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창비시선 167
이경림 지음 / 창비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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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7



시와 삶

―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이경림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7.9.25.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을 적에는 잎만 바라봅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안 봅니다. 햇볕이 내리쬐든 바람이 불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애벌레한테는 잎을 배부르게 갉아먹어서 몸을 살찌우는 일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몸집을 불리고 불린 뒤에 허물을 벗어서 더 큰 애벌레가 되려 하고, 다시 더 큰 애벌레가 되려 하며, 이윽고 밥먹기를 그치려 해요.


  밥먹기를 그치는 애벌레는 깊이 잠들고 싶습니다. 자고 또 자고 다시 자면서 고요히 꿈을 꾸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애벌레는 고치를 짓습니다. 애벌레는 고치에 깃들어 먼먼 옛날부터 ‘저(애벌레)를 낳은 어미가 했’듯이 잠이 듭니다. 잠이 들면서 꿈을 꾸고, 애벌레가 꾸는 꿈은 새로운 몸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지금 누가 실바람으로 잔가지를 지나간다 / 지금 누가 저 황원에서 쓸쓸히 노래하고 있다 (저 깊은 강)


내 속에 궁전 하나 있네 / 사이프러스 나무 숲에 둘러싸인 궁전 (내 속의 알함브라)



  잠에서 깨어나는 애벌레는 온몸이 간지럽습니다. 온몸이 간지러울 뿐 아니라 쑤십니다. 몽툭한 다리가 사라지면서 길고 가느다란 다리가 생깁니다. 더듬이가 생기고 날개가 돋습니다. 길쭉하고 통통하던 몸은 날렵하면서 가벼운 몸으로 바뀝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번데기를 벗고 밖으로 나오면서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애벌레는 한참 동안 몸과 날개를 말립니다. 첫 날갯짓을 하면서 날아오를 때까지 바람이 잠들며, 풀과 꽃과 나무는 새로 깨어난 나비를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풀밭이나 숲에 서면 온갖 나비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눈길을 모아 풀줄기나 나뭇잎을 들여다보면 조그마한 애벌레가 꼬물꼬물 기면서 잎을 갉아먹는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나비가 날고, 한쪽에서는 애벌레가 자라요. 한쪽에서는 풀이랑 나무가 새 잎을 내놓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애벌레가 풀잎이랑 나뭇잎을 갉습니다.


  그리고, 나비뿐 아니라 잠자리도 하늘을 날고, 수많은 새가 저마다 다른 날갯짓으로 하늘을 가릅니다. 나비나 잠자리를 잡아먹는 새가 있고, 나비나 잠자리는 안 쳐다보는 새가 있습니다. 수많은 목숨이 서로 얼크러지면서 들바람이 불고 숲바람이 붑니다.



내가 사랑한 건 그 남자 / 가 아니라 담요였네 언 몸 녹여주던 담요! / 그것의 부드러움 그것의 휘감김 그 가벼움을 / 사랑했네 그 밑의 따스함 그 밑의 어두움 그 밑의 / 은밀함 그 알몸 덮어버리는 폭력! (내가 사랑한 담요)



  이경림 님 시집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창작과비평사,1997)를 읽습니다. 김정란 님은 시집 끝자락에 비평을 붙입니다. 김정란 님은 이경림 님 시를 놓고 “80년대에 등단했더라면, 그녀의 시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경림의 시는 부서진 80년대의 대서사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부활한 90년대의 소서사의 한 전형이다(113쪽).” 하고 말합니다.


  김정란 님이 말하듯이, 참말 이경림 님 시는 1980년대에 살아남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는 ‘똑같이 흘러야’ 하지 않습니다. 더 깊거나 넓게 알아보거나 사랑해 줄 사람이 적더라도, 마음으로 다가서면서 아끼거나 가슴에 품을 사람은 늘 있으리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대서사’이든 ‘소서사’이든, ‘서사(敍事)’란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삶 이야기’입니다. 이름난 사람들 이야기뿐 아니라, 이름 안 난 사람들 이야기요, 권력자나 정치꾼 이야기뿐 아니라, 수수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시골사람 이야기요, 도시에서 옹기종기 모여 어깨동무하는 골목사람 이야기입니다.



참 이상도 하지 산다는 건 / 마알간 잠의 밑바닥에는 바닥 모를 우물이 파이고 / 고통과 사랑과 그리움과 배반과……, / 진짜들은 늘 허공에서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토론토에서)


어머니를 속에 감춘 계집아이 하나와 / 계집아이를 속에 감춘 어머니 하나가 / 손잡고 갑니다 (숨은 모녀)



  삶은 대단합니다. 모든 사람한테 삶은 언제나 오직 하나이기에 대단합니다. 모든 사람한테 ‘똑같은 날’이란 하루도 없기에 삶은 늘 대단합니다. 1월 1일을 이틀쯤 누리거나 7월 1일을 안 누려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루가 스물다섯 시간이거나 열네 시간인 사람은 없습니다. 아파서 자리에 눕느라 다른 일을 못 하더라도, 몹시 바빠서 쉴 겨를이 없더라도, 모든 사람은 똑같은 스물네 시간을 맞아들이고, 똑같은 삼백예순닷새를 맞이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나날을 저마다 새로운 삶으로 누리니, 누구한테나 삶은 대단합니다.


  역사책에 남을 만한 일을 했기에 대단한 삶이 아닙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오르내릴 만한 자리에 서기에 대단한 삶이 아닙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삶이 수수하면서 대단합니다.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고 자장노래를 부르는 삶이 투박하면서 대단합니다. 거리낌없이 뛰노는 아이들 하루가 대단하고, 신나게 웃고 노래하면서 놀 줄 아는 아이들 삶이 대단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삶을 언제나 시로 쓸 수 있습니다. 사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시만 써야 하지 않습니다. 문화를 북돋우거나 예술을 살찌우는 몸짓이 되어야 시가 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쓰기에 시이지 않습니다. 문학상을 타거나 문학잡지에 글을 싣거나 이름난 작가한테서 추천을 받아야 시인이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즐거웁게 받아들이면서 기쁘게 이야기를 짓는 삶이 된다면 누구나 시인입니다. 스스로 즐겁게 가꾸고 기쁘게 일구는 삶을 노래할 줄 안다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덤프트럭은 시절 없이 오가고 방범대원은 골목골목 호루라기를 불어댄다네 / 상처들은 나무마다 환하고 그 사랑 가로등 아래 우울한 그늘 만드네 (상처들은 나무마다 환하다)


가은으로 가는 문은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 사천원짜리 표를 사서 네시간을 달리면 있다 아니 / 가은으로 가는 문은 기억의 직행버스를 타고 슬쩍 / 눈 감으면 있다 거기 검은 마을을 안온하게 지키는 밝은 유리문이 있다 (加恩이라는)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에는 어떤 삶이 깃들었나 하고 돌아봅니다. 바로 이 시를 쓴 이경림 님 삶이 깃들었을 테지요. 눈물이 흐르기도 하는 삶이 깃들고, 웃음이 번지기도 하는 삶이 깃듭니다. 아픈 삶이 깃들고, 설레거나 벅차는 삶이 깃듭니다.


  그늘을 바라본 삶을 시로 노래하고, 햇살을 마주한 삶을 시로 노래합니다. 도시에서 지내던 하루를 시로 읊고, 시골로 마실을 가거나 이웃나라를 다녀온 하루를 시로 읊습니다.


  시집을 덮고 고요히 생각에 잠깁니다. 책상맡에 촛불을 켜고 지긋이 바라봅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저녁에 느즈막하게 잠든 아이들을 가까스로 재우고서 비로소 숨을 돌리는 깊은 밤에 가만히 생각을 기울입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어떤 시를 쓸 만할까요? 나는 오늘 하루 잠들고 나서 이튿날에는 어떤 시를 쓸 만할까요?


  시 한 줄에 흐르는 삶을 읽다가, 내 삶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시 두 줄에 감도는 사랑을 헤아리다가, 내 삶에서 샘솟는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밤오줌을 누려고 큰아이가 잠에서 살짝 깹니다. 쉬를 누고 다시 자리에 누운 아이를 다독입니다. 이불을 여미어 주고, 작은아이도 살핍니다. 이불을 걷어찬 작은아이는 반듯하게 누인 뒤 이불을 새로 여밉니다. 두 아이 사이에 누워 눈을 감으면 언제나 두 팔을 옆으로 뻗어 한손으로 한 아이씩 머리와 가슴과 배와 팔을 살살 어루만지면서 기쁜 꿈을 꾸자고 속삭입니다. 꿈을 꿀 수 있기에 삶이 즐거우면서 아름답겠지요. 4348.7.2.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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