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50 떨잎·가랑잎·진잎



  잎사귀가 떨어집니다. 바람이 불어 그만 톡 끊어져서 떨어집니다. 아직 푸른 잎사귀인데, 그만 바람을 맞고 떨어집니다. 때로는 벌레가 갉아서 떨어집니다. 때로는 새가 쪼거나 밟아서 떨어집니다. 어느 때에는 아이들이 장난스레 놀다가 떨어지고, 어른들이 툭 치고 지나간 탓에 떨어집니다. 더 햇볕을 쬐면서 푸르게 노래하고 싶던 잎사귀는 몹시 아픕니다. 서운하고 서러우며 슬픕니다. 그래서 땅바닥으로 떨어진 잎, ‘떨잎’은 한동안 푸른 빛을 고스란히 지킵니다. 다시 나뭇가지에 붙고 싶습니다.


  ‘가랑잎’은 다 마른 몸뚱이인데 안 떨어지기도 합니다. 나뭇가지에 말라붙은 채 대롱대롱 매달리며 겨울을 나기도 합니다. 다 말랐으면 흙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가랑잎 가운데 나뭇가지한테서 안 떨어지려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미나무가 그리울까요. 어미나무한테 매달려서 칭얼거리려는 뜻일까요. 봄까지 버틴 가랑잎도 있지만, 봄이 되어 새로운 잎이 하나둘 돋으면, 가랑잎은 어느새 톡 떨어집니다. 다른 모든 가랑잎이 지난가을과 지난겨울에 떨어져서 찬찬히 삭아서 흙으로 돌아간 뒤에 비로소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때에는 흙땅에서 흙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봄이 되면 흙에서도 새로운 풀이 돋으니까요. 새롭게 자라려는 풀잎은 봄에 떨어진 가랑잎이 성가십니다. 왜 이제서야 떨어져서 ‘내 햇볕’을 가르느냐고 성을 냅니다.


  가을과 겨울에 떨어진 가랑잎은 겨우내 풀벌레한테 보금자리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겨울잠을 자는 풀벌레는 가랑잎이 소복히 쌓인 데를 찾아서 조용히 깃들어요. 그러니, 가랑잎은 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으로 다시 태어날 뿐 아니라, 흙땅에서 겨울잠을 잘 조그마한 풀밭 동무와 이웃한테 고맙고 너른 품이 되어 주지요.


  ‘진잎’은 이제 다 말라서 지는 잎입니다. 질 때가 되어, 지는 잎입니다. 아직 덜 말랐어도 잎이 지기도 합니다. 이제 그만 나뭇가지한테서 떨어져 흙으로 일찌감치 가려는 마음입니다. 나뭇가지는 진잎더러 더 머물다 가라고 말하지만, 진잎은 괜찮다면서 손을 젓습니다. 어차피 곧 갈 흙이라면, 일찌감치 떨어져서 흙내음을 맡겠노라 합니다. 진잎은 씩씩하게 흙 품에 안겨서 바람 따라 또르르 구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사람들 눈에 뜨입니다. 사람들은 진잎을 보고는 한 마디 하지요. “어머나, 어쩌면 이렇게 빛깔이 고울까.” 사람들은 진잎을 찬찬히 살피면서 한둘쯤 골라서 줍습니다. 책 사이에 꽂습니다. 책 사이에 꽂고는 알맞게 눌러서 마저 말리면 멋진 책살피로 거듭납니다. 진잎은 일찌감치 흙으로 돌아가려고 나뭇가지를 떠나는데, 이 아이들 가운데에는 사람들 손을 거쳐서 오래도록 새로운 숨결로 다시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어요.


  잎은 모두 같은 잎입니다. 그러나, 잎은 모두 다른 삶을 누립니다. 잎은 모두 똑같은 어미나무한테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잎은 모두 다른 삶을 지으면서 다른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더 좋거나 나쁜 삶은 없습니다. 책살피가 된 진잎을 빼고는 모두 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으로 살아나고, 새로운 흙으로 살다가 다시 어미나무 뿌리를 거쳐서 새로운 잎사귀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돌고 돌고 다시 돌면서 새로운 숨을 받습니다. 돌고 돌고 또 돌면서 새로운 바람을 마십니다. 나뭇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릅니다. 나뭇잎이 추는 춤과 부르는 노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오늘까지 곱게 흐릅니다. 4348.3.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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