웁니다. 열매를 거둘 줄 알아도, 웃음과 노래와 기쁨과 고마움을 누리면서 나누는 마음이어야 제대로 거두는 손길이 됩니다. 철이 들려는 사람은 ‘어른’이고, 사랑을 가슴에 품으면서 철이 들고자 하는 사람은 ‘어버이’입니다. 4348.3.8.해.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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