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그내면과외면
마크드 프라이에 / 행림출판사 / 1990년 8월
평점 :
품절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92



너희가 태어나고 내가 자란 곳

― 한국KOREA, 그 내면과 외면

 마크 드 프라이에 사진

 행림출판 펴냄, 1990.8.30.



  제가 나고 자란 곳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굳이 다른 곳은 돌아보지 않고 제 삶자리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 멀리 돌아다니면서 다른 고장을 사진으로 찍을 만할 텐데, 굳이 다른 고장으로 마실을 다니지 않으면서 제 고장에서만 즐겁게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은 사진으로 안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즐겁게 온갖 곳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기쁘게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찍고 저곳에서도 찍어요. 그런데 막상 제가 나고 자란 곳만큼은 찾아가지 않는 사람이 있고, 제가 나고 자란 곳에 찾아가더라도 이곳을 사진으로 안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고 자란’ 제 고장을 사진으로 찍기에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마음을 붙이면서 지내는’ 고장을 사진으로 찍기에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어느 고장을 사진으로 찍든, 우리는 저마다 ‘마음에 사랑스레 스며드는 고장’을 기쁘게 맞아들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이 고장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서 ‘이 고장 모습’을 누구보다 잘 찍거나 훌륭하게 찍지 않습니다. 이 고장에서 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은 사람이기에, 어쩌다 한두 번 찾아와서 며칠이나 몇 달이나 몇 해쯤 머무르는 눈길이나 몸짓으로는 ‘이 고장 모습’을 제대로 못 찍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 하늘에는 계절이 있고, 땅에는 실체가 있다. 모든 물질에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듯, 모든 작업에는 장인 정신이 깃들어 있는 법이다 ..



  “난희와 교에게. 여기가 바로 너희들이 태어난 땅이란다.”로 첫머리를 여는 사진책 《한국KOREA, 그 내면과 외면》(행림출판,1990)을 읽습니다. 벨기에사람 마크 드 프라이에 님이 빚은 사진책입니다. 벨기에라는 나라에서는 손꼽히는 사진가라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리 안 알려진 사진가입니다. 사진책 《한국》을 선보인 적이 있으나, 이 사진책은 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자취를 감춘 지 제법 되었습니다.


  사진책 《한국》 첫머리는 “여기가 바로 너희들이 태어난 땅이란다”로 엽니다. 무슨 말일까요? 어떤 뜻일까요? 아마 마크 드 프라이에 님은 한국 아이를 둘 받아들여서 이녁 아이로 돌보았다는 뜻이겠지요. 한국에서 벨기에로 가야 하던 아이들한테 ‘너희가 태어난 곳’이 어떤 삶자리인지 보여주려는 마음으로 빚은 책이라는 말일 테지요.


  문득 ‘내 고장’을 떠올립니다. ‘내 고장’은 어디일까요? 내가 태어난 곳이면 내 고장이 될까요? 오늘 내가 사는 곳이 내 고장이라 할까요?


  ‘이 글을 쓰는 내’가 태어난 고장은 인천입니다. 광역시도 직할시도 아닌 ‘경기도 인천’일 적에 그곳에서 태어났고 자랐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공장에서 내뿜는 매연을 늘 맡으면서 국민학교를 다녔고, 연탄공장 탄가루를 함께 마시면서 어린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루 내내 철길 소리를 들었고, 큰 짐차 소리를 들었습니다. 동무들과 골목에서 뛰놀고 바닷가나 둠벙을 찾아다니며 낚시를 하기도 했지만, 내 어릴 적 고장인 인천은 매캐한 바람과 조용한 골목 두 가지입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이 고장을 떠났고, 사진을 처음 배우고 나서도 다른 고장(서울)에서 사진을 찍을 뿐, ‘태어난 고장’을 사진으로 찍으려는 생각은 조금도 안 했습니다. 서른세 살 무렵에 ‘태어난 고장’으로 돌아가서 ‘사진책도서관’이라는 곳을 연 뒤에 비로소 ‘내 고장’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태어난 고장’을 사진으로 찍지 않고, ‘사는 고장’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물을 둘러보면서 그 고유한 균형미를 창출해 낸 정교한 감성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고,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사진책 《한국》을 보면 한국 사진가로서는 거의 안 찍는다 싶은 모습이 처음부터 끝까지 흐릅니다. 절집 사진이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한국 사진가가 절집에 찾아가서 흔히 찍는 모습을 사진책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절집으로 들어서는 문간에 붙은 백열등을 한국 사진가가 찍을 일은 없겠지요. 절집에서 빨래를 하는 스님 모습을 한국 사진가가 찍는 일도 매우 드뭅니다. 꽃무늬 문살을 찍은 사진에서도 마크 드 프라이에 님은 ‘문살 무늬’보다 ‘문살에 드리운 그림자’가 한결 도드라진 사진을 보여줍니다.


  여느 시골집 수수한 마당과 살림살이를 보여줍니다. 시골에 세우는 기도원 같은 예배당 사진도 여러 장 나옵니다. 그런데 기도원인지 예배당인지 헷갈릴 만한 시설을 찍은 사진도, 이 시설 둘레에 우거진 숲과 파란 하늘을 함께 보여줍니다. 둘레에서 한들거리는 들꽃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사진책 《한국》은 ‘겉과 속(내면과 외면)’을 보여준다고도 하겠지요. 그러나 ‘겉과 속’이라기보다는 그저 ‘삶’입니다. 여기에서도 보고 저기에서도 보는 삶입니다. 너한테서도 보고 나한테서도 보는 삶이에요. 한국이라는 나라에 두 발을 디디고 지내는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삶입니다. 잘나지도 않고, 못나지도 않은 삶입니다. 올림픽을 둘러싸고 정부에서 자랑하려고 하는 높다란 건물이 서는 한국이 아니고, 포항제철이라든지 커다란 공단을 내세우려고 하는 한국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밥상에 나란히 둘러앉아서 어우러지는 수수한 삶이 흐르는 한국입니다. 골목과 고샅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있는 한국이고, 저잣거리에서 부산한 이야기가 있는 한국입니다.






.. 한국사람에게나 서양사람에게나 공통적으로 통하는 말이 있다. “사진은 천 마디의 말을 한다”는 것이다 ..



  밖에서 보아야 안을 더 잘 보지 않습니다. 안에만 있기에 안을 못 보지 않습니다. 밖에 있든 안에 있든,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난 고장’을 사진으로 찍든, ‘사는 고장’을 사진으로 찍든, 스스로 ‘이 고장’을 사랑하려는 마음일 때에는, 이 고장을 찍은 사진이 사랑스럽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무너지거나 사라지는 흐름’을 보거나 느끼려 하는 마음이라면, 어느 고장을 가더라도 무너지거나 사라지는 모습만 마주하면서 이런 사진을 찍습니다.


  티벳이나 부탄이나 스리랑카에 가야 거룩한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거룩한 숨결로 거듭나면서 이웃을 거룩한 사랑으로 어깨동무할 수 있다면, 바로 이곳에서 내 옆집에 있는 아주머니나 아저씨를 사진으로 찍으면서도 거룩한 숨결이 드러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처럼 지구별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온갖 모습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마크 드 프라이에 님처럼 ‘한국에서 벨기에로 날아와야 했던 두 아이’를 헤아리면서 두 아이한테 선물하려는 마음으로 온사랑을 담아서 아주 작은 삶자리를 뚜벅뚜벅 걸어다니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삶을 찍기에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찍기에 이야기가 피어납니다. 관광지에 간다면 관광사진을 찍습니다. 여행지에 간다면 여행사진을 찍어요. 명상을 하거나 종교가 흐르는 곳에서는 명상사진이나 종교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갈래를 지으면 사진이 좀 재미없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내가 일구는 삶을 바라보고, 이웃과 동무가 누리는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 재미있고 웃음꽃이 가득한 이야기가 흐르는 사진이 됩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다릅니다. 철마다 다릅니다. 아니, 철마다 새롭습니다. 한곳에 머물며 사진을 찍어도 철철이 다른 사진을 빚습니다. 한 사람을 바라보며 찍어도 ‘삶이 흐르고 나이가 흐르며 이야기가 흐르는’ 숨결을 얼마든지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딱 하루만 머무르더라도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에 흐르는 바람과 기운이 다르니까, 아니, 새로우니까, 다름을 느끼는 마음이라면 ‘다른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고, 새로움을 느끼는 가슴이라면 ‘새로운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습니다. 한 시간쯤 골목을 걸어도 사진책 한 권이 태어날 수 있을 만큼 ‘다르거나 새로운’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 다르거나 새로운 마음이 된다면 말이지요.





.. 한편으로는 한국사람과 함께 살면서 복잡한 인간관계를 몸소 체험해 볼 수도 있고, 종교나 철학을 탐구해 볼 수도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음식을 먹어 보거나, 그저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사진책 《한국》을 이녁 두 아이한테 선물하는 마크 드 프라이에 님은 한국사람한테도 선물을 베풉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살거나, 한국으로 와서 사는 사람 모두한테 싱그러운 선물을 나누어 주어요. 어떤 선물인가 하면, 우리 누구나 바로 오늘 이곳에서 무엇을 하든 저마다 기쁘며 신나게 ‘삶’을 누릴 테니까, 이 삶을 고맙게 여기고 사랑스레 마주하면, 언제 어디에서나 아름다운 이야기잔치를 열 수 있다는 말을 들려주는 선물입니다.


  그저 여기에 있기만 하면서도 흐뭇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있어서 하하 호호 웃을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내가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사진을 찍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맛집을 찾아나서도 재미있고, 골목을 거닐어도 재미있으며, 시골마실을 다녀도 재미있습니다. 이불빨래를 사진으로 찍어도 재미있고, 냇가이든 수영장이든 물놀이를 즐기는 ‘우리 집 아이’를 사진으로 찍어도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찍는 사진에서는 바로 ‘우리 스스로’ 고운 님이 됩니다. 4348.4.1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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