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쳐다볼 겨를
아이들과 지내면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하루가 흐른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 사랑인 아이들이 아니요, 언제나 즐겁게 웃고 노래하면서 자라는 사랑인 아이들이다. 아이들과 언제나 하루 내내 붙어서 지내니, 아이들은 어버이 말씨와 몸짓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뿐 아니라, 저희 나름대로 새로운 말씨와 몸짓을 짓는다. 그러니까, 집이란 보금자리이면서 배움자리이다. 학교나 학원이라는 곳에 가야 ‘아이들이 배우’지 않는다.
아이들이 책을 읽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버이가 집에서 책을 읽으면 된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버이가 집에서 노래를 부르면 된다. 아이들이 피아노를 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버이가 집에서 즐겁게 피아노를 치면 된다.
어버이는 ‘잘’ 해야 하지 않는다. 아이도 ‘잘’ 해야 하지 않는다. 어버이와 아이는 모두 ‘즐겁게’ 하면 되고, ‘기쁘게’ 살면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여느 어버이가 여느 아이를 멀리하도록 자꾸 부추긴다. 먼저, 아이들은 보육시설이나 교육시설이라는 데에 몰아넣도록 닦달한다. 아이를 낳아 돌볼 어버이가 ‘아이를 쳐다볼 겨를’을 송두리째 빼앗으려 한다. 어버이가 아이를 보육시설이나 교육시설에 몰아넣도록 하면서 ‘오직 돈만 버는 사회’에 갇히도록 다그치기까지 한다. 이리하여, 정치와 사회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이라고 하는 커다란 굴레는 ‘복지’라는 이름을 내세워 ‘보육시설 늘리기’로 나아간다.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보육시설이 늘어나면 ‘아이를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거나 슬기롭게 돌보면서 키울’ 수 있는가? 보육시설이 늘어나야 할 노릇이 아니라, 모든 어버이가 ‘돈을 벌어서 아이를 가르칠 걱정’을 내려놓고 ‘아이와 더 오래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할 노릇이 아닌가.
오늘날 사회에서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 하는 까닭은 ‘졸업장’ 때문이다. 졸업장이 없으면 도시에 있는 회사에서 일자리를 못 얻기 때문에 다들 학교를 보내려 한다. 이것밖에 없다. ‘졸업장’이 아니고서는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주는 것이 없다.
학교는 아이를 가르치지 않고 길들인다. 학교는 ‘사랑스러운 아이’를 ‘미운 아이’로 바꾸는 무시무시한 곳이다. 졸업장만 바라보도록 내모는 학교는 아이들이 회사원이 되어 ‘오직 돈만 버는 얼거리’에 갇히도록 애쓴다.
어버이는 아이를 보아야 한다. 어버이는 아이를 ‘눈으로도 보’고, ‘마음으로도 돌보’며, ‘사랑으로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삶이다. 4348.4.1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