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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머리 여자아이
천롱 지음, 안명자 옮김 / 청년사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14
착한 아이와 흰머리
― 긴 머리 여자아이
천롱 글·그림
안명자 옮김
청년사 펴냄, 2005.10.31.
천롱 님이 빚은 그림책 《긴 머리 여자아이》(청년사,2005)를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이 그림책에 담긴 이야기는 옛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고, 참말 있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이든 옛이야기입니다.
중국 어느 멧골자락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일 수 있으며, 중국뿐 아니라 일본이나 한국이나 필리핀이나 베트남 시골자락에서도 내려오는 이야기일 수 있어요. 고장마다 모두 이러한 이야기가 내려오는데 이를 못 깨달을 수 있으며, 이러한 이야기를 찬찬히 갈무리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 사슴 한 마리가 사나운 들개들한테 쫓겨 달려왔어. 여자아이는 힘껏 고함을 쳐서 들개들을 쫓아 버렸지. 그리고 겁에 질린 사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달래 주었어. “고마워, 넌 참 친절하구나.” 사슴이 말을 하자 여자아이는 깜짝 놀랐어 .. (9쪽)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난날에는 가시내만 ‘긴머리’이지 않습니다. 지난날에는 가시내뿐 아니라 사내도 긴머리입니다. 임금님이 끌어들여서 싸울아비로 부리는 사내는 머리카락을 짧게 밀리고, 임금님이 세운 감옥에 갇히는 사람도 머리카락을 짧게 밀립니다. 그러나, 여느 시골자락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면서 삶을 짓는 사람은 사내와 가시내 모두 머리카락을 그대로 두어요. 따로 자르거나 깎지 않습니다.
가만히 헤아리면, 긴머리가 아닌 짧은머리나 빡빡머리인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 드뭅니다. 머리카락이 잘린 사람은 ‘위(권력자)’에서 시키는 일을 고스란히 따르는 허수아비나 꼭둑각시 노릇을 해요. 싸움터에서 칼받이나 창받이나 총알받이가 되는 사람들을 보셔요. 억지로 머리카락이 밀리지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군대에 끌려가는 사내는 머리카락을 박박 밀려요. ‘스스로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나는 이 산을 지키는 산도깨비의 아들이야. 너는 이 샘물을 마음껏 써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 절대로 알려줘서는 안 돼. 그럼 우리 아빠가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 (15쪽)
그림책에 나오는 ‘긴머리’ 가시내는 걱정과 근심이 쌓여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셉니다. 나이가 아직 많이 어린데 ‘긴머리’가 ‘흰머리’로 바뀌어요.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머리카락이 그만 모두 세고 말아요. 사슴을 도와주면서 골짜기 샘물을 하나 알았는데, 이 샘물을 마을에 알리면 안 된다는 멧도깨비 말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쌓였거든요.
긴머리 가시내는 마음이 착합니다. 참다운 길을 걸으며 삶을 짓는 아이입니다. 이리하여, 더는 두고보지 못하고 골짜기 샘물을 마을에 알려주기로 합니다. 그리고, 제 몸을 멧도깨비한테 바치기로 해요.
다른 사람은 이를 하나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긴머리 가시내가 끙끙 앓는 까닭을 몰라요. 말할 수 없는 이야기요,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었어. 마을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허둥대는 동안, 여자아이는 바람에 실려 아주 멀리 날아가 버렸어 .. (24쪽)
마음이 홀가분한 사람은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휘날립니다. 마음이 따스한 사람은 머릿결이 더없이 곱습니다. 마음이 넉넉한 사람은 머리카락에 싱그러운 빛이 돕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은 머릿결이 비단과 같습니다.
아이들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 참으로 부드럽습니다. 아이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 상큼한 냄새가 퍼집니다. 걱정이나 근심을 쌓지 않고 기쁨과 웃음을 온몸으로 담는 아이들은 모두 예쁘며 사랑스러워요.
어른도 마음에 기쁨과 웃음을 담으면 참으로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습니다. 아이이든 어른이든 마음이 무겁거나 처지거나 근심으로 어지러우면 모두 어둡고 슬픕니다.
.. 사슴은 여자아이 모습과 닮은 돌 인형을 가져왔어. “자, 네 긴 머리카락을 잘라 이 인형 머리에 붙여. 그리고 인형을 시냇물에 담가 두면 우리 아버지는 네가 누워 있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 .. (33쪽)
그림책에 나오는 긴머리 가시내는 머리카락을 내놓기로 합니다. 옛사람한테는 머리카락이 목숨과 같았을 텐데, 긴머리 가시내는 머리카락을 박박 밀어요. 이러고 나서 이 머리카락을 돌 인형에 붙입니다. 인형을 짐짓 꾸민다고 할 텐데, 돌 인형은 긴머리 가시내 머리카락을 받으면서 멧도깨비 마음을 달래 줍니다. 긴머리 가시내는 하얗게 세고 만 머리카락을 모두 내려놓으면서 마음에 얹혔던 응어리를 풀 수 있고, 이제 짐을 모두 내려놓았으니 바야흐로 새 머리카락이 돋아요. 앞으로는 근심과 걱정이 없으니, 온통 사랑이요 꿈인 새까만 머리카락이 돋습니다. 새까만 머리를 흩날리면서 노래를 하고, 까맣디까만 머리를 아끼면서 사랑을 나눕니다. 4348.4.1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