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철든 날 사계절 중학년문고 31
이수경 지음, 정가애 그림 / 사계절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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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0



철이 드는 어른은 동시를 노래한다

― 갑자기 철든 날

 이수경 글

 정가애 그림

 사계절 펴냄, 2014.6.18.



  고단한 아이는 갑자기 코피를 쏟습니다. 어른만 코피를 쏟지 않습니다. 아이도 코피를 쏟습니다. 어른은 몸이 힘든데 억지로 일을 하려니 코피를 쏟고, 아이는 몸이 고단한데 더 놀려고 악을 쓰다가 코피를 쏟습니다. 어른은 할 일이 많다는 생각에 눌려 코피를 쏟고, 아이는 더 신나게 놀고픈 마음에 잠을 미루다가 코피를 쏟습니다.


  오늘 아침에 작은아이 코피를 봅니다. 예전에는 큰아이가 코피를 자주 흘렸습니다. 코가 안 좋기도 했지만, 저녁 늦도록 잠을 안 자고 놀려고 하면, 하루 내내 개구지게 뛰놀고는 저녁에도 잠을 미루고 놀려고 하면, 어김없이 이튿날에 코피를 쏟습니다.


  코피를 쏟은 작은아이를 일으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습니다. 작은아이는 “코피 다 닦았어?” 하고 묻더니 이부자리로 달려갑니다. 저도 몸이 힘든 줄 알 테지요. 장난감 몇 가지를 들고 이부자리에서 꼼지락꼼지락 춤추면서 놉니다.



마당에 쌓인 눈 / 다 녹던 봄날 // 왕 구슬 한 개와 / 누나 머리핀 // 햇살에 반짝반짝 / 빛나고 있더라. (술래가 찾은 것)



  이수경 님이 쓴 동시를 그러모은 《갑자기 철든 날》(사계절,2014)을 읽습니다. 《갑자기 철든 날》을 읽으면 여러모로 시골살이 모습이 흐르고, 시골집에서 수수하게 노는 아이들 모습이 흐릅니다. 눈밭이 봄볕에 스러진 뒤에 찾은 구슬이랑 머리핀을 놓고 살가운 이야기가 흐르고, 한껏 무르익은 봄에 바쁘게 일손을 놀리는 사람들 이야기가 흐릅니다.



나락 담그고 / 모판 내고 / 모 숨구고 / 들깻모 붓고 / 수수 모종 내고 / 깻모 안기고 (우리 마을 사람들)


바구니 / 옆에 끼고 / 터벅터벅 / 사랫길 걷다 보면 // 풍뎅이 / 사슴벌레 / 대벌레 / 사마귀 / 방아깨비 / 주홍박각시 애벌레 / 나비 번데기 (마중)



  이제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바구니를 옆에 끼고 사랫길’을 걷는 아이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도시에는 사랫길이란 없고, 고샅길도 없으며, 오솔길이라든지 냇둑길이란 없습니다. 도시에는 골목길도 많이 줄었고, 풀밭길을 찾아보기도 어렵습니다. 곤충도감이나 그림책을 들추면 풍뎅이도 사슴벌레도 대벌레도 사마귀도 방아깨비도 애벌레도 번데기도 나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사는 도시 한복판에서 이러한 ‘벌레동무’를 만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만날 수 있는 벌레는 바퀴벌레나 파리나 모기쯤입니다. 나비나 벌을 구경하기는 대단히 어려울 테고, 나방조차 좀처럼 구경하지 못할 수 있어요. 도시 아이들은 두 가지 하루살이가 있는 줄 알지 못할 테지요.


  그런데, 요즈음 도시 아이뿐 아니라 요즈음 도시 어른도 벌레동무를 잘 모르기 일쑤입니다. 《갑자기 철든 날》을 쓴 이수경 님은 여러 벌레동무와 꽃동무와 나무동무 이야기를 동시로 빚습니다. 요즈음 도시 아이들한테서 멀어지거나 잊혀지는 살가운 동무를 동시에 곱게 담아서 보여줍니다.



중간고사 준비하는 동안 // 쑥부쟁이 지나갔습니다. / 꽃향유도 지나갔습니다. / 개여뀌도 지나갔습니다. (본 척도 못한 가을)


“얘들아, 눈 왔어.” / 그 소리에 // 큰형 / 벌떡 일어납니다. // 나도 / 발딱 일어납니다. (우리를 일으키는 말)



  눈이 왔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날 만한 아이들이 아직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주차장 한쪽에서 눈뭉치를 겨우 굴리더라도,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눈이 올 적마다 길이 막힌다고 떠들더라도, 눈이 내리는 겨울을 기쁘게 맞이할 아이들이 도시에도 아직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가 온다는 소리에도 벌떡 일어날 만한 아이들이 아직 있으리라 생각해요. 비록 도시에서 빗물놀이를 하기는 어렵더라도, 도시에서 빗물놀이를 하다가 자동차에 치일까 걱정하는 어른이 많더라도, 웅덩이를 찰방찰방 밟으면서 옷을 다 적시고는 까르르 웃는 아이들이 도시에도 아직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놀면서 자라는 아이요, 놀면서 꿈을 키우는 아이입니다. 놀면서 서로 아끼는 마음을 가꾸는 아이요, 노는 동안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기쁨을 배우는 아이입니다.



외할아버지가 / 전화하시면 // 미역 딴 거 보냈다. / 끊자! / 뚝… // 물고기 몇 마리 보냈다. / 끊자! / 뚝… (이상한 전화)



  우리 어른은 모두 어른이면서 아이입니다. 아기로 태어나서 아이로 자라지 않고서는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마흔 살이건 여든 살이건 모두 아기와 아이 나이를 지나왔습니다. 마흔 살 어머니나 아버지라 하더라도 여든 살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는 그저 ‘아기’이거나 ‘아이’입니다.


  이리하여,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이녁 아이인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시골에서 거둔 여러 가지를 틈틈이 보냅니다. 도시에서 돈을 잘 벌는지 몰라도, 밥은 제대로 챙겨서 먹는지 걱정스러우니 ‘마흔 살 아이’한테 이것도 보내고 저것도 보냅니다.


  《갑자기 철든 날》에 나오는 〈이상한 전화〉 같은 동시를 아이들은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요? 이 동시는 아이한테 재미나거나 사랑스러운 동시가 될 수도 있을 테지만, 아이보다는 어른한테 재미나거나 사랑스러운 동시가 되리라 느낍니다.



소윤이 네 단점? // 신경질 잘 부리고 / 짜증 잘 내고 / 불뚝불뚝 화 잘 내고 / 투덜투덜거리고 / 잘 삐치는 것 빼곤 / 없을걸? // 나 꼬집는 거 말곤 / 없을걸? (좋아하게 되면)



  곰곰이 따지면, 동시는 어린이한테 읽히는 노래가 아닐 수 있습니다. 동시를 쓰는 어른이 저마다 이녁이 어릴 적에 무엇을 하면서 놀았는가 하는 이야기를 풀어놓은 노래가 동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른이 저마다 ‘오늘날 아이들한테 물려주고 싶은 이녁 옛이야기’를 동시라는 틀에 담아서 이야기꽃을 피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새롭게 태어나서 자라는 아이들한테 ‘앞으로 마음에 담아 고운 꿈을 키우는 길에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씨앗 한 톨을 이야기로 엮는 글을 동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사랑하기에 동시를 쓴다고 할 적에는, 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란, 어른인 내가 아이로 뛰놀던 나날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오늘 이곳에서 아이로 뛰노는 ‘이웃사람(몸이 작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 걸어갈 길을 사랑하는 마음이지 싶습니다.


  철이 드는 어른이 동시를 씁니다. 철이 드는 어른이 아이들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동시를 읽습니다. 철이 드는 어른이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웃고 노래하기에 동시가 한 줄 태어납니다. 철이 드는 어른이 아이다운 마음으로 삶을 사랑하기에 동시가 새삼스레 두 줄 석 줄 넉 줄 자라납니다. 4348.6.1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동시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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