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여쁜 꽃씨 하나 창비시선 80
서홍관 지음 / 창비 / 198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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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6



제비춤 만나는 새봄

― 어여쁜 꽃씨 하나

 서홍관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89.9.15.



  요즈음 도시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제비를 볼 길이 없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도시로 찾아오는 제비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비는 지난해에 묵은 제 둥지로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도시는 끝없이 재개발과 재건축을 할 뿐 아니라, 제비 같은 새가 잡아먹을 애벌레나 날벌레가 사라져요. 자동차와 공장이 지나치게 많고, 풀숲이나 나무숲이 자취를 감추지요. 이런 도시는 제비뿐 아니라 사람이 살기에도 메마르거나 팍팍하기 일쑤입니다.



.. 이제 네가 바라볼 것은 / 늦겨울 파릇하게 자라나는 보리싹과 / 봄날 강언덕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 들쑥무더기 같은 것들이니 ..  (민들레 2)



  제비가 찾아갈 수 없는 도시이지만, 도시는 더 커지기만 합니다. 크기가 줄어드는 도시는 없습니다. 크기를 줄이려 하는 도시도 없습니다. 도시로 몰리는 사람은 끝없이 늘기만 합니다. 도시에 깃든 사람은 도시에서 빠져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한 번 도시에 발을 들였으면, 죽어서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도시에만 머물려 합니다.


  사람 아닌 목숨은 바퀴벌레와 모기와 파리를 빼고는 도무지 도시에서 못 살겠다고 하는데, 왜 사람은 도시로 몰리려 할는지 아리송합니다. 사람 아닌 목숨은 바퀴벌레와 모기와 파리를 빼고는 도시에서는 숨이 막혀서 거의 다 죽어 버리거나 미쳐 버리는데, 왜 사람은 도시를 붙잡고 안 놓으려 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쩌면, 사람도 도시에서 죽어 버리거나 미쳐 버린 탓에 도시를 못 벗어나지는 않을까요.



.. 이 나라에서는 /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을 연다고 / 총경비 2조 4천 4백억원이나 들여서 / 외국인선수들 숙소에는 냉난방과 오락시설까지 갖춰놓고 / 우리 산업근로자들의 작업장에는 / 배기시설 안전설비도 안해놓고 / 수은을 먹건 카드뮴을 먹건 내버려둔다면서요 ..  (송면이가 떠나가요)



  시골에서 살기에 제비를 만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예전에는 손으로 짓는 시골일이었으나, 이제는 기계로 만드는 시골 ‘농업’이나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시골은 온통 기계투성이에 비닐투성이입니다. 요즈음 시골에서 사람 손길을 타는 땅은 좀처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온갖 곳에 농약을 뿌려대니, 사람이 손을 뻗어 흙을 만질 일이 없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마늘이나 파를 뽑을 적에는 손을 쓰겠지요. 그러나 농약투성이 밭뙈기와 논자락을 맨 살갗을 대면서 만지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도 논밭에서 살 수 없고, 개구리와 새도 논밭에서 살 수 없습니다.



.. 들길을 걷노라면 / 찰랑거리는 논물에는 / 물달개비 향기가 좋은데 / 잎잎이 붙은 물잠자리들이 / 달빛에 잠이 깰까 걱정되네요 ..  (넋 건지기)



  서홍관 님이 빚은 시집 《어여쁜 꽃씨 하나》(창작과비평사,1989)를 읽습니다. 시집 이름 그대로 ‘어여쁜 꽃씨’를 그리는 이야기를 묶은 책입니다.


  꽃씨는 참으로 어여쁩니다. 새로운 꽃을 품은 씨앗이니 어여쁠 수밖에 없습니다. 꽃씨처럼 사람씨도 참으로 어여쁩니다. 비록 오늘날 이 지구별에는 전쟁무기가 끔찍하게 넘치고, 바보짓을 하는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교육과 문화와 예술과 과학과 종교가 득실거리지만, 이러한 바보짓을 걷어내어 마음바탕을 읽을 수 있다면, 우리 가슴에는 아름다운 사랑씨가 있는 줄 알아채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사람들이 스스로 마음바탕을 읽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별에 끔찍한 전쟁이 안 멈추리라 느껴요.



..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 총이 없어 도망쳐 다니는 / 우리집 아이가 안돼 보이기도 하고 / 장난감 총을 가졌다고 위협하고 다니는 / 옆집 꼬마가 괘씸하기도 하다 ..  (장난감 총)



  어른들은 스스로 전쟁무기를 만들어서 스스로 손에 쥡니다. 어른들은 전쟁 장난감을 만들어 아이들한테 팝니다. 어른은 참말 서로 죽일 수 있는 전쟁무기를 손에 쥐고, 아이는 놀이로 서로 죽이는 버릇을 일찌감치 몸에 익힙니다.


  남북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전쟁무기가 남북에 가득합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 총부리를 겨눕니다. 서로 아끼려 하지 않으니 탱크와 전투기와 폭탄과 미사일을 엄청나게 만듭니다. 서로 보살피거나 헤아리려 하지 않으니 군대를 키우고, 젊은이는 군대에서 썩도록 내몹니다.



.. 청무우 다발 위에는 청무우눈꽃 / 쌓아놓은 볏단 위에는 볏단눈꽃 / 쓰레기더미 위에는 쓰레기눈꽃 / 탱자나무 울타리에는 탱자나무눈꽃 ..  (눈꽃)



  우리한테 핵무기가 있어야 우리가 느긋하지 않습니다. 우리한테 핵발전소가 있어야 우리가 전기를 잘 쓸 만하지 않습니다. 핵발전소는 핵무기를 만들려고 세우는 시설입니다. 핵발전소가 있어서 핵쓰레기가 나와야, 이 핵쓰레기로 핵무기를 만들어요. 그러니까, 정부에서 핵발전소를 붙잡는 까닭은 군대와 전쟁무기를 붙잡는 까닭과 똑같습니다. 정부에서 군대와 전쟁무기를 없애려 하지 않는다면 핵발전소를 없앨 수 없습니다. 다른 전쟁무기는 그대로 있는데 핵무기만 없앨 수 있지 않아요. 모든 전쟁무기를 한꺼번에 없애려고 해야 비로소 핵무기와 핵발전소를 없앨 수 있습니다.


  더 헤아려 보면, 도시이든 시골이든 우리 보금자리를 아름답게 가꾸려는 마음이 되어 기쁘게 노래할 수 있어야, 비로소 아름다운 손길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 아름답게 노래를 부를 줄 알 때에, 제비는 도시와 시골 곳곳에 기쁘게 돌아올 수 있습니다. 제비가 돌아와서 깃들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마을을 가꿀 노릇입니다.



.. 나라에서는 / 철이네 식구들더러 / 핵우산의 보호 아래 / 편안히 잠들라 했다. // 어느 날 / 큰 나라들이 전쟁을 시작했고 / 서로 단추 몇 개를 누르더니 / 철이네 식구들은 / 곤한 꿈꾸다 사라져버렸고 // 그 후 수십 년 동안 / 그 나라에는 / 먼지만 오래도록 쏟아져내리더니 / 아직껏 풀도 나지 않고 / 새도 울지 않는다고 한다 ..  (핵우산)



  우리 보금자리는 전쟁무기와 군대를 거느리기 좋은 곳이 아니라,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아름다운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남북녘 어디에서나 제비춤을 맞이하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춤추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시인이 되고, 누구나 교사가 되며, 누구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시를 쓰고, 누구나 노래를 부르며, 누구나 삶을 짓는 아름다운 숲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월에 사월꽃을 그리면서 밭자락에 어여쁜 꽃씨를 심을 수 있는 삶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4348.4.1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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