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59. 교과서에 ‘한자’를 넣을 까닭이 없다
― ‘입시공부’ 아닌 ‘넋 살찌우는 말’을 살펴야
숲을 그릴 수 있으면 모든 말이 고운 숨결이 되리라 느낍니다. 숲을 그리지 못하면 어느 말을 쓰든 고운 넋이 못 되는구나 싶어요. 그러니까, 어른이 먼저 어떤 말을 써야 하고, 아이한테 어떤 말을 물려주어야 하는가를 슬기롭게 살핀다면, 어른과 아이 모두 슬기로우면서 고운 넋이 됩니다. 어른부터 스스로 어떤 말을 써야 하는지 깨닫지 않는다면, 어른과 아이 모두 어리석거나 바보스러운 말을 쓸 뿐 아니라, 넋과 삶 모두 어리석거나 바보스러운 길로 흐르고 맙니다.
초등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치든 영어를 가르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한자와 영어를 외국말로 옳고 바르면서 슬기롭고 아름답게 가르치면 됩니다. 그러나, 이 나라 정치권력은 초등학교에서 한자와 영어를 외국말로 똑똑히 가르치거나 제대로 가르칠 뜻이 아닙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초등학교에서 한국말부터 옳거나 바르거나 슬기롭거나 아름답게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뿐 아니라 중·고등학교에서도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치는 얼거리가 없고, 교사는 교사대로 대학입시에 매달리느라 한국말은 뒷전으로 밀어두기 마련입니다.
나라(정치권력)에서 교과서에 한자를 함께 쓰려고 하는 까닭은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차근차근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교과서만 들여다보도록 하는 입시교육’에 일찍부터 길들도록 하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창조력)을 펼치지 못하도록 짓누르려는 뜻입니다.
아이와 어른은 모두 ‘한자 하나’를 더 알거나 ‘알파벳 하나’를 더 알아야 지식이 늘지 않습니다. ‘한자말 하나’를 더 익히거나 ‘영어 하나’를 더 익혀야 생각이 자라지 않습니다. 지식을 늘리려면 지식을 늘릴 수 있도록 가르칠 노릇입니다. 생각을 키우려면 생각을 키울 수 있도록 이끌 노릇입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말’을 제대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말사전을 달달 읊거나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야 하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살다’라는 낱말이 하나 있으면, 이 낱말로 ‘함께 살다’나 ‘모여 살다’를 그리고, ‘책삶’이나 ‘노래삶’이나 ‘숲삶’을 그리며, ‘마을살이’와 ‘꿈살이’와 ‘사랑살이’를 그릴 수 있도록 말을 슬기롭게 가르쳐야 합니다. ‘기쁘다’라는 낱말이 하나 있으면 ‘기쁘네·기쁘구나·기뻐·기쁘지·기쁘지롱·기쁘다네·기쁘구마·기쁘요·기쁘다’처럼 말끝을 바꾸면서 느낌을 바꾸는 결을 살가이 가르쳐야 합니다.
가는 말이 고울 때에 오는 말이 고운 줄 가르치고, ‘말이라는 씨앗’을 심은 대로 넋이 자라고 삶이 피어나는 흐름을 가르치며, 모든 생각은 말로 짓는다는 얼거리를 가르칠 노릇입니다.
학교 문턱에 처음 발을 내딛는 여덟 살 아이가 무엇을 보고 생각하면서 삶을 익혀야 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덟 살 아이 마음에 어떤 숨결이 깃들도록 할 때에 이 아이가 아름답게 자라서 사랑스러운 꿈을 키울 만한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학습 목표’가 아닌 ‘삶’을 살펴야 합니다. ‘학력 높이기’가 아닌 ‘꿈’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아갈 곳은 ‘경제 성장’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면서 스스로 알차게 가꾸는 길’이어야 합니다.
아이는 어른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톱니바퀴나 부속품이나 종(노예)이 아닙니다.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고 손수 삶을 지을 줄 아는 철들고 슬기로운 사람으로 자라야 합니다. 이제 학교에서는 ‘교과서 지식을 머릿속에 들이밀어 입시지옥으로 내모는 짓’을 그만둘 노릇입니다. 초등학교부터 학교 텃밭을 일구고, 학교 운동장 둘레를 숲으로 가꾸면서, 아이들이 밭과 숲을 스스로 돌보는 손길을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고작 한자 몇 가지를 교과서에 넣느니 마느니 하면서 애먼 돈과 품과 겨를을 바칠 까닭이 없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제대로 할 몫을 제대로 보아야 하고, 아이들이 참답게 배워서 참다운 사람으로 크는 길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교과서에 한자를 밝혀서 알려주느냐 마느냐 하고 따지기 앞서, 교과서를 이룬 글이 아이 눈높이에 맞도록 쉽거나 바르거나 아름다운가를 따져야 합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조차 한자를 밝혀서 써야 할 만큼 그 한자말을 꼭 써야 하는가를 따져서, ‘한글로 적을 때에 곧바로 알아보면서, 이렇게 알아본 대로 생각을 밝히도록 이끄는 글’로 교과서를 고쳐쓰도록 마음을 기울일 노릇입니다. 교과서에 한자를 밝혀서 써야 한다면, 교과서 글(문장)이 엉망이라고 스스로 밝히는 셈이니까요.
우리는 ‘삼월’을 ‘삼월’로 적고 이렇게 알면 될 뿐입니다. ‘三月’로 적고 이렇게 읽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글쓰기’를 ‘글쓰기’로 적고 이렇게 알면 됩니다. ‘作文’으로 적고 이렇게 읽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시와 소설도 그저 ‘시’와 ‘소설’이지, ‘詩’나 ‘小說’로 적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만화’와 ‘사진’을 ‘漫畵’와 ‘寫眞’으로 적을 줄 알기에 문화나 예술을 잘 알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아이들이 ‘思慮’를 모른다고 걱정하지만, 어른도 ‘사려’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모릅니다. 한자를 밝힌대서 이 한자말을 알 수 있지 않습니다. 한자말 ‘사려’는 “깊게 생각함”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깊게 생각하다”라 말해야 누구나 알아들을 만하지, ‘사려(思慮)하다’처럼 적어야 알아들을 만하지 않습니다.
시는 그저 ‘시’입니다. 시를 ‘시’로 적으면서, 시란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라고 가르쳐서, 아이들이 초등학교에서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시’라는 글짜임에 맞추어서 즐겁게 쓸 수 있도록 이끌 때에 참답고 아름다운 교육입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걸어갈 아름다운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른들이 꾸려서 아이들한테 베풀 교과서는 어른들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지으면서 깨달은 슬기를 담은 책이어야 합니다. ‘한자를 밝혀서 적느냐’는 둥 ‘영어로도 함께 적느냐’는 둥 이런 철없는 소리는 그치고, ‘삶을 이루는 바탕이 될 생각을 짓는 말’을 어떻게 알차면서 알뜰히 다스려서 가르칠 때에 아름다울까 하는 대목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국말을 슬기롭게 제대로 배워야 영어나 중국말도 슬기롭게 제대로 배울 수 있습니다. 한국말부터 슬기롭게 제대로 쓸 줄 모르면, 외국말을 아무리 잘 배운다고 하더라도 통역이나 번역을 못 합니다. 한국말을 슬기롭게 제대로 가르칠 수 있도록 교과서를 바로잡으면, 아이들은 스스로 어떤 외국말이든 슬기롭게 제대로 배우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랍니다. 4348.3.31.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