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뜰 가득 숨탄 것들 - 한 우리말 지킴이의 삶의 뒤안길
문영이 지음 / 지식산업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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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72



아침이 밝는 노래

― 내 뜰 가득 숨탄것들

 문영이 글

 지식산업사 펴냄, 2014.9.8.



  벚나무 곁에 서면 벚나무 냄새가 솔솔 퍼집니다. 벚꽃이 피면 벚꽃 냄새가 퍼지고, 벚잎이 맺히면 벚잎 냄새가 퍼집니다. 모과나무 곁에 모과나무 냄새가 살살 퍼집니다. 모과꽃이 피면 모과꽃 냄새가 퍼지고, 모과잎이 벌어지면 모과잎 냄새가 퍼집니다.


  나무에는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가 따로 없습니다. 모든 나무는 그예 나무입니다. 나무마다 냄새가 다릅니다. 나무마다 결이 다릅니다. 나무마다 냄새가 다르고, 무늬와 빛깔이 달라요. 그런데, 어떤 나무이든 한 가지는 똑같습니다. 모든 나무는 우리한테 푸른 바람을 베풀어 줍니다.


  나무와 함께 살면 언제나 푸르게 싱그러운 바람을 마십니다.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은 늘 푸르게 빛나는 바람을 마십니다. 나무를 아끼면서 하루를 열면 나무가 들려주는 짙푸른 노래가 마음속으로 스며듭니다.



.. 두 식구만 남고서 냄비들을 작은 걸로 바꾸었다. 아무리 작은 냄비를 써도 먹고 남지 않게 만들기란 어렵다. 꾀가 생겼다. 밥그릇 세 개가 들어갈 만한 압력솥에 겅그레를 놓고 그 밑에 물을 붓는다. 살짝 데칠 시금치는 겅그레 위에 펴놓고 불을 지펴 추가 움직일 만하면 불을 끄고 바로 꺼낸다 … 가을 되면 한 해 먹을 참깨·들깨·콩·팥 팔아 씻어 널어놓고 따끈한 햇살 들에 받으며 젓는 마음 … 어느 사이 실고추 가시는 일도 멈췄다. 빨래기계와 냉장고가 집안에 들어오면서 내 마음이 거칠어졌다면 이상한 표현이 되나? 더 바빠진 마음이다 ..  (15, 20, 21쪽)



  아침이 밝을 적에 먼 멧자락이나 바다를 바라보면 해님이 붉게 타오르면서 뜨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낮에 걸린 해는 하얗지만, 아침저녁으로는 노랗고, 새벽에는 활활 타오르는 불빛이에요.


  지구별에서 바라보는 해는 때에 따라서 다르게 보입니다. 그러나, 해는 늘 똑같은 빛과 볕과 살을 우리한테 베풀어 주겠지요. 해가 지구별을 언제나 골고루 비추면서 보듬어 주기에, 우리는 해를 바라보며 ‘해님’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이야기하겠지요.


  가만히 보면, 별님과 달님입니다. 꽃님과 풀님입니다. 하늘님과 땅님입니다. 바다님과 숲님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숨결은 님입니다. 짐승님이요, 벌레님입니다. 이웃님이자 동무님이에요.


  모두 사랑스럽습니다.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반갑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나는 누구하고라도 어깨를 겯으면서 하루를 새롭게 짓습니다.



.. 시장에서 도라지 뿌리는 아무 때나 볼 수 있지만, 이른 가을(한가위 무렵)이 도라지 뿌리를 캐는 철이다. 그때를 놓치면 다시 새순이 올라오고, 그 순은 겨울을 맞아 얼어죽는 헛순이다 … 언젠가 연한 마늘종 한 줌 뽑아다 놓고 잊고 있다가 보니 줄기는 바짝 말라 있고, 줄기 끝에 시늉으로만 맺혔던 씨는 또랑또랑 여물었다. 제 몸의 양분을 아낌없이 씨에게 다 바쳤다 … 온누리는 보이지 않는 제 씨앗 사랑으로 꽉 짜여 있어, 그 힘으로 모든 숨탄것들이 살아가지만 … 지난여름 서울 거리를 무심히 걷다가 산 나무 밑동에 못질을 해 나무 표지 표를 달아놓은 것에 흠칫했던 기억도 있다. 깊이 박히는 못이 아니라고 발뺌할지 모르지만 나 같은 사람은 벌써 흠칫 놀란 뒤다. 수많은 전등을 나무에 매달아 치레로 쓰며 ‘나무에게는 해가 없다’는 말도 퍼뜨린다 ..  (32, 41, 59쪽)



  바람이 붑니다. 사월바람이 붑니다. 우리 집 마당 한쪽에는 갓꽃과 유채꽃이 골고루 섞여서 노랗게 꽃송이를 터뜨립니다. 갓꽃과 유채꽃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두 가지 풀은 갓과 유채이니까, 꽃은 틀림없이 다를 텐데, 아무리 들여다보고 쳐다보고 바라보아도, 꽃송이로는 도무지 두 가지 꽃을 가르지 못 하겠습니다. 잎을 보면 갓과 유채를 바로 알아챌 수 있으나, 꽃을 보아서는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보고 또 보고 다시 보면 얼추 알 듯합니다. 다시 보고 새로 보고 거듭 보면 어렴풋하게 둘을 알 만합니다.


  매화꽃과 벚꽃과 복숭아꽃을 바라볼 적에도 이와 같아요. 알 듯 모를 듯하다가도 어느새 아하 그렇구나 하고 압니다. 붓꽃과 창포꽃을 볼 적에도 이와 같지요. 이야 참 비슷하게 생겼네 싶으면서도 어느 대목에서 다른가 하고 알 만합니다.



.. 떡 방앗간에 가 보면 당원이나, 설탕 봉지를 툭툭 터서 떡가루에 쏟아붓는다. ‘음식 맛을 버려놓는 곳이 바로 이곳이구나!’ 싶다 … 쑥이나 모시 잎을 데칠 때도 소다를 넣어서 억지 색을 내지 않는다. 모든 음식은 만드는 재료의 맛과 제 빛이 사는 것이 제맛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학교에서도 다 같은 음식을 먹고, 직장에서도 같은 음식을 먹는 곳이 많다. 제 입맛을 고집하기가 어려운 시대다 … 온실을 짓는 억지가 없어도 고구마, 감자, 무, 토란, 더덕, 도라지, 연 뿌리, 우엉 뿌리들이 겨울을 넘겨준다 ..  (70, 71, 79쪽)



  문영이 님이 쓴 《내 뜰 가득 숨탄것들》(지식산업사,2014)을 읽습니다. 전라북도 익산에서 조용히 삶을 짓는 할머님이 엮은 글을 읽습니다. 할머님이 쓴 글은 수수합니다. 따로 꾸미지 않으니 수수합니다. 가만히 보면, 글을 쓸 적에 꾸며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글은 글 그대로 써야 글입니다. 말은 말 그대로 해야 말입니다. 밥은 밥 그대로 지어야 밥이고, 씨앗은 씨앗 그대로 심어야 씨앗입니다.


  밥을 지으면서 노래를 합니다. 밥 한 그릇에 사랑스러운 기운이 깃들기를 바라면서 노래를 합니다. 바느질을 하면서 노래를 합니다. 바늘 한 땀마다 사랑스러운 숨결이 닿기를 바라면서 노래를 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모든 몸짓에 사랑을 담습니다. 따로 ‘사랑인 척’하지 않습니다. 애써 ‘사랑처럼 보이도록’ 하지 않아요. 그저 사랑이 됩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흐릅니다. 아침저녁으로 모든 삶과 살림을 사랑으로 짓습니다.



.. 해질녘엔 새하얀 꽃 밑에 털북숭이 열매가 달린 암꽃과 열매가 없는 수꽃이 어우러져 피는 꽃 옆에 서면, 박꽃에선 어미 젖꼭지에서 막 옮겨 받은 아기 냄새가 난다. 박잎도 아기 살갗이다. 그 곁에선 내 마음도 아기를 기르는 어미 마음이다 … ‘말복 안에 박이 열려 까치 대가리만 하면 박이 세어 바가지로 쓸 수 있다’ 하고, 그 뒤에 열리는 박은 나물감으로 귀하게 쓴다 … 박속을 떠낸 속을 들여다보면 심줄이 수박 무늬 골 지듯 골 지어 있다. 그 심줄을 긁어 버리면 박이 마르면서 바가지가 속으로 말려들어서, 박이 아무리 잘 세어도 바가지 구실을 못한다. 그런 모습을 ‘배꼽이 떨어져 못 쓰게 됐다’고 한다. 그 심줄이 다치지 않게 손가락 끝으로 살살 밀어 남은 박속을 모두 긁어내고, 심줄이 그대로 살아 있도록 마음 쓰고 물을 부어 가며 솔로 살살 닦에 볕에 말린다 ..  (88, 89쪽)



  겉모습을 꾸미기에 예쁘지 않습니다. 마음이 예쁠 때에 몸도 예쁩니다. 겉모습을 안 꾸미기에 안 예쁘지 않습니다. 마음을 가꿀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예뻐요. 멋들어지거나 값진 옷을 입어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마음이 착하면서 참다울 적에 아름답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는대서 안 아름답지 않습니다. 서로 아끼고 돕는 따사로운 사랑으로 살림을 짓는 사람은 어떤 옷을 입든 아름답습니다.


  그러니까, 글쓰기를 배우려고 학교나 학원을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글을 잘 쓰려고 놀라운 스승을 찾아갈 까닭이 없습니다. 수많은 문학책을 읽어야 글솜씨가 늘지 않습니다. 한국말사전을 통째로 달달 외워야 글을 멋있게 쓰지 않아요.


  나라밖에서 뭔가를 배웠으면 글을 잘 쓸까요? 아니지요. 나라밖에서 배운 사람은 나라밖에서 배운 티를 글에 보여줍니다. 대학교를 다닌 사람은 대학교를 다닌 티를 글에 보여줍니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책을 많이 읽은 티를 글에 보여주어요.


  이리하여, 삶을 사랑으로 지으면서 아이를 보살핀 사람이 글을 쓰면, 이녁 글에는 언제나 따사롭거나 포근하면서 환한 사랑이 드러납니다.



.. 쓰레기를 만나면 자연에서 얻은 것과 사람이 만든 물건으로 쉽게 가른다. 자연에서 얻은 쓰레기는 그 모양이 아무리 고와도, 험해도, 쉽게 썩거나 더디게 썩거나 다 썩는다. 나는 그 썩는 쓰레기를 귀하게 여긴다 … 빨래는 며칠씩 모았다가 하고, 푸성귀는 밖에서 씻고, 거기서 나오는 물은 항아리에 모아놓아, 모기가 알을 낳을까 봐 비닐 한 장 덮고 뚜껑을 덮는다. 꽃밭을 가꿀 물이다 ..  (149, 150쪽)



  문영이 님이 빚은 이야기책은, 참말 이야기책입니다. 스스로 지은 삶이 이야기로 새롭게 피어나는 글을 엮은 책입니다. 하루가 밝는 아침에 이 아침을 오롯이 느끼면서 삶을 가꾸기에, 아침이 밝는 이야기를 수수하게 글로 씁니다. 하루가 저무는 저녁에 이 저녁을 소롯이 느끼면서 삶을 짓기에, 저녁이 저무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글로 여밉니다.


  우리는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를 굳이 글로 쓸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를 구태여 글로 쓸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책에서 엿본 이야기’를 애써 글로 쓸 까닭이 없습니다.

  나 스스로 겪은 삶을 글로 쓰면 됩니다. 나 스스로 가꾸면서 짓고 누린 삶을 글로 쓰면 돼요. 내 삶은 못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내 삶이 잘나지 않습니다. 내 삶은 그저 내 삶이기에, 이 삶을 ‘내 글’로 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여다본 내 삶이 아닌, 바로 내가 스스로 바라보는 내 삶을 쓸 때에 ‘글’입니다.



.. 이른봄, 사람은 아직 봄기운을 못 느낄 때, 둑새풀과 함께 하얀 서릿발 덮고 잠자다가 햇살 낌새에 얼른 제 몸을 덥혀 서릿발을 녹이고, 반짝반짝 윤이 나던 두해살이 벼룩나물을 잊을 수 없다 … 첫여름, 들에 나가면 언제나 엉겅퀴꽃을 보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런데 들에서 엉겅퀴꽃 본 지가 아스랗다. 산에서는 더러 볼 수 있는 바늘엉겅퀴는 잎째짐이 깊고 가시가 억세고 꽃도 자잘한 것이 빛깔도 흐리다 … 꽃다지가 노래에만 있는 나물이 된 것처럼 이제 엉겅퀴마저 자취를 감추는가 싶어 애답다. 독일은 들에 난 풀 한 포기도 마음대로 손대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는다고 한다 ..  (171, 173, 175쪽)



  한국말사전을 뒤져야 한국말을 잘 살려서 쓰지 않습니다. 삶을 사랑하고 북돋우는 사람이 한국말을 슬기롭게 사랑하고 북돋우면서 글을 사랑스레 쓸 수 있습니다. 학교교육을 많이 받거나 책을 많이 살펴야 놀라운 문학을 선보이지 않습니다. 삶을 알뜰살뜰 여미면서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 생각을 알뜰살뜰 여미고 보듬으면서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선보입니다.


  《내 뜰 가득 숨탄것들》에 깃든 이야기는 ‘우리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이웃집 할머니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웃마을 할머니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곁님을 보살피며 흙과 풀과 나무를 아끼는 손길로 삶을 가꾼 할머니가 이 땅에서 새롭게 살아갈 아이들한테 남기는 보배 같은 글꽃입니다. 4348.4.1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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