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실 이야기 - 귄터 그라스 자전 소설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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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을 글로 남기고 싶은가

― 암실 이야기

 귄터 그라스

 장희창 옮김

 민음사 펴냄, 2015.5.1.



  귄터 그라스 님은 2015년 4월 13일에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2006년에 이녁 자서전인 《양파 껍질을 벗기며》를 내놓을 적에 ‘히틀러 나치 친위대’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대목을 처음으로 밝혔다고 합니다. 《암실 이야기》는 《양파 껍질을 벗기며》를 선보인 뒤에 내놓은 ‘자전 소설’로, 귄터 그라스 님이 아이들하고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았다고 합니다.



.. 그리고 라라, 너는 말이야, 정말이지 강아지 한 마리를 가지고 싶어 했지. 그리고 자기가 제발 막내딸이었으면 하고 바랐어 … 아버지가 《양철북》으로 단단히 한몫 잡은 덕분에 우리와 많은 손님들을 위해 심지어 양의 허벅지 살을 사 줄 수도 있었지 … 어쨌든 우리는 몰랐어. 왜 그렇게 다들 갑자기 우왕좌왕하는지, 그리고 왜 우리 어머니가 트렁크를 재빨리 꾸려, 라라, 너와 함께 그래 어머니의 고향인 스위스로 달아나려 했는지 ..  (11, 39, 51쪽)



  그나저나 ‘나치 친위대’란 무엇일까요? 인터넷 백과사전을 살펴보니, ‘나치 친위대’는 ‘일반SS’와 ‘무장SS’가 있다고 합니다. “일반SS는 경찰과 인종 업무를 맡았”고, 무장SS는 “전투능력이 탁월할 뿐 아니라 나치스 단체 가운데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며 광신적인 활동으로 악명 높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SS 대원들은 다른 인종을 증오하고 인간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교육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정치범, 집시, 유대인, 폴란드 지도자, 공산당 간부, 게릴라 저항군, 소련 전쟁포로들을 대량 학살했다. 독일이 패배한 후 1946년 뉘른베르크 연합국재판소에서 범죄단체로 선언했다”고 합니다. (인터넷 두산백과에서 살펴봄)


  귄터 그라스 님은 폴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폴란드에서 태어난 귄터 그라스 님은 바로 ‘폴란드 지도자’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을 끔찍하게 죽이거나 괴롭히는 짓을 일삼은 ‘나치 친위대’로 지내면서 1940년대를 가로지른 셈입니다.


  2006년에 귄터 그라스 님이 이녁 발자국을 밝힐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이 대목을 몰랐을까요? 아니면, 귄터 그라스 님이 숨을 거둔 뒤에 이 대목이 알려질 수 있었을까요? 어느 모로 본다면, 아무도 귄터 그라스 님더러 이녁 발자국을 밝히라고 하지 않았을 텐데, 굳이 예순 해 남짓 지난 예전 일을 왜 털어놓으려고 했을까요? 죽음을 앞두고 도무지 이녁 발자국을 꽁꽁 감춘 채 떠날 수 없다고 느꼈을까요?



.. 나중에는 프리데나우의 주말 시장에서 생선도 찍었지. 그리고 반으로 가른 양배추의 알속도. 하지만 이미 카를스바트 시절부터 마리헨은 아빠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뭐든지 찍었어 … 마리헨은 제대로 정리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보다, 아이들이 입에 올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찍었던 거야 … 열일곱 살 먹은 너희들이 병사처럼, 장화를 신고 머리에 철모를 쓰고 어쩌면 기관총까지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겠지. 전쟁 기간에 그 자신이 그런 모습을 해야 했던 적이 있으니까 ..  (20, 58, 72∼73쪽)



  《암실 이야기》라는 책에는 귄터 그라스 님이 낳은 여덟 아이 이야기가 찬찬히 흐릅니다. 여덟 아이와 함께 여러 ‘아이 어머니’ 이야기가 흐르고, 귄터 그라스 님 둘레에서 ‘온갖 사진을 찍어 주면서 함께 지낸 여성’ 이야기가 어우러집니다. 그리고, 책이름처럼 ‘암실’과 얽힌, 그러니까 ‘사진을 찍는 삶’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로지릅니다.



.. 난 이따금 이런 생각이 들어. 아마도 우리 엄마는 성격상 싸움을 나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고. 반면에 아빠는 어떤 싸움도 견디지 못했어 … 꼬마 나나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감쪽같이 몰랐어. 우리 아빠가 더 이상 비밀을 혼자만 간직할 수 없어 레나에게 이렇게 말할 때까지는 말이야. “그런데 너한테 여동생이 있단다. 정말 귀엽지.” 아니면 비슷한 말이었겠지. 아빠가 속을 털어놓을 때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던 거야 … 쌍둥이 형이 질문을 던진다. 형제자매 중 유명한 아버지 때문에 가장 힘들어했던 사람이 누구냐고 ..  (120, 171, 223쪽)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사진은 무엇을 적바림할까요? 사진을 찍으면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을 무엇을 바라보았을까요? 사진을 읽는 사람은 사진 한 장에서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릴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과 사진에 찍히는 사람은 저마다 어떤 눈길과 마음일까요?


  그러면, 글이란 또 무엇일까요? 글은 무엇을 적바림할까요? 글을 쓰면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요? 글을 쓰는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았을까요? 글을 읽는 사람은 글 한 줄이나 책 한 권에서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릴까요? 글을 쓰는 사람과 글에 깃드는 사람은 저마다 어떤 눈길과 마음일까요?


  귄터 그라스 님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길을 걷습니다. 무엇이 귄터 그라스 님을 사로잡아서 ‘글 쓰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암실 이야기》에도 언뜻선뜻 드러나는데, 귄터 그라스 님은 ‘글을 쓰느라 바쁘고 힘들’어서 아이를 여덟을 낳기는 했지만 정작 아이하고 스스럼없이 뛰놀거나 호젓하게 하루를 누리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소설책 《암실 이야기》는 실마리를 알려주거나 실타래를 풀지 않습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수께끼만 보여줍니다. 바람처럼 찾아와서 사진을 찍은 ‘마리헨’이라는 사람이 마지막에도 바람처럼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졌다고 하면서, 모든 삶과 꿈과 사랑이 바람과 같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 마리헨은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했거든. “제방에서, 바람을 좀 찍어 보고 싶어. 바깥엔 폭풍우가 멋지게 불고 있잖아. 같이 갈래, 파울헨?” … 이제 아이들은 서로를 본래 이름으로 부른다. 아버지는 어느새 오그라들면서 슬쩍 사라지려 한다. 아이들 사이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의심이 쏟아진다. 그가, 오직 그만이 마리헨의 유산을 물려받았어. 그리고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박스도 자기가 숨겨 놓았어 ..  (239, 244쪽)



  바람이 불어 싱그럽고 시원한 여름입니다. 바람이 흘러서 누구나 숨을 쉬면서 목숨을 잇습니다. 햇볕과 함께 빗물과 바람이 있으니 풀과 나무가 푸르게 자랍니다. 바람이 부는 하늘은 파랗고, 하늘을 닮아 바다가 파랗게 빛납니다.


  귄터 그라스 님은 이녁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으로 살면서 아이를 낳았고 글을 썼습니다. 귄터 그라스 님이 낳은 아이들은 저마다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으면서 새롭게 삶을 지어 새삼스레 아이를 낳습니다.


  ‘양파 껍질을 벗기’면 새로운 껍질이 속에 있습니다. 양파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다 보면 그만 속이 모두 사라집니다. 오늘날 디지털사진기는 사진을 찍은 뒤에 암실에 갈 일이 없으나, 지난날 필름사진기는 사진을 찍었으면 반드시 암실에 가야 했습니다. 단추를 눌러 찰칵 소리가 나면 사진을 찍고, 암실에서 새까만 어둠을 오래도록 받아들이면 종이 한 장에 그림이 살며시 드러납니다.


  숱한 일을 치르기만 해서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숱한 일을 치르고 나서 조용히 삭이는 나날을 보내기에 비로소 글을 씁니다. 그러니까, 귄터 그라스 님으로서는 이녁 어린 날을 밝히는 글을 2006년에 이르러 비로소 쓸 수 있던 셈이고, 여덟 아이를 낳고 여러 ‘아이 어머니’를 둔 살림살이는 2008년에 이르러 바야흐로 털어낼 수 있던 셈입니다.


  귄터 그라스 님네 아이들은 서로 “형제자매 중 유명한 아버지 때문에 가장 힘들어했던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누구일까요? 누가 ‘유명한 아버지’ 때문에 가장 힘들었을까요? 아마 바로 ‘아버지’인 귄터 그라스 님이겠지요.


  슬픔도 생채기도 아픔도 모두 글로 씁니다. 꿈도 사랑도 삶도 모두 글로 씁니다. 귄터 그라스 님,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따스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느긋하게 삶을 짓고 사랑을 꽃피우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이든 너무 오랫동안 혼자 가슴에만 묻어두지 마셔요. 다 괜찮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를 미워할 수 없고, 어버이도 아이들을 미워할 수 없어요. 4348.5.2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문학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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