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초롬한 빛깔말

 빛깔말 - 감빛


가끔 울퉁불퉁한 양은 그릇에 싸라락거리며 보리쌀 씻는 소리나, 톡톡거리며 나무 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곤 했는데, 엉금엉금 기어가 밥상문의 문고리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문턱을 짚은 채 찡그린 얼굴로 억지 눈을 뜨고 내다보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얼굴은 감빛으로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언제 일어나셨는지 비땅으로 땔나무를 이리저리 들춰가며 밥을 하고 계셨지요

《함성주-내 어머니의 등은 누가 닦아 드렸을까》(월간 말,2004) 19쪽



  한가위 즈음이면, 감나무마다 감이 발갛게 익은 곳이 있고, 한창 익는 곳이 있습니다. 언제쯤 따먹으면 맛있을까 하고 하염없이 감나무를 올려다보기 마련입니다. 감알은 한꺼번에 익지 않습니다. 먼저 익는 감알이 있고, 나중에 익는 감알이 있습니다. 감꽃이 한꺼번에 피어나지 않기에 감알도 한꺼번에 맺히지 않습니다. 따먹고 또 따먹으면 새롭게 익는 감알이 나오고, 잘 익은 감알도 더 깊이 익기 마련입니다.


  이 글월을 보면, “밥하는 어머니 얼굴에 비치는 아궁이 불빛은 감빛으로 일렁인다”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시골집은 오늘날에는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아궁이에 불을 땐 적이 있는 사람도 차츰 줄어들 뿐 아니라, 요즈음 아이들은 이런 일을 해 본 일이 아예 없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니, 아궁이 앞에 쪼그려앉을 적에 얼굴에 비치는 ‘빛깔’을 헤아릴 만한 사람도 드물겠구나 싶습니다.


 아궁이 불빛

 아궁이 앞에서 일렁이는 감빛


  ‘감빛’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감빛은 감꽃이 아닌 감알 빛깔을 가리킵니다. 감알 빛깔 가운데 빠알갛게 잘 익은 빛깔을 가리킵니다. 덜 익은 감알이 아닌 ‘잘 익은 감알’을 놓고 ‘감빛’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잘 익은 감도 여러 빛깔입니다. 새빨갛고 말랑말랑한 감알이 있고, 노란 빛깔이 함께 감돌듯이 발그스름한 단단한 감알이 있습니다.


  감빛을 말하려 한다면 아무래도 ‘말랑감빛’하고 ‘단감빛’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해야 하리라 느낍니다. 이렇게 두 가지 감빛을 말한다면, 시골이든 도시이든 감빛이 어떠한 빛깔인지 더 또렷이 알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말랑감빛(빨강) ← 적색

 단감빛 ← 주홍빛

 감빛 ← 주황빛


  더 살핀다면, ‘단감빛’은 한자말로 쓰는 ‘주홍빛’하고 아주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말랑감빛’이라면 아주 새빨간 빛깔이니 한국말 ‘빨강’이나 한자말 ‘적색’하고 한동아리가 될 만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면, 그냥 ‘감빛’이라고 하면 어떤 빛깔이라고 할 만할까요? ‘감빛’은 말랑감빛과 단감빛 사이라고 해야 할 테고, 아무래도 이 빛깔은 한자말로 쓰는 ‘주황빛’하고 한동아리로 여겨야 하리라 느낍니다.


  가을에 감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헤아리면서 감빛을 돌아봅니다. 온갖 빛깔로 다 다르게 물드는 감잎처럼, 감빛도 날마다 새롭게 거듭나는 고운 빛깔이로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4339.10.4.물/4348.5.6.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빛깔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