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랜 사랑 창비시선 134
고재종 지음 / 창비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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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1



시와 나락섬

― 날랜 사랑

 고재종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5.5.10.



  요즈음 시골에서는 헬리콥터를 흔하게 봅니다. 어느 때가 되면 마을마다 헬리콥터가 여러 대 떠서 새벽부터 저물녘까지 골골샅샅 날아다닙니다. 마을에 헬리콥터가 뜨면 집집마다 대문과 창문을 꼭꼭 닫습니다. 지지난해까지는 헬리콥터가 뜰 무렵 면소재지에서 면내방송을 해서 장독 뚜껑도 닫으라고 알렸으나, 지난해부터는 헬리콥터가 뜨든 말든 면내방송을 아예 안 합니다.



.. 모진 돈들막 귀영치의 / 씨톨 하나도 깨우는 속삭임이여 / 논두렁 밑 양지녘엔 / 벌써 저리 냉이꽃 반짝이네 ..  (우수)



  요즈음 시골에서 뜨는 헬리콥터는 ‘농약 뿌리는 헬리콥터’입니다. 이제 시골마다 할매와 할배 나이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야말로 요즈음 시골마을 할매와 할배는 손수 농약을 뿌리기 어려운 몸이 됩니다. 마을 할매와 할배 말씀으로는 ‘마음 같아서 날마다 농약을 뿌리’고 싶다는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마을마다 돈을 모아서 농협 헬리콥터를 빌립니다. 조금 덜 늙은 할매와 할배는 경운기를 끌고 손수 농약을 뿌리지만, 많이 늙은 할매와 할배는 돈을 들여 헬리콥터를 부르고는 신나게 농약을 뿌리도록 시킵니다.



.. 사람의 한평생은 아름다워라 / 윗논에서 논을 갈던 칠순 박영감 / 옆논에서 보리 베는 김영감 불러 / 한됫박 탁배기를 나눠 마시듯 ..  (새참)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면 빨래를 걷어야 하고, 아이들을 모조리 집으로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헬리콥터는 새벽부터 저물녘까지 골골샅샅 돌아다니니, 농협 일꾼이 낮밥이나 샛밥 먹느라 살짝 쉬는 때에도 빨래를 내다 널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마당에조차 나가 놀지 못하고 맙니다. 농약 뿌리는 때가 되면 아예 마을을 떠나서 도시로 나들이를 갑니다. 헬리콥터 소리가 귀청을 찢기도 하고, 농약 때문에 숨을 쉬기 어려우며, 빨래이든 집안일이든 도무지 할 수 없는데다가, 아이들은 시골에 살면서도 바깥에서 뛰놀지 못합니다.


  별이 돋는 깜깜한 밤에 집으로 돌아오면, 아직도 농약 냄새가 자욱합니다. 재채기가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농약 헬리콥터가 돌아다닐 때부터 온 마을이 고요합니다. 헬리콥터 소리를 빼고는 아무런 소리가 없습니다. 개구리도 더 노래하지 않고, 제비도 몽땅 사라지며, 흔한 참새와 까치마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헬리콥터가 뿌리는 농약은 온갖 풀벌레를 싸그리 죽이고, 풀벌레를 잡아먹는 새까지 몽땅 죽음길로 내몹니다.


  농약 뿌리는 헬리콥터가 온 마을과 들과 숲을 휩쓴 뒤에는 시골에 아무런 소리도 노래도 없는 나날이 이어집니다. 그저 경운기 소리와 마을방송 소리만 덩그러니 울릴 뿐입니다. 나비와 벌도 사라집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시골에서는 아이들 웃음소리도 목소리도 듣기 어렵습니다.



.. 나락섬에 불을 지르고 돌아온 이제풍씨 / 속 끓는 아내가 차려주는 쌀밥을 먹는다 / 울대를 치는 오열도 함께 꼭꼭 씹어서 // 군청에 농기계를 반납해버린 오근선씨 / 군청 앞 식당에서 김칫국에 쌀밥을 먹는다 / 가슴 뿌리부터 치밀어오르는 걸 애써 누르며 ..  (오늘도 쌀밥을 먹는다)



  고재종 님이 빚은 시집 《날랜 사랑》(창작과비평사,1995)을 읽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아재가 빚은 시집입니다. 늘 흙을 만지고 밟고 보듬고 돌보면서 삶을 일구는 고재종 님이니, 아무래도 고재종 님 싯말은 흙말이 됩니다. 흙에서 길어올린 노래요 시이며 이야기입니다. 흙을 먹으면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가 흐르는 시입니다.


  문득 우리 사회를 돌아봅니다. 요즈음에는 시골에서 흙 만지면서 시를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매우 어렵습니다. 흙 만지면서 시를 쓰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지만, 흙 만지면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만화를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도 대단히 드뭅니다. 흙 만지면서 춤·노래를 펼치거나 연극·영화를 이루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흙 만지면서 교사나 교수로 일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흙 만지면서 시장이나 군수 일을 하는 사람은 있을까요? 흙 만지는 국회의원은 있을까요? 흙 만지는 법관이나 의사나 공무원은 있을까요?



.. 내 마음의 불타버린 작은 숲에는 / 세월의 바람을 정갈하게 빗질하던 / 고고한 솔 한그루 자라지 / 않는다, 거기 동박새며 뱁새떼 / 우수수 오르고 우수수 내리던 / 잡덤불 속 생의 따뜻한 숨결은 어디 / 갔는가, 꿈의 산정을 치닫던 노루 한마리 ..  (불타버린 숲에서)



  흙을 만지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는 아예 없다고 할 만합니다. 이리하여, 시골지기 삶을 헤아리는 정책이나 문화나 행정이나 교육은 아예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골 초·중·고등학교에서 교사가 학생한테 시골일을 가르치거나 보여주는 일은 없습니다. 시골에서도 학교는 모든 아이가 오직 서울이나 큰도시로 나가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고록 하는 시험공부만 시킵니다.


  시집 《날랜 사랑》을 조용히 읽습니다. 앞으로 흙내음이 감도는 시는 얼마나 더 만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앞으로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시를 쓰겠노라 당차게 외칠 만한 사람은 나올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면서 시를 배우려는 젊은이 말고, 시골에서 손수 흙을 가꾸면서 시를 익히려는 젊은이는 나올 만할까 궁금합니다.



.. 노타리 쳐서 물 방방히 실어놓은 / 내일쯤엔 모낼 논에 / 어디선가 날아내린 흰 고니 두 마리 / 그 긴 부리로 무언가를 콕콕 찍어댄다 ..  (문득)



  모든 사람이 꼭 흙을 만져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흙에서 자란 밥’을 먹습니다.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흙에서 자랍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에서 자라는 나락은 없습니다. 딸기도 수박도 참외도 토마토도 능금도 포도도 모두 흙밭에서 자랍니다. 요새는 소와 닭과 돼지한테 사료와 항생제만 먹이지만, 예부터 모든 고기짐승은 짚이나 풀을 먹었습니다. 풀과 곡식을 먹을 적에도 ‘흙’을 먹는 셈이요, 고기를 먹을 적에도 ‘흙’을 먹는 셈이에요. 시골에 살든 도시에 살든 우리는 늘 흙을 먹는 삶이니, 흙을 만지지 않는다면 내 삶을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흙을 만지지 않아도 삶을 이루지만, 흙을 만지지 않으면 삶을 삶결 그대로 바라보기 어려울’ 뿐입니다.


  시골지기가 나락섬에 불을 붙여서 태우는 아픔이나 생채기를 함께 느낄 만한 ‘도시 이웃’을 그려 봅니다. 시골지기가 농약을 쓰도록 부추기는 현대문명을 헤아려 봅니다. 시골지기와 어깨동무를 하려는 ‘도시 이웃’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가만히 손을 꼽아 봅니다. 4348.4.1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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