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바라보는 눈, 책을 안 보려는 눈
‘바라보는 눈’을 생각하면 무엇이든 바라본다. 그래서 책을 손에 쥐고 읽으려고 할 적에, ‘이 책을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되면, 내가 손에 쥔 책이 몹시 어렵다고 하는 책이라 하더라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기쁘게 헤아리면서 누릴 수 있다. ‘어휴, 이 책 보기 끔찍해’ 하는 마음이 되면, 내가 손에 쥔 책이 참으로 얇고 쉽다고 하는 책이라 하더라도 ‘나로서는 아무것도 못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사람들이 ‘서평단 책읽기’를 하는 일은 오직 ‘서평단으로서 책을 마주하고 읽다가 서평단으로서 글을 쓰는 삶’으로 그친다. 이러한 일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그저 ‘서평단 경험’을 할 뿐이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서평단이 되어 책을 거저로 받아서 읽은 뒤 서평을 올려야 할 적에는, ‘서평 테두리’에서 맴돌기만 한다는 뜻이다. 책을 책으로 마주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서평단이 된다고 하더라도 ‘책읽기를 누리려는 마음’이 되어야 하고, ‘줄거리를 간추려서 얼른 서평을 올려야지’ 하는 생각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책에는 어떤 이야기가 서려서 나한테 삶을 기쁨으로 노래하는 선물을 베풀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책을 바라보는 눈이란, 삶하고 사랑하고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다. 마음에 드는 짝꿍하고 만날 적에, 그러니까 데이트를 할 적에 ‘서평단 책읽기’나 ‘서평단 글쓰기’를 하듯이 후다닥 읽어서 줄거리를 간추리듯이 하루를 보내어도 재미있거나 즐거울까?
책읽기는 ‘줄거리 간추리기’가 아니다. 책읽기는 말 그대로 ‘책을 읽기’이고, ‘책을 읽는다’고 할 적에는 ‘책을 쓴 사람하고 책을 빚은 사람이 일군 삶이랑 사랑을 읽는 몸짓’이다. 책을 쓴 사람하고 책을 빚은 사람이 일군 삶이랑 사랑을 읽지 못하는 몸짓이라면 ‘책읽기’라는 이름을 쓸 수 없다.
‘바람맛’이 좋다고 여기는 사람은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맑고 싱그러운 바람을 끌어들여서 즐겁게 하루를 누린다. ‘바람맛’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도시에서뿐 아니라 시골에서조차 맑거나 싱그러운 바람을 몰라보거나 등진 채 툴툴거리다가 그만 몸을 망가뜨린다.
이름난 작가 한 사람이 썼대서 ‘책맛’이 훌륭하지 않다. 책은 ‘작가 이름’으로 읽지 않는다. 책은 ‘책에 흐르는 이야기맛’을 보려고 읽는다. 요리사가 지은 밥이 맛있을 수도 있을 테지. 그러나 아주 많은 사람들은 요리사 밥맛이 아니라 ‘어머니 밥맛’이나 ‘할머니 밥맛’을 그린다. 드문드문 ‘아버지 밥맛’이나 ‘할아버지 밥맛’을 그리기도 한다. 왜 그러하겠는가? 삶맛하고 사랑맛이 깃든 밥맛이 사람한테 가장 따스하면서 아름답기 때문이다. 4348.7.8.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