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뤽 베송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15년 1월
평점 :
미출간


루시

LUCY, 2014



  영화감독 뤽 베송 님은 〈루시〉라는 영화를 찍으려고 양자물리학을 어느 만큼 살피거나 배우거나 헤아리거나 알아보면서 이녁 마음에 담았을까? 이 영화 〈루시〉를 보는 사람은 양자물리학을 어느 만큼 알거나 배웠거나 새로 알거나 배우려고 할까? 한국에서는 이 영화를 ‘액션’ 갈래로 나누는구나 싶은데, 영화 〈루시〉는 ‘액션’ 영화일까? 액션으로 보고 싶으면 액션으로 보아도 된다. 다큐 영화로 보고 싶으면 다큐로 보아도 되고, 공상과학으로 보고 싶으면 공상과학으로 보아도 되고, 드라마로 보고 싶으면 드라마로 보아도 된다. 어느 갈래에 넣든 대수롭지 않다. 대수로운 대목은 오직 하나이다. 이 영화가 밝혀서 보여주려고 하는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루시’라는 가시내는 영웅이 아니다. 그저 수많은 지구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말하자면, 루시가 아니어도 우리 누구나 ‘루시와 똑같이 뇌를 100퍼센트 쓰는 몸’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우리 가운데 이처럼 뇌를 100퍼센트 쓰려고 훈련하거나 공부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고, 훈련과 공부를 하는 사람조차 뇌를 어느 만큼 쓰는가를 제대로 읽거나 아는 사람은 몹시 드물다.


  왜 모를까? 왜 알 수 없을까? 실마리는 아주 쉽다. ‘스스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 수수께끼를 풀 수 없다. 스스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살듯이, 스스로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 죽는다. 루시는 처음에는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자, 이때에 루시는 어떻게 될까?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주먹잡이 사이에서 죽음길과 똑같이 뒹군다. 루시는 이 다음에 ‘반드시 살겠다’고 생각을 고친다. 자, 이때에 루시는 어떻게 될까? 루시는 그냥 죽을 몸이었을 테지만 그냥 죽지 않는다. 스스로 살아남는 길을 갈는지 아니면 몸이 조각조각 찢기면서 죽는 길을 갈는지 모르나, 루시는 ‘나 스스로 바라보기’를 한다. 이리하여 뇌를 꽤 많이 연다.


  스스로 죽음으로 가다가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어느 만큼 떨친 루시는 ‘웃음도 눈물도 없는 고요한 넋’이 된다. 그러나, ‘뇌가 열리는 흐름’을 느낀 뒤, 이 뇌는 끝까지 열릴 수밖에 없구나 하고 알아차리는데, 끝까지 열리는 길에 어떤 일이 생길는지 아직 모른다. 이리하여 이 한 가지 두려움이 있고, 이 한 가지 두려움을 모질게 겪고 난 뒤(몸이 조각조각 나는 일) 비로소 고요한 마음을 되찾는다.


  고요한 마음을 되찾은 루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할 수 있어’도 ‘어떤 것’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아직 모른다. 아니, 알기는 알지만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이러니, 굳이 ‘루시처럼 뇌를 연 사람보다 똑똑하지 않은 과학자’한테 찾아가서 묻지. 스스로 할 일을 알면서도 아직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니까 과학자한테 물어 볼밖에 없다. 스스로 다 아는 것을 남한테 묻는다.


  루시는 뇌가 많이 열렸어도 아직 스스로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아마 우리 가운데 거의 모든 사람들도 루시와 같으리라 느낀다. 뇌가 제대로 열리는 줄 알아채고, 제대로 된 슬기를 받아들여서 몸과 마음이 새롭게 거듭나더라도 이를 옳게 느끼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나머지 바보스러운 짓을 일삼을 수 있다. 그리고, 뇌가 어느 만큼 열리면 ‘순간이동’쯤 손쉬울 테지만, 이런 대목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사회의식에 갇힌 지식이 아직 몸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루시는 100퍼센트로 뇌를 열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어디에나 있다’를 깨닫고, 이를 손전화 쪽글로 보낸다. 루시는 처음부터 ‘어디에나 있’었으나 그동안 이를 못 보았다.


  책이나 영화나 삶이나 모두 매한가지이다. 흐르는 대로 쳐다본대서 알 수 없다. ‘쳐다보기’와 ‘들여다보기’와 ‘바라보기’와 ‘살펴보기’는 모두 다르다. 이 모두 ‘보기’이지만, 어떤 눈길과 마음과 생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사뭇 다르다. 그러니까, 그저 쳐다보면 제자리걸음이고,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쳐다보면 뒷걸음이다. 생각을 새로 지으며 바라보면 첫걸음이다. 새로 지은 생각을 마음에 사랑으로 심으면서 들여다보면 두걸음이다. 내가 손수 지은 생각이 마음에서 아름다운 사랑으로 자라도록 돌보면서 살펴보면 ‘새걸음’이다. 이 얼거리를 우리가 스스로 배우고 헤아리면서 책이나 영화나 삶을 마주할 수 있으면, 어떤 책이나 영화나 삶을 마주하더라도 가장 깊고 넓은 ‘고요누리(제로포인트)’까지 깨달을 수 있다.


  그러니까, 루시도 깨달아서 철이 든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고, 우리들 누구나 깨달아서 철이 든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약물 힘을 빌어야만 깨닫지 않는다. ‘약물’은 우리가 스스로 수수께끼를 내고 실마리를 푸는 온갖 ‘길(가능성)’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밥을 먹다가 깨달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길을 걷다가 깨달을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죽음을 보고 깨달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새나 나무를 보고 깨달을 수 있다. 아무튼, 철이 들어 새로운 숨결로 거듭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굳이 ‘1차원 세계에 있는 몸뚱이’를 붙잡을 까닭이 없다. 1차원 세계 몸뚱이는 가만히 내려놓고, 모든 차원을 홀가분하게 넘나들면서 날아다니는 ‘까만 씨앗’이 되어 ‘하얀 바람’을 타고 다닌다. 영화 〈루시〉를 보는 사람들이 적어도 ‘양자물리학’은 공부하기를 바라고, 양자물리학을 웬만큼 공부했다면 ‘람타’도 공부하고서 이 영화를 새롭게 볼 수 있기를 빈다. 4348.4.10.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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