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66 알·애벌레·번데기·나비



  알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알입니다. 알은 으레 풀잎이나 나뭇잎에 처음 자리를 잡습니다. 요즈음은 아파트 벽이나 쇠기둥에도 알이 붙을는지 모르나, 알을 낳는 ‘어미’는 풀잎이나 나뭇잎이 아니라면 아무 데나 알을 두지 않습니다.


  알은 따스한 볕을 받으면서 어느 날 조용히 깨어납니다. 조용히 깨어난 알에서는 아주 조그마한 벌레가 나옵니다. 아주 조그마한 벌레는 ‘아기 벌레’라 할 만합니다. ‘애벌레’입니다. 애벌레는 볼볼 기면서 알껍질부터 갉아서 먹습니다. 신나게 먹은 뒤 쉬고, 다시 먹습니다. 알이 붙은 풀잎이나 나뭇잎도 먹습니다. 신나게 먹고 또 먹습니다.


  잎사귀를 갉아먹는 애벌레는 잎똥을 눕니다. 푸른 빛깔이 도는 똥을 누면서 잎사귀를 꾸준히 먹습니다. 이제 애벌레는 조금 자랍니다. 허물을 벗습니다. 조금 큰 애벌레가 됩니다. 조금 큰 애벌레가 되면 잎사귀를 더 많이 먹습니다. 잎사귀를 더 많이 먹으니, 풀똥을 더 많이 누고, 풀똥을 더 많이 누던 어느 날 다시 허물을 벗어 더욱 큰 애벌레가 됩니다.


  더욱 큰 애벌레는 바지런히 잎사귀를 갉아먹습니다. 이러던 어느 날, 몸이 무척 무겁습니다. 커다란 덩치만큼 굼뜨는 몸은 아닙니다. 어쩐지 잠들고 싶습니다. 아니, 잠들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듯합니다. 맛난 잎사귀를 더 먹지 않습니다. 마땅한 자리를 찾아 꼬물꼬물 기어서 찰싹 달라붙습니다. 이윽고 몸이 딱딱하게 굳습니다. 어느덧 고치가 생깁니다.


  고치에 깃든 애벌레는 조용히 고즈넉히 잠듭니다. 잠든 애벌레는 아주 천천히 번데기로 바뀝니다. 번데기로 바뀐 몸은 그대로 고치에 머뭅니다. 번데기로 몸이 바뀐 줄 깨달은 애벌레는 ‘내가 어디로 가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잠듭니다.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하는 생각도 없이 깊디깊이 잠이 듭니다.


  잎사귀를 잊고, 애벌레 몸뚱이를 잊으며, 번데기가 된 새로운 몸까지 잊은 이 아이는 새로운 꿈을 꿉니다. 꿈결에 바람을 타고 하늘을 가르는 누군가를 봅니다. 바람결이 몹시 보드라우면서 재미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꿈속에서 바람을 부릅니다. 번데기라는 옷(몸)을 입은 아이는 바람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바람아, 나도 네 등을 타고 하늘 구경을 해도 되겠니?” 바람은 고개를 살레살레 젓습니다. “아니야, 나는 아무도 내 등에 태우지 않는단다. 하늘 구경을 하고 싶다면, 네가 스스로 하렴.” “내가 어떻게 하늘을 나니?” “그래, 못 나는구나. 못 날면 할 수 없지. 못 날면 하늘 구경을 못 하지.” “그래도 하늘 구경을 하고 싶어.” “네가 살짝 등을 내 주면 될 텐데.” “아니야. 나는 아무도 내 등에 태우지 않아. 다만, 나는 누구나 하늘로 오르려 하면 함께 놀지. 너도 얼른 이리 와서 나하고 놀자.” “아, 졸립다. 더 자야겠어. 더 잘 테니 이따가 보자.” 바람과 꿈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는 더욱 깊이 잠듭니다. 얼마나 잤을까요. 어느 만큼 꿈속을 헤매었을까요. 번데기는 갑자기 온몸이 간질간질합니다. 고치가 답답합니다. 뭔가 다 벗어 버리고 싶습니다. 갑갑한 껍데기는 이제 내려놓고 싶습니다.


  고치가 갈라집니다. 번데기라는 옷(몸)을 입은 아이는 바깥으로 나옵니다. 눈이 부십니다. 퍽 오랫동안 깜깜한 고치에 깃들어 잠을 잤으니, 눈이 따갑습니다. 게다가 몸이 축축합니다. 내 몸이 왜 이리 축축한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이는 갑자기 등짝이 아픕니다. 등짝이 쩍 갈라집니다. 쩍 갈라진 등짝에서 새로운 몸으로 태어난 아이가 나옵니다. 딱딱한 껍데기를 벗고 바깥으로 나온 아이는 몹시 홀가분합니다. 다만, 눈이 부시고 몸이 축축하니, 눈을 쉬고 몸을 말려야 합니다.


  한동안 잎사귀에 매달려 눈을 천천히 뜨고 몸을 말린 아이는 문득 ‘내 몸이 예전하고 사뭇 다른’ 줄 알아차립니다. 뭘까요? 무엇일까요? 눈을 떠서 하늘을 볼 수 있고, 몸이 다 말라서 가벼운 아이는, 잎사귀를 붙잡은 발을 모두 놓습니다. 어느새 하늘을 가르면서 바람 옆을 함께 납니다. 어, 이 아이 등에 날개가 달렸습니다. 이 아이는 나비입니다. 조그마한 알에서 애벌레를 지나고 번데기를 거쳐서 새로 태어난 나비입니다. 나비는 바람 등짝을 간질이면서 날개를 팔랑입니다. 바람은 새로 찾아온 동무가 반갑습니다. 오래오래 함께 하늘을 누빕니다. 파란 하늘에서 파란 숨을 마시면서 새롭게 삶을 누립니다. 4348.3.4.물.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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